전통과 반(反)전통 사이에서 피어오른 긴장과 이완
김성진의 〈앵무살수〉
김성진의 만화 〈앵무살수〉(2020~현재)를 많은 사람들은 전통 무협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이 무협이라는 장르에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이 작품을 호명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무협만화를 무협만화라고 부르면 되는 것을 굳이 작금의 시대에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인가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해결하는 과정은 〈앵무살수〉가 많은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이유를 진단해보는 과정이 되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존 무협만화와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겠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질문해보자. 전통 무협만화에서 전통은 무엇인가. 다양한 측면을 몽상해 볼 수 있겠지만 단순히 생각했을 때, 지금 이곳의 만화와는 사뭇 다른 표정임에는 틀림없다. 덩달아 지금 만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쫓아온다. 역으로 지금 만화를 부정하면서 ‘전통’의 형태를 보다 선명히 그려볼 수도 있겠다. 이는 부정의 방식으로 전통의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방점은 ‘다르다’에 찍힌다.
지금 만화는 피상적으로 말해 주류 플랫폼인 웹툰이다. 종이책이 아닌 웹의 형식으로 구현된 만화다. 종이책 만화이건 웹툰이건 똑같은 만화이지만 만화가들은 자신의 만화를 ‘잘’ 표현해내기 위해 노력했고, 새로운 플랫폼에서도 ‘잘’ 적응하기를 갈망했다. 만화가들에게 이것은 시대적인 요청이자 의무였다. 적응하지 못할 경우 도태될 수도 있으니 인정과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감각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쥐었을 때 낯섦을 밀어내고 즐기는 단계로 진보할 때까지 애쓴 것처럼, 만화가들 또한 웹이라는 환경에 잘 적응하기 위해 오랜 시간 분투해야 했던 것이다.
▲<그림1> 〈앵무살수〉 Ⓒ 김성진
세대론의 측면에서 젊은 작가에겐 유리했을 것이고 기성세대들은 덜 유리했겠지만 이미 펼쳐진 판이 웹이었으니 어떻게 하랴.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만화의 흐름이 이러했으니 비평의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평가들 역시 종이책이 아닌 웹툰을 논해야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니 세로가 아닌 가로로 펼쳐지는 칸과 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이완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옳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지금 현재 축적되었으니 더 이상 늘어놓을 말이 없다.
만화가 이현세는 어느 한 방송에서 만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과거에는 문장력과 묘사력이 굉장히 중요했지만, 지금은 긴 문장을 더 이상 독자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세밀한 인물 묘사나 풍경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해 언급한 이현세의 이러한 견해는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하나의 표정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시대적인 이러한 흐름에 〈앵무살수〉는 동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성진의 만화는 문장력에서도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고, 묘사에 있어서도 현재의 그것과 상이할 정도로 탁월하다. 그는 웹툰이 아닌 종이책으로 이 작품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누가 읽어도 웹툰으로 선보인 만화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만화책 같은 만화다.
▲<그림2> 〈앵무살수〉 Ⓒ 김성진
만화책 〈앵무살수〉는 소년 시절 부모님 몰래 만화책방에서 읽었던 그 당시 그 느낌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웹툰을 발표하기 전에 책을 미리 염두에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 책으로 접한 이하진의 〈도박 중독자의 가족〉(2022), 최훈의 〈프로야구 생존기〉(2022)와 비교해 본다면 그 차이를 손쉽게 실감할 수 있다. 창작의 목적이 웹툰에 경사된 것과 종이책을 염두에 둔 것은 다르다는 점에서 〈앵무살수〉는 후자에 속하는 듯하다. 이러한 특징을 두고 여러 사람들은 평범한(?) 무협만화에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이 견해는 웹툰 오타쿠(독자)들의 반응에서 증명 된다. “작화도 작화지만 스토리까지 완벽한 작품이다”(qqq4****), “대사의 품격이 살아있는 정통 무협이다”(int1****), “추상적인 감각을 내용과 대사, 그림체, 분위기만으로 이야기의 색깔을 고스란히 전하는 능력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kwj0****)와 같은 흥분된 반응은 웹툰 〈앵무살수〉의 형식을 가름케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징후’적인 이러한 반응이 동시대의 웹툰 형태를 새롭게 응시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최근에 화제를 불러 모았던 레이첼 스마이스의 〈로어 올림푸스〉(2020~현재) 역시 한국에서 볼 수 없던 작화 형식으로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바 있다. 즉, 웹툰도 이제는 웹툰에 최적화된 형식뿐만 아니라 ‘문장’과 ‘묘사력’ 또한 굉장히 중요한 시대에 도달했음을 김성진의 작품은 징후적인 사건의 형태로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문장력과 묘사력은 옛것과는 다른 맥락의 ‘그것’이겠다.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니 만화 관계자들은 이러한 징후를 흘려 넘겨서는 안 된다. 테크놀로지적인 기술에만 목을 매달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AI나 포스트휴먼이 아닌 만화가 개인의 고유한 숨결이, 웹툰에 서도 값지게 평가받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중한 ‘결’과 ‘웹’ 환경이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는지를 좀 더 고민해야 할 차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글의 주요 소재인 웹툰 〈앵무살수〉에 대해 논해보자.
첫째, 작가는 인간의 탐욕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이것은 탐구한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끝이 없으니 그렇다. 그래서 이 만화는 종결될 때까지 욕망의 대상을 움켜잡지 못하게 놔둘 것이다. 움켜잡는 순간 만화는 망가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있는 곳엔 늘 탐욕이 있고 탐욕이 곧 인간”이라는 설정을 끝까지 밀고 나갈 확률이 높다. 그래서 욕망의 실체를 확인해야 하는 독자들은 손을 뗄 수 없다. 둘째, 선과 악의 형태로 인물이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만화에 등장하는 ‘일족’은 욕망을 찾고자 애쓰기보다는 고통(질병)으로부터 자신의 일족을 구하기 위해 욕망을 좇는 악의 편에 선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이것은 윤리의 지점인 것이다. 이처럼 〈앵무살수〉는 중층적인 인간의 모습을 작품에 담아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값진 평가를 받은 것이다. 셋째, 말풍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사가 수준이 높다. 높다기 보다도 드라마틱하다. 가령, 만화가는 어느 한 시인의 유명한 시구절을 차용(借用)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만화의 영역에서도 시적인 언어가 요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수준 높은 언어가 웹툰에서도 통한다는 말이다. 이제는 웹툰의 형식으로 만화를 잘 그리는 것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이거나 예술적인 감각도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넷째, 김성진 만화가의 오래된 문제의식 같기도 한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제는 만국의 공통 주제라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은 종이책보다는 웹툰에서 효과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치다. 가령, 그는 이야기를 사건(시간)이 일어나는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는다. ‘동시성’의 형태로 시간과 공간을 재현한다. 이러한 만화적 연출 기법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내리게 한다. 동시에 촉각과 시각은 흥분된다. 그리고 이 흥분은 〈앵무살수〉를 호명하게 만든다. 여섯 번째, 지역성이다. 여기서 지역성이란 〈앵무살수〉의 시대적인 공간이 저 멀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장소다. 하지만 이런 지역성은 큰 메리트가 없다. 오히려 서사 체계가 더 값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이 ‘이곳’이라면 독자들에게 조금은 더 흥미롭겠다. 민족주의에 매달리는 것은 피해야 할 대상이지만 〈앵무살수〉는 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곱 번째, 곳곳에 숨겨져 있는 명장면들이다. 극적인 순간을 잘 연출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장르 영역이건 이 요소는 중요하다는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다만, 김성진은 이런 요소마저도 작품 속에 적절히 잘 녹여냈다. 한마디로 존나 간지난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생각해 보니 지나치게 김성진의 작품을 호평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웹툰 문화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균열을 가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앵무살수〉는 웹툰의 형식으로 재현된 무수히 많은 작품 중, 보기 드문 새로운 표정(?)이다. 그의 만화가 진정으로 새롭다면 그가 품고 있는 장점은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