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디카스(Dedicace) 문화와 사인(Sign) 문화
[ 앙굴렘을 다녀와서 ]제33회 앙굴렘 만화축제 한국만화 특별전의 일환으로 열리는 작가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문화콘텐츠 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1월25일부터 30일까지 프랑스 앙굴렘을 다녀왔다.
나로서는 더 없는 영광의 순간이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도 만화축제를 다니지 않는 나였고, 한국에서도 사인회를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앙굴렘 만화축제를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은 ‘남녀노소가 모두 진지하게 만화를 즐긴다’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바로 그 ‘뻔한’ 풍경에 대한 것이다.
축제자체는 어찌 보면 좀 심심하다. 우리가 축제하면 연상하는 요란한 음악도 눈을 자극하는 볼거리도 별로 없다. 큰 조형물도, 화려한 복장으로 춤을 추는 언니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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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들 |
그저 사람들이, 작가들이, 독자들이, 출판인들이 많이 여기저기로 몰려다니고 몰려오고 서로들 만나고 소개하고 인사하고 약속하고...그게 다 프랑스 말로 이루어지니 나로서는 좀 심심하고 지루한 구석이 있었다. 사교파티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좀...고독했다.
프랑스 출판사 부스를 기웃거리다가 자료로 쓸 겸 만화책을 한 권 사서 나오다가 마침 그 책의 저자가 부스 입구에서 자신의 책을 산 사람들을 위해 사인을 해 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하나 얻을 겸 10여명이 선 줄의 맨 끝, 50은 넘어 보이는 자글자글한 주름의 아주머니 뒤에 섰다. 하지만 그들의 사인은 우리의 것과는 달라서 그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터라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곳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20분쯤 후 다시 그곳을 지나쳤는데 아직도 줄은 그대로고 맨 뒷줄에는 주름 자글자글 아줌마가 옆의 누군가와 책에 대해 이야기 하며 아직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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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
300미터짜리 에펠탑을 그리면서 수천 개의 철근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세서 고지식하게 그리는 것도, 대충 송곳처럼 그려놓고 옆에 말풍선에 ‘오~~에펠탑!’라고 써 놓는 것도 다 창작자의 선택이다. 창작자는 자기가 손을 대야하는 모든 곳에서 -단추하나에서 별 하나까지-이런 선택의 과정을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건 거쳐야 한다. 수십만, 혹은 수백만 가지의 선택을 통해 결국 만들어지는 하나의 책은 그래서 마법을 통해 창조된 하나의 세계이다. 수 만 명의 작가가 밤을 새가며 저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고 당대의 이러저러한 미학적 측면들과 유행, 판매 가능성 등을 고려한 출판인의 까다로운 조건과 타협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권의 책이 세상에 나와 독자를 만나게 된다. 오랜 시간을 통해 나온 그 책을 접하고 그 세계에 매료되어 그것을 구입하고 창작자가 직접 그 마법의 한 조각을 자신의 눈앞에서 자기를 위해 펼쳐 보인다는 것은 그래서 독자에게, 창작자에게 모두 행복한 일일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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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중인, 아니 헤프닝(?) 중인 본인 |
그것을 즐기는데 나이 따위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존경심에서건 허영심에서건, 그 아주머니는 사인을, 아니 그들의 단어로 데디카스(dedicace:일반적으로 저자가 자신의 책을 구입한 사람에게 보답으로 그려주는 그림)을 받고야 말았을 것이고 그런 만남들이 수없이 일어나는 곳이 앙굴렘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인문화-그저 이름과 간단한 캐릭터를 그려주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실용적으로 개발된 사인문화-와는 다른 그 풍경 앞에서 작가 사인회에 참석한 한국의 만화가들은 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인지에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그 전 과정-책을 판매하는, 아니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과정이 생략되어 버린 것이다. 사인회와 데디카스 문화의 차이 앞에서 살짝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의 사인 문화에 대한 선생님과 선배들의 성토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백화점에서 아이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정확히는 부모들을 글어 들이기 위해- 만화가를 동원한 사인회, 창작 자의 세계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그림 그리는 것을 그냥 호기심에 구경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작가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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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중인, 아니 헤프닝(?) 중인 본인 |
스타라는 약간의 허영에, 공인이라는 의무감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저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 모두에게 사인을 해주기 위해 쉴 새 없이 그려대야, 찍어내야 하는 분위기, 그리고 나중에 누군가에 발에 밟혀 여기저기 나뒹구는 구겨진 사인지....어린이에게 해가 된다며 만화책을 불태우면서도 동시에 어린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화가를 동원하는 이중적인 잣대로 대접받고 있는 우리 만화문화가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선생님들 이하 작가 분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서 사인회에 임했다. 그리고 그 것은 그들이 보기에 또 하나의 ‘문화’였던 셈이다. 자신들이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접한 적은 없지만 바로 앞에서 구현되는 하나의 작은 세계에 대한 경탄과 감사, 그리고 관심...그리고 이미 책이 번역된 몇몇 선생님들 에게는 일부러 독자들이 사인회 시간을 확인하고 찾아오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으며, ‘망가’의 과도한 자극성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만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독자도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무엇인가 흘러 새로운 작은 문화를 형성한 셈이다. 그렇게 작고 다양한 만화와 관련된 문화들이 모여서 축제의 모습으로 흐르는 곳이 앙굴렘인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경험은 이전의 다른 경험과 비교할 때 온전히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앙굴렘 만화축제를 나는 오래전에 ‘화끈’ 관계자로 시카프에 단 한번 참가한 경험과 비교할 수밖에 없다. 당시 화끈 부스에 있으면서 좋았던 경험도 많지만 단연 기억나는 것은 애들 다니는 곳에 여자 벌거벗은 표지의 만화를 팔아도 되겠냐는 어떤 아저씨의 짜증어린 항의성 꾸중이었다. 행사장은 온통 상업부스에서 틀어놓은 만화주제가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고..그에 반해 도시의 한 부분 전체를 행사장으로 조직한 앙굴렘은 조용하다. 곳곳에서 작가들과 출판인들의 만남, 작가들과 독자들의 만남, 독자와 독자들의 수없는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행사장을 이동하면서 옛 도시의 정취를 즐기는 맛도 만화를 보는 것 이상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아이와 어른이 같이 만화를 본다. 아니 방드데시네를 본다, 가 정확하겠다. 비약해서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즐긴다, 라고 하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그래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피해의식과 소위 예술에 대한 과도한 동경..일지도 모르겠다그들의 그저 자연스러울 뿐인 일상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네들 스스로도 만화문화가 지나치게 예술적 아우라에 편승함으로 인해 대중적 오락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데 나는 이미 낡은 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보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복잡하다.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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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심가의 호텔앞에 설치된 한 출판사 부스 앞의 조형물. 시내를 다니던 만화버스와 더불어 언듯 눈길을 끄는 유일한 조형물. 그만큼 자극적인 볼거리는 드물었다. |
한 번의 여행이란, 한 번의 만남이란 결국 이러한 오해와 혼란의 연속이다. 그곳의 문화를 동경함과 동시에 깎아 내리려는 심리가 기이하게 공존하는 법이다. 예전에 열하일기를 썼던 당대의 태양인 연암 박지원선생도 북경에서 한참 떨어진 변경의 작은 마을을 둘러보고 나선 청나라의 화려한 문물들에 기가 죽어서 시기심에 말을 다시 돌리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나같은 소심한 만화가에 있어서랴. 하물며 세계최대의 만화축제라고 불리는 앙굴렘이었으니...
그러나, 타인의 문화와 자신의 문화를 비교하고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당황하는 이 상황은 다행이도 교류의, 흐름의 출발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점점 더 접하고 더 사고하고 흐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동화될 것이다. 만화라는 매체가 겪고 있는 현재적 상황과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 편견에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게 될 것이고 쓸데없는 오해들로 정력을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앙굴렘은 더 이상 멀리 떨어진 남의 잔치가 아니게 될 터이고 우리의 시카프 같은 행사도 그들에게는 동양의 만화, 한국의 만화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꼭 방문해야 하는 멋진 성지가 되지 않을까. 문화는 흐르는 것이다.
top [만화정보 vol. 28 _ 2006 3/4]
글 : 장경섭
장경섭 작가 프로필
겨레 문화센터 만화전문반 1기
인디만화지 화끈에 장모씨 이야기 연재
장편그와의 짧은 동거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