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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은 퓨전의 꿈을 꾸는가?

〈지금, 만화〉 제18호(2023. 7. 5. 발행) Cover Story 수록기사

2024-01-31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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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은 퓨전의 꿈을 꾸는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무협 소설에서 자주 인용되는 한자 성어이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자 세상은 돌고 또 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

  그렇다. 무협 소설은 이 말에 가장 걸맞다면 걸맞을 것이다. 그간 무협은 장르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계속 쇠락과 부흥이 반복되었다. 비교적 근래인 2018년 즈음만 해도 무협 장르는 죽었다는 말이 팽배했다. 특히 무협 웹소설이 망했다는 이야기가 수시로 돌았다. 그렇지만 2023년, 지금 무협은 장르적으로 크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쇠락과 부흥이 반복되면서도, 끝없이 읽히는 무협은 대체 무엇일까.

 

▲ <정협지> 표지

  1961년 김광주가 《정협지》를 편역하여 《경향신문》에 연재한 이래, 무협 소설은 현재까지도 유력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광주에 이어 와룡생의 무협 소설이 번역되어 성공이 이어지는 와중에, 소위 말하는 저질 번역이 난무하면서 장르적으로 급격히 그 힘을 잃어버렸다. 고훈의 〈만화 ‘신비한 서른세째문’의대중성 확보 전략에 관한 연구〉(2017)과 오현리의 〈한국 무협 만화의 어제와 오늘〉(2001)에 따르면 무협 만화도 대본소를 통해 나름대로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협 만화나 소설은 걸핏하면 불태워지고, 종사자의 열악한 처우로 인한 온갖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건전’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협 장르의 세계는 언제나 불온한 자들이 사회적 규범의 밖에서, 자신의 의지를 행하는 이야기였다. ‘건전한’ 국민을 양성해야 한다는 명제 아래에서 끝없이 규범을 거부하는 ‘무협’은 불쾌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81년, 박영창이라는 무협 소설가 겸 번역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될 때, 그 명분 중 하나로 소환된 것이 그의 무협 소설 《무림파천황》이었다. 변증법으로 정사(正邪)를 설명한 것이나, ‘강북 무림의 남진(南進)’ 같은 것이 이적 표현이라는 이유였다. 1981년은 무협 소설이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창작되는 시점이었는데, 박영창이 겪은 필화사건은 이후 무협 소설에 짙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무협 소설은 암묵적으로 명징한 선악, 영웅담 중심으로 흐름을 잡게 되었다. 80년대 중후반 들어 무협 소설은 자기복제와 열악한 대우, 대명 시스템의 한계를 맞게 되어 빠른 속도로 쇠락했다.

  이 무렵 대표적인 무협 작가들은 다른 길로 나아간다. 금강은 역사 소설을 쓰다 2000년대 초반 대표적인 연재 플랫폼인 ҅O! 武林(현재의 문피아)҆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사마달과 야설록은 스토리 작가로 전업하여 여러 만화가와 협업하기도 했으며, 검궁인은 출판업으로 나아가 전자책 사업을 빨리 시도하는 등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80년대 무협 소설(속칭 구무협)의 이야기이다. 무협 만화는 여전히 대본소를 중심으로 꾸준히 소비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활동 중인 천제황, 하승남, 황성 같은 작가들이 이 무렵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90년대 들어서서 대본소가 쇠락하고, 대여점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무협 소설이 대본소의 한계를 넘어서서 PC통신 등을 통해 일반적인 출판시장으로 본격적으로 진입하여 ‘신무협’이라는 장르적 전환을 보여준 것처럼, 무협 만화 또한 소년 만화 잡지를 통해 더 폭넓은 계층으로 다가가게되었다. 지금까지도 인기를 누리는 전극진·양재현의 〈열혈강호〉(1994~)와 류기운·문정후의 〈용비불패〉(1996~2002, 외전, 2006~2013)를 비롯해 소주완·지상월의 〈붉은 매〉(1992~), 최미르의 〈강호패도기〉(2000~2008) 등이 이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어느 정도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여러 지원책 등이 겹치면서 무협만화는 더욱 융성하기도 했다.

 

▲ <용비불패> ⓒ 문정후, 류기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러서 무협 소설이나 만화가 공히 대중적으로는 ‘가벼운’ 느낌의 작품들이 흥행가도에 오른 상황이었다. 〈비뢰도〉(목정균, 2000~)의 비류연, 〈열혈강호〉의 한비광 같이 좀 더 희극적인 느낌을 주는 캐릭터들이 주류로 자리하는데, 이들은 무협 소설하면 으레 등장하는 전형적인 ‘영웅’의 상과는 거리가 먼 유형이다. 정파도, 사파도 아닌 자신의 캐릭터성을 관철하는 유형인데, 이런 캐릭터의 등장은 무협이 장르적 색을 잃어버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린 독자를 끌어들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시기의 무협 소설이나 만화 모두 ‘공장’을 벗어난 작품이 주류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장을 벗어나면서 다양한 장르적인 시도가 일어났고, 여러 방향에서 의미있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좌백의 《대도오》(1995)와 이를 만화화한 권가야의 〈남자 이야기〉(1998~2002)처럼 의미 있는 작업이 있기도 했다. 다만 2000년대 중후반 들어서 웹하드 같은 불법 공유를 통해 온갖 스캔본이 쏟아져 나오면서, 무협 장르를 비롯한 서브컬처 전반은 심각한 침체를 겪게 된다. 소설은 이미 전부터 ‘텍본’이 되고 있었지만, 스캔본이 등장하면 서 소설이나 만화 모두 급속도로 불법 복제물이 제작되어 장르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반도, 그리고 중원

  이 무렵의 무협 소설과 만화에서는 모두 여러모로 재밌는 현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한반도계’ 캐릭터의 비중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한백림의 〈화산질풍검〉(2004~2005)의 청풍이나 박성우의 〈천랑열전〉(1997~2000)의 연오랑처럼 아예 주인공이 고구려계인 경우도 있고, 무협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백파(백두산을거점으로 하는 문파)나 〈강호패도기〉의 이백처럼 임팩트가 강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그 예시이다. 90년대 후반부터 한동안 인터넷을 휩쓸었던 유사 역사학의 영향이 장르적으로 꽤나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무협 장르가 ‘한국’의 장르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무협 장르가 아무리 중국의 것과 가깝고, 형식을 모방했다고는 할지언정 내부의 담론이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현실에 맞게 변화하고, 장르 내의 개연성을 갖추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관습이 개편되기도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역사 문제로 인한 갈등이나 IMF로 인한 불안 심리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이런 현실 이외에도 이미 무협은 중국적 외피를 차용한 한국의 장르로 변화했기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엄연히 존재하는 ‘한반도’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가 되었고, 무협 장르를 한반도계 인물이 휩쓸기 시작했다.

  그간 무협에서는 북방계나 티베트계 캐릭터는 종종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한반도계의 인물이 개입하면서 더 많은 유형의 캐릭터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캐릭터들의 등장은 무협 소설에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그간 고정적인 상태였던 무협 장르의 무공이 계속 사용되다가 비교적 친근한 감각의 한반도의 무술이 들어오며 그 흐름에 약간이나마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어느 정도는 무협적으로 재구성되었고, 독특한 재해석이 가미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유사 역사학적인 요소가 개입하면서 뒤틀린 방식으로 재구성된 부분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캐릭터의 확장은 이내 장르의 기반이 되는 세계의 확장을 불러온다. 이전에 비해 더 적극적으로 중원의 바깥을 서사에 이용했으며, 필화로 인해 다소간 위축되었던 역사성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세계가 확장되면서 최소한의 구체성을 위해서라도 다방면으로 ‘무림’이라는 곳에 나름대로의 리얼리티를 불어넣기 위한 집단지성의 흐름이 있었다. 다만 불법공유로 인한 폐해가 서브컬처 전반에 큰 영향을 주면서 이런 흐름이 다소 주춤했던 것은 씁쓸한 현실을 보여줄 따름이다. 

  이렇게 한반도계 캐릭터 외에도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진 캐릭터가 무협 장르로 유입되면서 무협은 장르적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물론 그 기초가 되는 관습이 상세하기에 새로운 것과의 조화는 다소 그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변화의 씨앗을 드러낸 무협 장르는 다른 장르와 결합하며 또 다른 양태를 드러낸다. 그 결과물이 바로 ‘퓨전’이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를 만나며: 퓨전의 시대

  90년대 후반, 한국은 여러 장르가 동시다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무협을 비롯하여 《해리포터》(J.K. 롤링, 1999~2007) 시리즈 같은 일련의 번역 판타지 소설과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1997~1998) 같은 국내 창작 판타지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런 장르적 유행은 무협 장르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소위 말하는 ‘퓨전’의 흐름이 그것이다. 그 시작은 단순했을지도 모른다. 마법사나 기사가 세냐, 무림인이 세냐하는 식의 가벼운 논쟁에서 이야기가 불거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전동조의 《묵향》(1999~)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이후 우리나라 서브컬처에서 큰 몫을 하게 되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심지어 외양은 젊다지만 엄연히 무림의 노 고수인 묵향이 어린 여자아이의 몸으로 판타지 세계에서 싸운다는 점에서 오는 충격은 그 효과를 더 극대화했다고 할 수 있다.

▲ <묵향> ⓒ 정동조

▲ <황제의 검> ⓒ 임무성

  이런 퓨전 장르는 소설에서는 대표적으로 《묵향》 외에도 임무성의 《황제의검》(2001~2004), 김대우의 《이드》(2001~2006) 등을 들 수 있고, 만화에서는 나인수·김재환의 〈마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퓨전의 경향은 다소 경직된 관습을 갖추고 있었던 무협에 새로운 흐름을 불어넣기도 했다. 앞서 말했던 확장의 과정에 ‘판타지’의 요소가 더해지면서 무협의 흐름이 급변한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긍정적인 면 외에도 부정적인 요소를 동반하기도 했다. 특히 장르적 관습의 붕괴만이 아니라, 다분히 편의주의적인 관습의 조합이나 기존 장르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문제 같은 예시를 들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서 한국만의 독특한 장르적 관습을 구성하기도 한다. 퓨전의 등장은 그만큼 장르적 충격이 강한 편이었고, 일종의 ‘왕도’적인 관습이 되어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웹소설 장르의 한 기반이 되기도 했고,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끼친 장르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무협의 장르적 관습이 강한 만큼 다른 장르의 관습과 함께 사용하기에는 까다로운 점이 있어 이세계인이 무림에 오는 서사보다는 무림인이 다른 세계로 가게 되는 서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어찌 본다면, 이 시점에 이르러서 무협 장르는 사회적 규범의 세계로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무협의 서사에서 주인공은 ‘협’이라는 명분을 통하여 ‘무’를 휘두르고는 있으나, 이전의 ‘유협’의 전통은 많이 희석되어 있다. 무림인들도 이권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명분으로서의 협만 이용하는 모습이 서사의 중심이 되며 이전의 협객으로서의 모습은 흐려졌다. 그만큼 무협 장르가 한국 사회 내부로 침윤하며 ‘협’이라는 모호하고 난해한 관념을 포기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애매한 ‘협’의 가치에 따라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퓨전의 세계에서 ‘올바름’ 정도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한층 받아들이기 쉬웠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무협 장르는 격변을 겪은 만큼, 이러한 가치관도 급변하게 되었는데 그 한 지점이 ‘퓨전’인 것이다. 분명 가까운 나라의 장르였지만, 어느샌가 한국의 장르로 스며들어 한국의 것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협의 가치관은 다소 무화되며 그 틈으로 다른 장르와 여러 요소가 섞이며 현재의 무협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퓨전’이라는 흐름에 대해서 크게 두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무협의 강고한 장르적 관습의 문제일 것이고, 하나는 장르의 기본이 되는 가치관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흐름은 무척이나 오래도록, 지난하게 변화가 이루어졌다. 무협의 고정적인 관습에 대한 경도, 혹은 기존의 장르적 관습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때로는 ‘한국적’인 것이 무협과 함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등 여러 문제가 무협 장르의 변화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선후관계가 다소 모호할 정도로 동시다발적이었다. 어찌 본다면 여러 열망이 합쳐지면서 일어난 일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장르적 확장이 있었기에, 퓨전이라는 흐름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영화 〈존 윅〉 시리즈도 무협 장르라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그것이 할리우드의 방식으로 재구성되었을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의 무협도 중국의 무협과 다르게, 한국의 방식대로 재구성된 것이다. 다만 그것이 눈에 뜨이는 대신, 장르의 관습이 직조되고 새로운 장르와 교류하는 과정을 거치며 천천히 일어났을 뿐이다. 한국의 무협은 ‘퓨전’이라는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서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을지언정, 무협 장르가 어떻게 한국의 서브컬쳐에서 하나의 축이 될 수 있었는 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협과 퓨전의 흐름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진이미지

이주영

장르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