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만화가란 무엇인가.
2011년 5월 31일 서울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선 박기정(76) 화백의 강의가 열렸다.
놀랍게도, 박 화백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강의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시사만화와 극화, 양 분야를 평정한 만화계의 거장이다. 그런 그가 단 한 번도 강의를 한 적이 없다니. 그는 평생 강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살아왔다. 모 대학에서 석좌교수 제안도 있었다. 그것도 마다했다.
[박기정 화백 - 출처. 중앙일보]
“나는 강의 체질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이 잘 하고 있는데 늙은이가 나설 일이 아니다. 깊이 생각하고 한 일이다.”
50여 년 만화가의 길을 걸은 박 화백은 처음이자 마지막 강의에서 만화가에 뜻을 둔 후배들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
“용광로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쇳물 같은 것이 학생이다. 땀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시사만화, 극화, 애니메이션 등 각 분야의 유명한 만화가가 탄생하게 된다.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어라.”
만화 ‘도전자’를 그린 박 화백은 아직도 식지 않은, 뜨거운 창작 열정을 후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끈질긴 부탁으로 박 화백을 강의 자리에 끌어낸 이현세를 비롯해 박 화백의 제자이며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는 말로 유명한 이두호도 학생들과 똑같이 강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박수를 보냈다.
또한 이 날 한국 만화사의 한 페이지가 쓰였다. 박 화백이 33년 3개월만에 중앙일보 캐리커처 담당 비상근 고문직을 내려놓고 중앙일보를 떠난 날이었다. 1978년 2월 중앙일보에 입사해 만평과 캐리커처를 무기로 정권과 정치인을 통렬하게 비판했고, 제5공화국 시절 온갖 협박 속에서도 한 치의 타협 없이 중앙만평을 연재했던 그는 한국 시사만화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100m와 마라톤을 동시에 뛰다.
박 화백의 이력은 한 마디로 특이하다. 시사만화와 캐리커처의 일인자이면서 대한민국의 창작 극화의 물고를 튼 개척자였다. 1956년 구(舊) 중앙일보에서 시사만화 공수재로 데뷔한 그는 신문사 월급만 갖고는 생활이 어려웠기에 만화 단행본 출간도 병행했다. 박 화백은 시사만화를 100m 달리기, 극화를 마라톤에 비유한다.
“단거리와 장거리를 동시에 뛰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극화는 오래 가니 보람이 있다. 64년작 도전자는 지금도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반면 한순간 통쾌한 건 시사만화다. 그 콧대 높은 위정자들을 박살내니. 그러나 몇 년 지나면 시사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박기정 화백의 대표작 - <도전자>]
그는 초인적인 창작 의지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중앙일보에서 매일 중앙만평을 연재하며 시간, 아이디어와 싸움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됐으면 이런 고백을 할까.
“마감 시간에 종이가 없어 찾으러 다니거나, 편집자가 문 열고 (빨리 마감하라고) 얼굴 비추고 가는 꿈 탓에 요즘도 가끔 가위눌린다. 스트레스는 술로 풀었다. 한 잔 쭉 마시고 잊어버리는 식이었다. 담배는 점점 늘어서 하루에 서너갑 씩 피우게 됐다. 건강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그래서 99년 중앙만평을 그만두었다.”
젊은 시절엔 머리카락도 무성했다. 가족 중 머리숱이 없는 건 박 화백뿐이다. “내 머리카락을 중앙일보 지면에 심었다”는 그의 농담에는 뼈가 들어있다.
60년대 ‘도전자’를 비롯한 숱한 극화를 창작할 땐 사흘밤낮을 꼬박 세워가며 작품을 그렸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이란 자신의 신념을 되새기며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아픔을 권투로 이겨내며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훈이의 열정을 지면에 옮겼다. 50여 년 세월을 시사만화·캐리커처·극화(劇畵)에 불태운 대가로서의 삶 또한 그가 창조한 만화 주인공들의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와 통한다.
직접 인터뷰로 캐리커처의 생생함을 끌어내
박 화백은 사진이나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인터뷰 대상을 만나 캐리커처 했다. 언제나 몸으로 부딪혀 캐리커처를 뽑아냈다. ‘그가 캐리커처를 그리지 않은 사람은 유명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56년 ‘공수재’를 시작한 이후 무려 1000명이 넘는 명사의 캐리커처를 그려냈다.
캐리커처는 특징을 잡아서 그리는 그림이다. 박 화백만의 노하우는 무엇이었을까. “홍준표 의원의 경우 독설이 유명하다. 그래서 입에 초점을 맞춰 그렸다.” 그의 캐리커처를 본 사람들은 통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가장 많이 그린 사람은 YS, DJ, JP였다. 그만큼 그들이 정치사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YS와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YS는 87년 첫 대선 출마 때 박 화백의 허락 없이 중앙일보 캐리커처를 걸게로 크게 만들어 썼다. 박 화백은 야당인 YS의 처지를 생각해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그러나 YS는 87년 대선에서 지고 말았다. 그는 다음 대선(92년)에선 박 화백에게 정식으로 로열티를 내고 캐리커처를 사용했다. YS 지지자들은 가슴에 YS 캐리커처 크게 박은 T셔츠 입고 선거운동 했고, YS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박 화백은 웃으며 말했다.
“공짜로 (캐리커처) 쓰면 떨어진다. 사실 3김은 거의 나와 같이 움직였다. 그 중 JP가 가장 재미있다. JP를 처음 만난 건 중앙정보부장 하던 시절이다. 말도 유식하게 하고, 구수한 사람이다. 반면 두 김씨는 엄숙하고 딱딱한 편이다."
박 화백은 노태우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 노태우 역시 박 화백의 캐리커처를 사용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가장 점잖은 사람은 노태우다. 대선 앞두고 비서실장 통해 저녁 모시겠다고 하더라. 그는 선거용 캐리커처 부탁했다. 로열티도 지불하고, 때 되면 선물도 보내주었다. 아주 정중한 분이다. 시사 만화가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을 같이 먹은 적도 있다."
반면 제5공화국 시절엔 협박 전화를 많이 받았다. 5공의 기관원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정권을 비판하는 그를 매일 괴롭혔다. 백절불굴의 박 화백 아닌가.
“하루는 참다못해 당신이 사나이라면 얼굴을 내밀고 이야기해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좀 뜸해졌다."
박 화백은 책장에 꽂혀있던 스크랩북 두 권을 꺼내들었다. 비단으로 감싼 낡은 스크랩북 표지를 넘기자 빛 바랜 신문 스크랩 속 캐리커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첫 장의 날짜는 1957년 3월 24일. 대한민국 헌법을 만든 유진오 박사의 캐리커처가 살며시 얼굴을 돌린 채강직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50년이 넘은 지금도 그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박 화백의 캐리커처는 격이 다르다. 그 비결은 무얼까.
“그림 속에 인물의 성품이 포함돼야 살아날 수 있다. 그 느낌이 붓을 타고 오는 것이다. (캐리커처를 가리키며) 여기, 조병옥 박사를 보라. 얼굴이 굵은 선으로 표현됐다. 조 박사는 눈썹 없는 호랑이라고 불렸다. 내 캐리커처에서도 눈이 호랑이 같이 보인다. 실제로도 결단성 있게 처신하고, 앉으면 묵직한 인물이다. 그런데 장면 박사는 선이 엷게 나왔다. 그 사람의 섬세함이 반영된 결과다.”
박 화백의 캐리커처는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인터뷰 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향기 나는 사람이 감옥 가서 썩는 경우도 보았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썩기 쉬워지는 거다. 이 스크랩북 속에 담긴 5·16 세력들은 살아있을 때 인터뷰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됐다."
캐리커처는 박 화백의 인격을 단련시켰다. 박 화백의 지인이라면 그가 얼마나 매사 신중하고, 말수가 적고, 겸손한 지를 안다.
“옛날 정치인들에게 많이 배웠다. 그분들 뜸을 들여 대답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20대 초였는데도 독립운동 하신 분들은 나를 박 동지라고 부르고, 독립운동 안한 사람들은 박 화백님이라고 불렀다. 사람에 따라 존칭이 달라졌다. 그 땐 젊은 혈기에 겁이 없는 편이었는데 그들과 대화하며 내가 얼마나 못난지 알았다. 말이란 입에서 나온다고 다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나 역시 말을 줄이다 보니 말을 잘 못하게 됐다. 그 분들을 만나면서 바뀌었다. 요즘 정치인들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니 망언이나 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다."
아직 자신의 캐리커처를 그리지 못한 것도 겸손함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박 화백은 이 대목을 설명할 땐 다소 수줍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얼굴이 못난 탓도 있지만 잘 그리려고 시도하다가 계속 실패만 하는 바람에 아직도 미완성이다.”
[1998년 발행된 박기정 화백의 만화우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
극화 분야에서 박 화백이 한국 만화계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도 박 화백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64년 발표한 황금의 팔을 통해 창작 야구만화를 최초로 시도했다.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이 작품 이후 야구만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 화백은 실제로 경복고등학교 시절 야구선수였다. 중앙일보에 입사한 후에는 경복고 후배인 김동엽 전 해태 감독과 함께 80년 무렵 중앙일보 내에 ‘중앙죠스’라는 야구팀을 창단시켰다. 처음엔 투수를 하고, 나중에 감독까지 했다. 그 당시를 회고하는 박 화백의 말이 참 재미있다.
“재미있게 하려고 땅볼을 유도했는데 야수들이 못 잡았다.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던 고흥길 국회의원이 3루수를 봤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 삼진으로 바꾸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커브는 자유자재로 던졌으니까."
박 화백은 어떻게 60년대에 야구(<황금의 팔>), 복싱(<도전자>), 축구(<치마부대>), 레슬링(<레슬러>) 등을 만화로 그릴 생각을 한 것일까. 치마부대의 경우 계집 아이들이 축구로 사내애들을 누르는 스토리다. 그만큼 소재를 보는 박 화백의 안목이나 연출력은 시대를 앞서갔다.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선수들이 세계무대를 누빌 것을 수십 년 전 예견한 셈이다.
“당시에는 스토리 만화가 거의 없었다. 팔리든, 안 팔리든 남이 안 하는 작품을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박 화백의 만화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침서 같은 작품이었다. 한 만화팬은 훈이가 마라톤을 하기 위해 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장면을 보고 실생활에서 똑같이 실행하고 다녔다고 한다.
박 화백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삶을 부탁했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의사가 돈이 탐나서 자신의 부모에게 소송한 사건 등을 예로 들며 자신 밖에 모르는 태도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박 화백은 중앙일보를 떠나면서 “이제부터 제2의 그림 인생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야구를 배경으로 한 가족만화를 1000쪽 정도 짜놓고 손보기 시작하고 있다. 벌써 수년 째 콘티를 짜놓고, 다듬고 또 다듬는 모습이야말로 거장의 풍모다.
그는 진정한 만화가란 무엇인가를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용광로 같은 열정과 작품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박기정 화백의 레슬링만화 - <레슬러>]
박기정 화백 연보
- 1935년 5월 7일 만주 용정 출생
- 1946년 서울로 이주
- 1956년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 구(舊) 중앙일보에 공수재로 데뷔
- 1960년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캐리커처 연재
- 1963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 1968~71년 초대·3대 한국만화가협회장
- 1978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시사만화 중앙만평 연재
- 1990년 뉴스의 인물 100인전 개최
- 1999년 문화관광부장관 만화공로상 수상
- 2002년 청강만화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2004년 문화의 날 보관문화훈장 수상
- 2009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박기정 특별전 개최
박기정 화백 주요작품
<별의 노래(1956년)>, <은하수 가고파(61년)>, <희극왕 오동추(62년)>, <흰구름 검은구름(63년)>, <도전자(64년)>, <폭탄아(64년)>, <치마부대(64년)>, <황금의 팔(64년)>, <레슬러(65년)>, <가라사대(68년)>, <골목전쟁 해병삼총사(이상 76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