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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오노 요코

오노 요코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 자주 다니던 미용실에 놓인 잡지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타이틀부터 아주 선정적이었는데, 대략 ‘존 레논을 반하게 만든 여자’, ‘비틀즈를 해산시킨 마녀’ 라는 식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후 그 마녀가 실은 괜찮은 예술가란 평을 지나치며 듣긴 했지만 사춘기에 처음 접한 ‘세기의 로맨스’라는 식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오노 요코는 독립적인 예술가라기 보다는 존 레논과 비틀즈와 관련된 ‘굉장한 여자’로만 기억되었다.

2003-12-01 정송희

오노 요코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 자주 다니던 미용실에 놓인 잡지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타이틀부터 아주 선정적이었는데, 대략 ‘존 레논을 반하게 만든 여자’, ‘비틀즈를 해산시킨 마녀’ 라는 식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후 그 마녀가 실은 괜찮은 예술가란 평을 지나치며 듣긴 했지만 사춘기에 처음 접한 ‘세기의 로맨스’라는 식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오노 요코는 독립적인 예술가라기 보다는 존 레논과 비틀즈와 관련된 ‘굉장한 여자’로만 기억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영국인들을 비롯해서 존 레논과 비틀즈를 알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노 요코는 예술계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남편인 존 레논이 말했듯이 ‘너무나 유명한 무명의 예술가 most famous unknown artist 였다. 나 역시 그렇게 굳어진 선입견을 가지고 지내다가, 올 여름 지하철 안에서 벽에 붙은 한 여자의 고요한 표정에 끌려 걷던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것은 로댕 갤러리에서 오노 요코 전시회를 한다는 내용이었고 포스터의 여인은 오노 요코 본인이었다.

1. 일상과 미술의 유쾌한 관계 - ‘경이’, ‘파란 방 이벤트’

‘파란 방 이벤트’ - BLUE ROOM EVENT, 1966

 

또 다른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안고 들어간 전시장 입구 가까이에는 투명한 플랙시글래스로 만들어진 작품 경이[AMAZE]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고 흰색 판 위에 발을 딛고 얼굴을 들면 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로 주변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코너를 돌기도 하고 막다른 곳에 잠깐 머물다 보면, 어느 새 입가엔 웃음이 배어 나온다. 어린 시절 친구와 같이 술래잡기를 하다가, 햇볕이 비추는 조용한 조그만 골목길에 들어선 기분과 비슷하다. 투명한 플라스틱 판은 바로 옆의 풍경을 그대로 투과시키지만 빛을 더 증폭시키고 있고, 위쪽 천장부분이 뚫려 있지만 옆에 세워진 플라스틱 벽 덕분에 소음이 어느 정도 차단되어 있어서, 내밀하면서도 공개된 듯한, 이중적인 느낌이 든다. 마치 알면서 모르는 척 즐기는 게임 같다. 미로 가운데에 서 있는 벽은 유독 거울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수세식 양변기가 달랑 한 개 놓여있다. 웃음소리를 참아가며 변기에 앉을까 말까 망설인다. 거울 안쪽에 서 있는 필자로서는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보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중거울 벽임을 감안하면, 잠깐 변기에 앉아도 괜찮을 듯 싶었지만, 벽 밖에 빤히 보이는 사람들의 존재감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미로[a maze]’ 속에서 충분히 즐거우면서도 ‘놀라운[amaze]’ 경험을 한 셈이다. 좀더 환해진 빛, 최소화된 소리, 내밀한 공간, 배설을 위한- 하지만 굳이 배설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쾌한 공간이다.

오노 요코의 열린, 자유로운 상상은 ‘의도된 전치’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또 다른 설치작품 ‘파란 방 이벤트’라는 이름의 새하얀 공간에 들어가면 구석엔 조그마한 비디오 화면이 푸른 색을 비추고 있고, 벽에는 깨알같이 조그마한 타이포그래피로 문장이 하나씩 쓰여져 있다. 제목 ‘파란 방’과 이 방안에 있는 문장들은 실재하는 게 아니라 관념의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그 황당한 발상들에 웃음이 나오지만,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문장들을 바닥에 바짝 붙거나 발끝을 세우며 읽어갈수록, 기존 관념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장들을 더더욱 요구하게 된다. 그러다 ‘이 방이 파랗게 될 때까지 머무르시오’ 에 이르면, 관객은 물 속에서 부유하는, 달콤한 꿈에 잠긴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에 없다’ 는 언급에 다다른 순간, 편안하고 고요했던 공간이 사라지고 그 안에 가득 찼던 양수가 빠져나가면서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다. 그러한 느낌을 안고 ‘파란 방’이라는 이름의 하얀 방을 나왔다.

2. 플럭서스 - 개념미술 - 선불교적 미학 ; ‘지시문 회화’

오노 요코가 중심이 되어 활동했던 플럭서스는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맨해튼 남단에서 일어난 전위적 운동의 하나였다. 플럭서스는 뒤샹의 다다이즘에서 발생하였고, ‘비예술적, 반예술적, 자연적, 현실적’인 즉흥성을 발전시켜 근대미술의 관습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추상 표현주의의 과장된 제스처와 팝아트의 상업주의에 반발하여, 다다, 현상학, 실존주의로부터 발생된 무정부주의적 감성을 옹호했던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미니멀리즘, 우연성, 일상적 사실주의와 관련된 동양적 감성에 중심을 두었는데, 주로 일상생활과 미술 사이의 자연스럽고 유쾌한 관계를 다룸으로써, 미술을 미학적 영역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영역으로 되돌릴 것을 역설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과 젊은이들 사이에 서구 합리주의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일면서, 동양의 전통사상 등 비서구적 가치들이 대안문화로 확산되던 사회적 움직임의 또 다른 반영이었던 것이다.

1961년 요코는 자신이 ‘지시문’이라 부른 작품들을 전시했다. 처음에는 구체적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회화작품을 전시했고, 나중에는 문자화된 지시문 자체를 전시하고 그것들을 묶어서 ‘그레이프프루트’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지시문을 통해 전달되는 요코의 개념은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 그 개념들이 발전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요코의 ‘지시문 회화’는 상상의 방식으로 타인이 작품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지속적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시문 회화’의 작업방식에는 재밌는 부분들이 있다. ‘작가’를 작품에서 지우고, ‘작품’조차 남김없이 지움으로써 작품의 ‘개념’만이 남도록 의도한 부분이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예술개념과는 상반된 개념 (전통예술에서는 작가성, 작품의 유일성과 그 가치의 보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일상, 작가와 관객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주체인데, 어떻게 작가를 지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일단 요코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시문’에 따라 작품 제작에 참여시킴으로써 작품에 대한 배타성을 포기하였고, 남편 이치야나기에게 지시문마저 대필시킴으로써 필체에 드러나는 작가의 느낌과 감성을 최대한 배제했다. 나중에는 이 지시문을 잡지인쇄용으로 복사함으로써 작품의 ‘유일성’마저 포기했다. 그녀가 고안한 ‘지시문 회화’ 작품들 대부분이 그 예가 되겠지만, 그 단적인 예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복사하거나 사진 찍었을 때만
존재하는 회화]

사람들이 당신의 그림을 복사하거나 사진 찍게 하시오
원작을 못쓰게 내다 버리시오

[삼악장 회화]

포도나무를 키우시오.
날마다 물을 주시오.

첫 번째 악장-포도나무가 무성할 때까지
두 번째 악장-포도나무가 시들 때까지
세 번째 악장-벽이 사라질 때까지

‘삼악장 회화’(회화를 위한 지시문‘ 중) - PAINTINGSIN THREE STANZAS, 1962

 

[연기 회화]

담배를 가지고
아무 때나 얼마 동안이든
캔버스나 완성된 그림에 불을 붙이시오
연기가 움직이는 것을 보시오
캔버스나 그림 전체가 타 버리면
회화는 완성됩니다.

처음 여기에 접한 사람들 중에 이건 말도 안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지시문에 따라 직접 작품을 제작하거나 상상 속에서 만이라도 제작해 본다면, 외면상의 작가나 작품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제작 과정에 빠져들수록 그것을 지시한 작가의 정신과 개념을 뚜렷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의미의 복원, 전환 - ‘바람의 반 Half-A-Wind

오노 요코는 신체와 작품 사이의 비인습적인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작품감상의 경험을 바꾸고자 했다. 일명 [위치잡기 회화] 시리즈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천장 회화]이다. 커다란 종이에 눈으로 보기 힘든 크기의 글자를 써서 액자에 넣는다. 관객은 바닥에 서서 그것을 전혀 읽을 수 없다. 그런데 옆에 사다리가 놓여 있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서도 보이지 않는다. 액자 옆에 돋보기가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다. 돋보기를 들어 글자에 대니, YES 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다리를 놓은 것은 관객이 위로 올라가서 액자에 달린 돋보기로 그녀가 쓴 글을 읽음으로써 작품을 완성해 달라는, 오노 요코의 ‘초대’를 의미한다. 요코의 초대를 받아들인 관객이 사다리를 올랐을 때 받는 보상은 그의 행위에 대한 긍정, YES 다. (불행히도 이번 전시에서는 갤러리 측에서 작품손상을 우려했는지 관객들에게 그러한 참여가 보장되지 않았다.)

‘저녁 햇빛이 통과하는 회화’는 요코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무의미하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개념만이 살아나는 작품이다. 밖이 내다보이는 투명한 유리창 위에 똑같이 투명한 사각형의 플랙시글래스를 한 장 걸어놓으면 이 작품은 완성된다. 그래서 요코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것은 “마치 컵을 하나 보이면서 ‘이것은 컵이다’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무의미함은 거의 신경을 거슬릴 정도였고 그래서 신비로웠다.”

요코가 했던 작업들 중의 하나는 전통적인 관념을 현대에 맞게 전환시키거나 의미를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잊어버려’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따온 작품이다. 요코는 거기서 더 나아가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나치게 비대해진 자가 천국과 같은 행복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투명한 기둥에 놓인, 위로 향해진 뾰족한 바늘 끝이 넘치도록 비대해진 정신상태를 터트리고 잊어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사과’ - APPLE, 1966

 

‘잊어버려’ 옆에는 연둣빛 사과 하나가 투명한 기둥 위에 놓여있다. 사과는 기독교에서 최초의 여성인 이브와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여 타락한 사건을 상징하는 사물이지만, 요코는 사과는 악이라기 보다는 지혜의 과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작품 ‘사과’는, 현대인들에게 이브의 유혹은 지식에 대한 유혹이라는 것과 우리가 지식과 정보를, 마약을 기다리는 환자처럼, 얼마나 맹목적으로 갈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포장된 의자‘ (런던에서의 포장하기) - WRAPPING PIECE FOR LONDON, 1966

 

‘포장된 의자’는,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당시 의자에 놓인 붕대를 보고 관객들이 의자에 붕대를 감았던 것을, 전시가 끝난 후에 오노 요코가 그 위에 하얀 페인트칠을 해서 지금까지 보존한 작품이다. 의자를 감고 있는 붕대가 세월의 흔적 속에서 해어져 하얀 뼈대를 드러낸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더 이상 감추지 못한 상처가 드러나는 듯하다.

미소상자‘ - A BOX OF SMILE, 1967

 

조그마한 정육면체의 금속 상자가 조명 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보면 빛 속에 둘러싸인 관객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빛 때문에 행복해 보여서인지, 작품의 제목을 떠올려서인지, 저절로 미소짓는 표정이 되었다. 작품 ‘미소상자’는 호기심이 인류의 불행의 시작이라는 판도라 상자의 설화 대신, 호기심에 이끌려 열어본 상자 속에서 조그마한 행복을 보았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복원해냈다.

전시공간 구석에 원래는 온전하게 조그마한 방이었을 공간이 짝뚝 잘려있다. 방안에 있는 의자, 책상, 주전자 등의 모든 집기들 역시 절반으로 잘려져 있다. 온전하게 놓여있었다면 전혀 주의를 끌지 못했을, 평범한 공간과 사물들이 절반만 남게 되자, 보이지 않는 나머지 절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품 ‘방의 반’은 전체를 그대로 보여줬을 때보다 오히려 전체에 대한 통찰을 성공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이전엔 작품이 걸릴 수 있는 공간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직각으로 꺽인 모서리 공간에 금빛 액자 틀을 벽의 모양에 따라 직각으로 꺽어 걸어놓았다. ‘모퉁이 회화’는 “동양에서는 놓인 위치가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라는 요코의 생각이 드러난 작품이다.

4. 긍정과 신뢰

‘신뢰를 갖고 하시오’ - PLAY IT BY TRUST, 1997

그 밖의 이벤트와 퍼포먼스 자료들을 둘러본 후 전시회장을 나오다가, 관객들이 재밌어 하며 몰려있는 곳이 보였다. 하나는 순백색으로 칠해진 체스세트가 놓인 탁자 주변이었는데, 온통 하얀색으로만 칠해져 있어서 게임을 하다보면 자기 말의 위치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적대적인 관계로는 게임이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작품제목 ‘신뢰를 갖고 하시오’ 대로 의논을 하고 다른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서 게임을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소망나무’라고 이름 붙인 나무에 각자의 소망을 적은 쪽지를 매다는,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작품이다. 요코가 바랬듯이, 나무가 소망으로 가득 뒤덮이고 있었다. 오노 요코는 자신이 먼저 신뢰를 갖고 관객들에게 작품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관객들은 그 기회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요코의 작품집 ‘그레이프프루트’에 실린 글들 중 하나가 떠오른다.

‘물이야기’

당신은 물이다
나는 물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그릇에 들어있는 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만나기 쉬운 이유이다
언젠가 우리는 함께 증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이 다 사라지고 난 후에도
우리는 아마도 그 그릇들을 가리키며
“저게 나야, 저기 저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릇을 지키는 이들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이미 지나치게 많이 주어져 있다. 현대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정보의 과잉으로 인해 자기를 잃고 휘둘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일 것이다. 오노 요코는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길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군의 한 사람이었고, 출발지점의 ‘개념’을 변화하고 성장하여 소멸하는 ‘과정’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개념과 이미지를 연관시키고, 이미지는 변화하여 사라지도록, 적극적으로 의도하는 작업방식을 선택했는데, 2000년대의 작가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개념과 이미지, 작품과 관객의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참고/인용 도서 : ‘YES YOKO ONO, 로댕 갤러리
‘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 요코’, 클라우스 희브너 지음, 장혜경 옮김, 솔
* 본문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오노요코 전시도록 ‘YES YOKO ONO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