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2일 일요일, <락 상사(Sgt. Rock)>, 의 작가로 알려진 미국의 전설적인 노장 만화가 ‘조 쿠버트(Joe Kubert)’의 별세소식이 전해졌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그였기에 미국 내 관계자와 팬들은 물론 전세계 만화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게 했다. ‘스탠 리’와 함께 ‘DC코믹스’의 거장으로 불리던 조 쿠버트, 그리고 국내에도 익히 알려져 있는 그 명성과 작품세계를 이번 글에 담아보고자 한다.
국내에서 조 쿠버트를 언급한다면 많이 생소한 예술가 일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DC코믹스의 전설적인 메이저 작가 중 하나지만, 실사적 핸드드로잉에 밀리터리 장르를 주로 고수하던 그는 국내에선 굉장히 마이너적인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조 쿠버트는 1926년 당시 폴란드 동남쪽(현재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났다. 이후 그가 첫돌이 되기 전, 그의 가족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쿠버트 그림인생의 시작은 굉장히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민자들의 팍팍한 삶 속에서도 그의 부모는 아들 조 쿠버트의 그림활동을 적극 지지해 주었다고 한다.
△ <좌 : 조 쿠버트 작 SGT. ROCK, 우 : 조 쿠버트 생전 모습>
특히 그는 어릴 적부터 코믹스 창작에 큰 재능을 보였다. 이것과 관련한 일화 중 쿠버트가 참여한 그래픽 노블 ‘Yossel’에 그가 쓴 글은 인용하자면,
“내가 11살인가 12살 때 처음 코믹스에서 카툰 작가로 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금액은 페이지당 5달러였는데, 1938년 당시 그 돈은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었습니다.” 라고 했다. 코믹스에 관한 그의 열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년기부터 프로 만화작가 활동을 했던 그는 고등학교도 맨하튼의 음악&예술 고등학교로 진학하는데, 코믹스 제작에 관해서는 학교를 결석 할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당시 주변친구들이 증언할 정도였다.
쿠버트의 초기 작품은 연필과 잉크로 그려진 흑백의 이야기 만화 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6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등장한 캐릭터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캣 맨(CAT MAN)> ‘볼톤’의 시작이자 모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 <좌 : ‘캣 맨’ 코믹스 vol. 1, 1942, 우 : ‘The Spirit’ #6, 1975>
하지만 쿠버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작품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노력 없이 이루어진 천재도 아니었다. 이후 몇몇 짧은 작품을 그리며 드로잉적 기술은 물론 컬러링 테크닉을 연마했다. 그의 노력은 이후 출판인쇄기술이 산업적으로 발달한 시기에 빛을 발했는데, 코믹스 계의 전설적인 작품 Will Eisner의 재 출판 작업에 채색으로 참여한 것이 그 노력의 산물 중 하나일 것이다.
이후 유년기와 청소년기 초반에 성공적으로 코믹스업계에 데뷔한 쿠버트는 본격적으로 미국 만화계를 주름잡는 작가로서 활동하게 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DC코믹스의 작가 조 쿠버트’ 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 전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미국의 만화제작 과정과 환경은 우리나 일본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 이라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만약 국내에서 한가지 작품에 두 명 이상의 작가이름이 올라간다면 보통 ‘그림작가 A, 글작가 B’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연재가 중단되는 경우가 있을망정 보통은 처음 정해진 작가가 그 작품을 마무리할 때까지 바뀌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미국은 철저히 상업만화체계의 시스템을 가진 곳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한가지 코믹스 연재에 대한 기획이 잡혀 제작이 시작되면, 그림이든 글이든 파트 별 단일작가 체계가 아닌 다인 작가로 굴러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여 장기방영 애니메이션에 여러 제작감독을 두는 것처럼, 코믹스도 격주로 번갈아 가면서 연재를 이어나가든, 혹은 1편부터 10편은 작가 ‘A’ 혹은 ‘알파’이라는 그룹, 11편부터 20편까지는 작가’B’ 혹은 베타’라는 그룹이 작업을 한다던가 하는 등 시장상황과 독자들의 반응, 그리고 선호작가 현황에 따라 제작방식은 굉장히 유동적으로 바뀌는 편이다. 이런 시스템은 쿠버트가 활동하던 시대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현재 미국의 엔터테인먼트관련 생산 분업체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여하간 쿠버트가 본격적인 코믹스제작활동에 들어간 1940년대부터는 작품의 창작이 기업체계로 이루어 졌고, 그가 DC코믹스와 인연을 맺게 된 시기도 이 즈음이다. 쿠버트가 처음 DC코믹스에 발을 들여놓은 작품 는 50페이지의 연필과 잉크로 그려진 것으로, ‘리딩코믹스(Leading Comics) #8, 1943’의 슈퍼히어로 스토리 팀에서 선보인 것이다. 그 밖에도 1940년대에 다양한 코믹스잡지에서 작품활동을 지속했는데, 그 와중에 DC코믹스의 ‘플래시 코믹스(Flash Comics) #62’에서 출간된 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핵 맨(Hawk man)’ 이란 캐릭터의 등장과 이야기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 <좌 : Flash Comics #1, 1940년 / 우 : 쿠버트의 핵맨이 수록된 Flash Comics #71 출간 본, 1946>
* Flash Comics는 DC코믹스에서 출간된 잡지로 1940년부터 1949년 동안 총 104권이 출시되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쿠버트는 각종 유명잡지나 신문 등에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런 명성에 발맞추어 그의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만화출판업계의 편집장 St. John과 글작가 Norman Maurer 등은 쿠버트와 상당기간 같이 작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St. John은 최초의 3D 코믹북 제작과 국내에도 방영되었던 만화 <마이티 마우스> 출판에 참여했다.) 그들은 2D, 3D 코믹 북 형식을 넘나들며 만화잡지 ‘comic 1,000,000 Years Ago, 1953’을 창간, 쿠버트는 여기에서 라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쿠버트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참여한 만화잡지는 물론 각종 신문매체에도 를 실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1950년대 작품들은 과거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좌 : ‘1,000,000 Years Ago! #1.’ 1953. 쿠버트의 TOR가 표지 / 우 : TOR 내 장면 컷>
물론 잠시 흥행침체기를 맞았던 쿠버트의 50년대 활동은 마냥 낭비된 세월은 아니었다. 50년대 중반 이후, 그는 ‘Our Army at War #32, 1955’을 시작으로 다시 DC코믹스와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프리랜서 작가활동을 하면서 DC뿐 아니라 동시에 마블코믹스 외 ‘Lev Gleason Publications’ 같은 다양한 코믹 북 출판사와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핵 맨>같은 히어로 물 작업에 참여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은 전쟁장르를 타깃인 ‘G.I. Combat(DC) 시리즈’와 ‘Our Army at War #83’의 이라는 제목으로 <락 상사(Sgt. Rock)>의 이야기가 시작된 점이다.
△ <좌 : GI Combat, 1952 #63 조 쿠버트 커버작업 / 우 : Our Army at War #83, 1959>
<락 상사(Sgt. Rock)>는 이후 약 30여 년간 동료 작가인 Russ Heath와 번갈아 가면서 발행되었고, ‘Our Army at War’의 커버스토리로 자리매김하면서 조 쿠버트는 작품연재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인기절정을 달리던 작품으로, 주인공 락 상사와 중대원들이 적과 싸우는 무용담을 단편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을 무대로 독일 나치군 과의 전투를 그리지만, 1973년 작 #256~#260은 일본군과의 태평양전쟁 전투를 다루기도 했다. 물론 <락 상사>가 쿠버트와 Russ Heath 둘만으로 연재된 작품은 아니었고, 몇 명의 아티스트가 다같이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락 상사>는 조 쿠버트의 대표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만큼, “쿠버트보다 <락 상사>를 잘 표현하는 작가는 드물 것”이라 평가 받고 있다.
이후 DC코믹스 ‘Our Army at War’는 1977년 #301을 마지막으로 폐간되었고, 이후 라는 단독제목으로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표지나 특별판 일부 원고를 제외하고는 쿠버트가 직접 작업에 참여한 편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약 10년 후, 은 1988년 #422을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근 20년간 인기절정을 달리던 은 1980년대 들어서는 그 인기가 점차 시들해 졌다고 한다. 항간에는 이것이 전 세계적인 정세와 시대흐름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그 예로 전쟁만화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세계 제 2차 대전(1945년 종료), 베트남 전쟁(1960∼1975), 그리고 냉전시대의 상징인 구 소련의 붕괴 시작(1985) 등은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흥미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고 입을 모았다.
존 쿠버트의 아티스트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성기에 들어설 무렵의 1960년대에는 그의 개인적인 작품활동 이외에도 후학양성을 위한 활동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 쿠버트는 가족들을 데리고 뉴저지로 이사, 부인과 함께 1976년 쿠버트스쿨(The Kubert School, 혹은 Joe Kubert School of Cartoon and Graphic Art)을 설립했다. 쿠버트스쿨은 지역 고등학교를 인수해 만든 정식 인가 예술학교로, 카툰과 일러스트를 정식 대학교육과정으로 졸업할 수 있는 기관이다. 설립 이후, 조 쿠버트와 마찬가지로 카툰 아티스트의 길을 걸은 그의 아들 ‘아담 쿠버트’와 ‘앤디 쿠버트’가 쿠버트 스쿨의 선생님으로 있으며, 그들과 관련된 제작 스튜디오도 현재 학교 내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1990년대 들어서 쿠버트의 행보를 들 수 있다. 정기적인 출간활동이나 작품에 대한 독자의 인지도가 예전만 못하고, 1990년대면 그의 나이가 70을 바라보고 있을 때니 누구나 현직으로 활동하기 보단 명예작가로써 은퇴를 준비할 시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쿠버트가 70대는 물론 80대 까지도 현역 활동을 하리라 예측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91년 쿠버트가 직접 쓰고 그린 그래픽노블 프레티늄 에디션 발간을 시작으로, 1995년 에픽코믹스(Epic Comics)에서는 새로운 2종의 스토리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1996년 에픽코믹스에서 라는 207페이지 하드커버 규모의 그래픽노블을 출간하는데, 2년 후에는 224페이지의 그래픽노블을 또 한번 출간해 노장작가로써 저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하비상 최우수 그래픽앨범 원작부문(1997)’, ‘아이스너 어워드 최우수 그래픽앨범부문(1997)’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후 2000년대 넘어서는 주로 연필을 이용한 일러스트 드로잉화보집을 출간했고, 2003년과 2006년에는 캐릭터 일러스트 집이나 단편이야기가 수록된 특별 집을 선보여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 밖에도 쿠버트는 DC코믹스와 함께 80대 노장투혼을 발휘하게 된다. 이후 그가 별세하기 전에는 주로 그의 아들과 함께 작업을 이어나갔다. 안타까운 점은 올해 2012년에도 아들 앤디 쿠버트와 함께 연필과 잉크 작업을 같이한 가 6월에 출간 되었는데, 2개월 후에 혈액 암으로 별세해 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 <좌 : 쿠버트 부자가 함께 참여한 Before Watchmen: Nite Owl, 2012, 조 쿠버트의 마지막 유작 / 우 : 2006년 작업실에서의 조 쿠버트 생전 모습>
되짚어 보면 국내에는 조 쿠버트의 전성기작품이나 그의 활동상이 크게 알려지진 않은 듯 하다. 항간에는 실사 그림체와 강한 화풍을 지향하는 국내 그림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필수지침 일러스트서 중 하나 정도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만화시장의 규모나 다양하지 못한 장르선호, 그리고 문화적인 차이 때문인지 쿠버트나 쿠버트의 작품은 그다지 국내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2000년대 들어서 활동했던 DC코믹스 특별집 일부가 수입 되어 판매되고 있다는 것과, 그가 죽기 전 활동했던 드로잉 시연 동영상 몇 가지가 국내웹사이트에 돌아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80세 중반에도 현역활동을 했던 그의 저력은 선호장르와 코드를 떠나 경의로움을 자아내는 부분일 것이다. 또한 그런 그의 저력과 열정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어, 그를 기리는 존경과 안타까움의 추모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