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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 장르에 대한 메모

인기 장르인 '로맨스판타지'는 로맨스와 판타지가 결합한 장르입니다. 로맨스판타지의 서사를 살펴봅니다.

2023-03-17 오혁진


로맨스판타지 장르에 대한 메모

<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람글&카쿤 (출처_네이버웹툰)

 

로맨스판타지는 로맨스와 판타지가 결합한 장르이다. 그렇다면 로맨스와 판타지 중 무엇이 로맨스판타지의 본질적 속성일까

우선은 로맨스판타지의 본질은 로맨스라고 가정해 보자. 로맨스판타지는 판타지에서 기원하지만 점진적으로 로맨스의 비중을 높여 자신의 장르를 확립시켰다하지만 로맨스가 정말로 로맨스판타지의 본질적 속성인걸까. 최근 로맨스판타지의 경향을 살펴보면 도리어 로맨스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을 막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두 번 다시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목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랑에 몰두하지 않는 로맨스판타지 주인공들은 이후 어떤 행보를 취할까. 그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거나 쌓아 올리는 서사, 즉 여성 본인이 가진 욕망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성향을 보이며 더 이상 남성 주인공과의 사랑이 최종적인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사랑을 버릴 수 있거나 혹은 사랑이라는 요소를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때 부가적으로 획득한 트로피로 여기는 취급을 한다. 

그러니 이러한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변화는 여성서사의 관점에서 확실히 주의할 만하다. 로맨스의 관계성과 판타지의 상상력. , 로맨틱판타지는 로맨스와 판타지의 역동적인 관계 내에서 로맨틱판타지 고유의 여성서사를 창출하고 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앤트스튜디오&산소비 (출처_카카오웹툰)


여성서사로서의 로맨스판타지. 하지만 이는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여성 주인공, 여성작가, 여성독자가 연계된 로맨스판타지에서 여성서사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이번에는 다른 맥락에서 로맨스판타지의 지배적 서사구조,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에 관하여 논의해 보자

로맨스판타지에서 회빙환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현실세계에서 사망한 여자 주인공이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거나(<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또는 책과 같은 창작물 속 세계의 인물로 빙의한다(<양판소 주인공의 아내로 살아남기>,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회빙환 논의가 흥미로운 것은 이 서사가 최근 청년 세대 담론으로 빈번하게 호출된다는 점이다. 가령 한겨레신문의 한 칼럼에서는 회빙환의 세계관이 한국 사회의 거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층 상승의 마지막 열차라며 암호 화폐에 영끌2021년 한국 사회 청년들의 갈망을 웹소설은 예민하게 포착한다. ‘노오오오력해도 이번 생은 망했다20~30대의 절망은 게임처럼 인생도 리셋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웹소설에 투영된다.”라고 주장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주장을 청년 세대의 문제로 한정한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우나, 회빙환의 형식이 역사적 구축물이며 사회적, 문화적 갈등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그러니까 현재 회빙환의 형식으로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고 있고 또한 많은 이들이 이 작품들을 주목하고 있다면, 회빙환 형식이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라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회빙환 형식의 본질이라 할 정보에 주목해 보자

로맨틱판타지의 주인공은 회귀, 빙의, 환생 어떤 이유가 되었든 다른 인물이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경험했기 주변의 다른 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로맨틱판타지의 주인공들은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여 자신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해 나간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정보를 활용한 이 일련의 행위들은 복합적인 변수로 연결된 세계에서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하다 말해야 할 텐데, 로맨스판타지에서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이처럼 정보와 이후의 결과가 등가적으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 정보가 교환가치 있는 화폐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달리 말해 인간 상호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 상호간의 사물적 관계로 전도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립 가능한 것이다

회빙환의 형식은 일종의 사탄의 맷돌, 로맨스판타지의 주인공은 그래서 여성서사의 주체와는 또 다른 모습, 끊임없이 증식하고 지배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자본으로 거듭나게 된다.


<어느날 공부가 되어버렸다>, spoon&순정 (출처_네이버웹툰)

 

마지막으로 로맨스판타지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로맨스판타지의 작화다

로맨스판타지는 80~90년대 순정만화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작화를 계승하고 있다. 다만 흑백 출판만화가 아닌 칼라 웹툰이라는 점에서, 로맨스판타지 작화의 고유한 특성을 새로이 검토할 필요는 있다

그러면 순정만화의 작화와 로맨스판타지의 작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로맨스판타지는 포토샵과 같은 그래픽 프로그램을 통해 컬러를 사용한다. 물론 이는 쉬운 대답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순정만화의 주요한 기호인 눈동자 속의 별이 로맨스판타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펴보자. 로맨스판타지는 순정만화의 눈동자 속의 별을 수용하지만 동시에 이를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하고 있다. 웹툰인 로맨스판타지는 색채와 광원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주인공의 눈을 투명하게 색색이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보석과 같은 눈이란 별과 같은 눈처럼 결코 비유가 아니다. 가령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에서 주인공은 의미심장하게 보석을 떨어트리고서는 아버지의 눈을 보고 이렇게 되뇐다. “나와 같은 보석안......” 그리고 <세이렌: 악당과 계약가족이 되었다>의 주인공 역시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발렌타인 가문과 어울릴만한 기괴한 붉은 보석의 눈을 가졌다.

보석같이 빛나는 주인공의 눈. 여기서 나는 비약적이지만 로맨스판타지에서 서양회화인 유화를 떠올리게 된다. 유화의 매끄러운 표면과 웹툰의 디지털기기의 매끄러운 표면은 닮아 있다. 하지만 로맨스판타지에서 유화를 떠올린 것은 단순한 매끄러운 표면을 공유해서만은 아니다.

 

<재혼황후>, 히어리&숨풀&알파타르트 (출처_네이버웹툰)

 

유화에 관한 존버거의 설명을 참조해 보자. “유화를 다른 회화형식과 구분해 주는 것은 묘사되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어서 실제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인 것처럼, 그 질감, 광채, 입체감 등을 표현해 내는 능력이다.” 그렇다. 로맨틱판타지 역시 가시적 세계의 세부를 과잉될 정도로 정교히 묘사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상층계급을 상징하는 의복, 가구 같은 대상의 표면을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재혼 황후>의 차 마시는 장면을 보자. 찻잔과 차의 받침대는 클림트적인 패턴을 과시하며 무엇보다 주인공 황후의 빨간 드레스의 표면은 생생한 촉감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쯤해서 로맨스판타지적 유화의 함의를 확장시켜 보자. 로맨스판타지가 풍부한 표면을 찬양하는 것은 우선 그 세계가 다름 아닌 로코코, 바로크, 빅토리아 양식이 혼성적으로 합쳐진 제국이여서다. 그렇게 본다면 제국은 로맨틱판타지의 다층적 의미를 통합할 더할 나위 없는 의미체가 아닐까. 로맨스판타지의 제국은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이미지를 공급하는 시각적 원천이자, 주인공이 축적한 정보를 비로소 무한대로 증식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적 공간이며, 동시에 여성 독자의 욕망을 투영하고 실현시키는 여성주의적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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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혁진

만화평론가
「만화 형식의 역사 - 윌리엄 호가스에서 장 자크 상페까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