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부천국제만화축제 기간 중에 열린 부천 국제포럼은 부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와 MOU를 맺은 캐나다 퀘백시의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폴 보르들로 Paul Bordeleau작가와 퀘백 만화 디렉터인 토마 루이 코테 Thomas Louis Côté 가 참석한 가운데 ”당신이 몰랐던 만화책 이야기 – 그래픽노블이 삶에 다가오기까지“라는 주제로 열렸다. 패널 들 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나는 ”다양한 삶의 형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목소리들“을 담기 위한 하나의 책 그릇으로서 그래픽노블의 역할과 우리나비 그래픽노블 라인업의 방향, 북마켓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각 패널들의 연설이 끝난 후, 청중들의 질의를 받아 응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러 질문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이 있었다. 현재 문학에 관심이 있고, 작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어느 20대 여대생은 책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물었다.
”저 자신도 그렇고 주위 친구들을 보더라도 똑같은 책을 여러 권 구입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어떤 때는 책을 마치 굿즈처럼 구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만화책의 경우, 웹툰으로 읽고 나서 단행본을 소장의 개념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죠.
특히, 한국에서 책을 구입한다는 것은 굿즈를 구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선생님들은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학생의 질문에 우선적으로 답을 한 패널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 스쿨의 전혜정 교수였다.
”책은 TV가 나왔다고 해서 라디오가 없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책의 역할이 어느 정도 굿즈의 역할로 옮아온 것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굿즈로서의 책’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어보긴 했어도 포럼에서 직접적인 질문을 통해 듣고나니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당혹감이 몰려왔다. 책을 굿즈처럼 구입하는 경우는 분명하게 있긴 한 것 같다. 예컨대, 아이돌의 책이 나왔다거나, 유명 연예인의 책이 나온 경우, 그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은 콘텐츠에 관계없이 굿즈를 구입하듯 책을 구입하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기 때문이다. 팬심이 이끈 행위이다. 연예인들의 책이 책의 꼴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포토 카드의 확장된 버전 혹은 화보의 개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웹툰을 재미있게 보고 나서 단행본을 접했을 때의 마음이 설령 팬심에 기댄 것이라 하더라도 책을 구입하여 소장만 하진 않는다. 소장을 위해 샀더라도 웹툰의 읽기 방식과는 차이가 있는 출판만화의 형식으로 다듬어진 그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단행본을 굿즈라고 치부하기에는 책에는 너무나 많은 콘텐츠가 담겨있다. 또한, 우리의 소비를 용도의 개념으로 접근해 볼 때, 굿즈와 책 모두 같은 소비의 행위이긴 하나 책은 굿즈에 비해 그 용도가 확실하다. 장식품, 소장용으로 금방 보고 즐기고 마는 굿즈에 비해 책은 읽는 행위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를 구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이 굿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굿즈나 책 모두 물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책은 다양하고 좋은 콘텐츠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오히려 책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표지의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하며 특히, 한국 출판사들의 표지의 다양성과 높은 퀄리티는 해외 유수 출판사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표지 이미지만으로 책이 굿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종이 선정에서부터 인쇄방식 더 나아가 제본과 후 가공에 이르는 공정은 책 고유의 콘텐츠에 맞게 변주되어 책은 마침내 화려한 옷을 입는다. 특히,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제본과 후가공에 팝업, 플랩, 투각, 박, 형압, 에폭시, 라미네이트등의 독특하고 다양한 기법들이 사용될 수 있다.
[ 그림 2, (윤에디션) 빛을 비추면 Light 김윤정 최덕규 그림책 롯데출판문화대상 ]
특히, 그림책은, 소설이나 시, 에세이와는 달리 굿즈의 요소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일단 그림책은 단순히 글만 들어가거나 혹은 글은 주가 되고 그림은 부가 되는 에세이와는 달리 그림의 비율이 굉장히 크게 차지한다. 그리고 컴팩트한 책 볼륨은 그림책을 기타 다른 종류의 책들과 뚜렷하게 구분지음과 동시에 그림의 스타일과 표현 방식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편집과 제본, 후가공의 요소를 넣기에 용이하다. 굿즈의 개념이 강한 그림책을 예로 들자면 제4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수상작인 김윤정 글 최덕규 그림의 『빛을 비추면 Light』와 김윤정 작가의 그림책 『엄마의 선물』이 있다. 『빛을 비추면 Light』은 흰색 바탕에 형압으로 누른 타이틀에도 눈길이 가지만 핸드폰이나 손전등을 이용해 어두운 곳에서 책의 뒷면에 불빛을 비추면 감추어져 있었던 아름다운 그림이 나타나는 신기하고도 새로운 그림책이다. 또한 『엄마의 선물』 은 첫 책장을 넘기자마자 투명한 OHP 필름에 사실적으로 인쇄된 어린아이의 손이 나타나는데 첫 장에서 남을 비난하면서 밖으로 뻗은 손은, 다음 장을 넘기면 손의 주인인 아이를 향해 방향이 바뀜을 알 수 있다. 또 엄마 가슴 위에 평화롭게 놓여 있던 두 손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비를 맞는 아이의 머리 위에서 우산이 되어준다. 그림과 텍스트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종이뿐만 아니라 OHP 필름이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 책을 보는 방식으로써 책은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마중물로 작용한다. 이처럼 두 작품의 그림책은 책의 물성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제작함으로써 메시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처럼 특별한 방식의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책을 대여의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구입하게 만든다. 책에 굿즈의 효과적인 기능을 넣은 똑똑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림 2, 필자가 소장한 '황금동 사람들' ]
우리나비에서 최근 온라인 서점을 통해 북펀딩을 완료한 박건웅 작가의 신작 그래픽노블 『황금동 사람들』 또한 제작에 있어 책의 물성과 디자인을 고려하여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게끔 만든 작품이다. 한국 전쟁 때,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몰려 무고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방식으로써, 선조들부터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각 가정에서 사용했던 한국 고유의 자개장을 형상화하여 표지에 유광 은박을 입혔다. 700쪽이 넘는 책을 하드커버로 감싸고 책을 열 때 자개장을 여는 기분이 들도록 제작하였는데 이는 책의 내용과 이어져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게끔 만든다.
한편, 소설의 굿즈화는 그래픽노블을 포함한 그림책과는 달리 책의 외관보다는 오히려 책의 내용으로부터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몇 달 전, 국내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젊은 여성 작가의 데뷔 소설이 해외에서 놀랄만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책 판매는 기껏해야 5천부 미만인 판매지수를 가지고 있는 책이었지만 유수의 유럽 출판사로부터 어마어마한 선인세의 오퍼를 경쟁적으로 받았다. 약 2주 동안 우리 돈 2억 가까운 선인세를 각 권역별로 벌어들인 것이다.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이런 기이한 현상에 이 책을 경쟁적으로 출간하고자 하는 각 언어권별 출판사들에게 이 책의 판권을 사고자 하는 이유를 물었는데 그들의 답변에서 책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독자들의 심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데뷔 소설의 배경은 ‘도자기 공방’인데 그들은 독자들이 책장을 넘기는 행위, 책을 읽는 장소의 분위기, 그리고 도자기를 빚으면서 느끼는 주인공의 치유의 힘을 독서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입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내용을 가진 북 콘텐츠는 그 동안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이 책을 경쟁적으로 사들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 출판계에서 소위 전 세계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간 이런 힐링과 치유의 주제를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풀어내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자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등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들은 모두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다.
이런 류의 소설을 우리는 흔히 필 굿 소설 feel good novel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순수문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문장의 구조미와 문학적인 텍스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문학 작품이라기보다는 내용 위주로 글을 빠르게 파악한 뒤 힐링할 수 있는 소설이다. 전통적으로 소설의 주요 독자들은 20~40 대 여성 독자들이며 굿즈를 주로 구입하는 소비층 또한 여성 고객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소설 또한 힐링을 위한 오브제, 굿즈의 또 다른 형태로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책의 여러 장르들을 비교하며 독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단행본과 굿즈 관련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독자들이 책을 굿즈로 생각하며 구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긍정과 다양성의 측면에서 유의미한 점이 많다.
물론, 책에 있어서 가장 불변이자 중요한 개념은 ‘콘텐츠’이다. 스토리 자체로 혹은 스토리와 그림이 유기적으로 서사를 잘 뒷받침하는 책은 독자들에게 스테디셀러로 남는다. 굿즈의 개념으로 책을 접근하고 구입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책을 소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다양성의 차원에서 다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여러 가지 종류와 책 그릇이 콘텐츠를 담아내는 방식들이 다양한 만큼 ”책은 ~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은 이제는 구시대적인 발상이 되었다. 책이 굿즈의 기능을 대신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닌 중요한 책의 핵심은 책 외에도 우리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영상매체가 범람하는 오늘날, 우리 스스로 종이 책을 펼치는 순간 그 속에 봉인된 이야기와 그림이 우리에게 말 걸기를 시작하고 우리의 지적인 지평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독서는 그 동안 디지털 관습과 일상에 지친 우리의 감각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점이다. 온라인 서점은 클릭 하나로 편하게 책을 집까지 배달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우리는 단지 시각에 의해 책을 선택한다. 하지만 스스로 직접 동네 책방에 들러 책을 고르거나 북 마켓에서 작가 사인회를 경험하며 책을 구입할 때면 우리의 온 감각이 되살아난다. 현장에서 책의 냄새를 맡고, 책장을 넘기며 그 공간에서 읽을 책을 구입하는 행위야 말로, 인문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무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로 향하는 길목, 책 한권을 옆에 끼고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기대하지 않았던 흥미로운 세계가 여러분을 환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