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혼인하기로 하고 둘의 첫 보금자리를 정하기 위해 전세를 얻으러 다닐 때 집 구조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던 아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살림살이는 둘째 치고, 과연 둘의 만화책들을 어디에 수납할 것인가?
그렇다. 우리 둘은 그 즈음에 이미 연식이 꽤 된 오덕들이었고, 둘이 각자 싸안고 있던 만화책들 중 상당수는 놓을 자리가 없어 상자 속에 박힌 채 쌓여있던 상황이었다. 집의 상당한 면적이 책에 점령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지만 무턱대고 넓은 집을 얻을 여력도 없었던 상황. 그렇게 우리의 신혼집은 방 두 칸에 거실 없이 화장실과 부엌이 빠듯하게 박혀 있는 엘리베이터 없는 맨션으로 정해졌고, 무엇보다도 안락해야 할 신혼부부의 안방은 책장과 책상자를 방음벽마냥 두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도 작업방으로 빼놓은 공간의 책장에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하는 책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림 1, 2002년의 책장 중 일부. 이미 자리가 모자라 2중으로 꽂고 있었지만, 만화는 작품 당 시리즈가 긴 경우가 많아 보기 좋게 꽂는 건 애저녁에 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징글징글한 나의 책들
그런데 이는 사실 너무나 뻔한 결말(?)이었다. 왜냐면 원래 그러고 살았던 게 집 좀 넓혔다고 바뀔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하기 전의 내 방은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녹화 비디오테이프로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 자체가 없었고, 나는 이부자리를 반으로 접어 어깨를 접어 자다가 하반신 높이까지 쌓여 있던 책이 무너져 파묻히기를 수 차례였던 것이다. 당시 나는 만화 단행본과 더불어 주/격주/월/격월로 나오는 국내 만화잡지와 애니메이션 정보지들을 대부분 구매해 읽던 편이었는데, 잡지가 쌓이는 속도를 공간이 전혀 따라잡질 못해 급기야는 당시 부천만화정보센터(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이라는 명목으로 한 트럭 분량을 보내야 했다.
정보 집적형 오덕인 내게 만화 잡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자체로 재산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당시의 내게는 잘 공간을 확보할 것이냐 자다가 계속 책에 깔릴 것이냐를 당장 선택하게 만드는 녀석들이었다. 읽어야 현재를 따라갈 수 있으니 사긴 사는데 조금만 지나면 감당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잡지가 유난히 불어나는 속도가 빨라서 그렇지 단행본도 매주 한두 박스 정도 사다 보면 감당 안 되긴 매일 반이었다. 그렇게 본가의 내 방은 책더미들로 숨 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잡지가 빠진 공간은 또 다른 잡지와 만화 단행본들이 즉각 메워나갔다. 도서 대여점을 이용하지 않고, 불법 스캔본도 찾지 않으려면 다 사서 보는 게 당연했지만 이 때의 풍경은 마치 책이 책을 낳는 게 아닐까, 숫제 자가 증식하는 건 아닐까 싶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20대 후반 아버지와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분노에 차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당시엔 만화인들이 다수 살던 서울 홍대입구 근처의 두 평 남짓한 고시원방에서 2년가량을 머물 때, 그 말도 안 되게 좁은 공간 안에 침대와 책상과 샤워실을 뺀 남은 자리에 책이 수백 권 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어이가 참 없기도 했다. 처음으로 원룸을 얻어 고시원을 나가던 날 고시원 방 정도 옮기는 게 뭐가 어렵냐던 용달트럭 아저씨는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책을 보며 돈 더 받아야 한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첫 원룸을 거쳐 두 번째 원룸으로 이사를 하고 지금의 아내와 연인이 되어 처음 사귀게 되었을 때, 아내는 집들이 차 사람들과 처음 왔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진 방 꼴에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그 얼마 사이에 쌓인 새 만화책들이 침대도 없는 방 한 가운데에 무덤이 되어 쌓여 있었던 것이다. 헌 만화책(?)들은 상자에서 풀려나오지도 못한 채지만 새 책들은 기세 좋게 방을 차지하고 포효하고 있었다. 고시원을 나온 이래 본가에 있던 책들까지 합세하면서 내 만화책 권수는 거의 7~8천 권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래 그랬다’. 혼인을 하면서 내 책에 아내 책이 합세하니 책이 만 권에 가까워졌을 뿐이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는데, 문제는 이제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자취가 아닌 살림집이 됐다는 점이다. 결국 두 번째 이사를 하고 나서 다시 한 번 기증이란 명목으로 수천 권을 덜어낼 곳을 찾게 됐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도서관에서 책을 받아주었고, 그렇게 또 용달 트럭 한 대 분량이 집을 떠났다.
그러고도 남은 책이 수천 권. 그나마 시대가 바뀌면서 종이로 된 만화 잡지 시대가 사실상 끝장이 났고, 만화도 전자책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책 분량이 드라마틱하게 늘어나지는 않게 됐지만, 그렇다고 있는 책이 사라지진 않는다. 서울을 벗어나 지역 도시로 이사를 하며 넓힌 집에서조차 아내와 나의 방은 꼼짝없이 문짝과 가구 일부 외 모든 면을 책에 잠식당한 채다.
[ 그림 2, 그나마 출판 만화잡지의 한 시기가 저물던 시기였음에도, 2005년 무렵엔 잡지들 쌓이는 속도를 주체할 수 없었다 ]
| 만화책, 고락에 겨운 나의 애물단지들
나는 만화책 수집가가 아니다. 만화를 투자용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야말로 읽기 위해서 샀다. 좋게 이야기하면 진정성은 챙긴 것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실속이 전혀 없었다. 기왕 만화로 일한다 치면 일찌감치 문화재급 작품들이나 유명작 초판본, 《르네상스》 《보물섬》을 비롯해 창간호 같은 것이라도 어떻게든 구해 놨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바보 같게도 만화는 물론이거니와 투자가 될 법한 것에 레이더를 세운 적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니 그런 걸 생각 못한 채로 수십 년을 지나 보낸 시점에서 만화책으로 돈 벌 여지는 아예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작 산더미처럼 사놨던 잡지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 중에도 정보 집적은 물론 팔 만한 것도 몇은 있었을 터인데 나는 그걸 ‘기증’했다. 이렇게 어수룩할 데가 다 있나! 하지만 그땐 책 때문에 잘 곳이 없었고 그 사실 자체가 내겐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한데, 이 지점들이야말로 이 총체적 난국을 만드는 문제의 시작이자 끝이다. 만화책은 작정하고 중고 경매에 내다 팔 만한, 즉 재산이 될 만한 것에 집중해 수집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냥 오롯이 짐 덩이들이다. 좋아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맞춰 사 모은다 정도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도 없다. 웬만한 건 다 읽어 보자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만화는 분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대상이 된다.
도서대여점의 만화 시장 침해 논란이 한창이던 당시 많은 이들이 “그 많은 양을 돈 주고 사 보려면 너무 비싸고 놓을 자리도 없다!”라며 구매 자체를 거부했는데, 물건에 구매할 가치 자체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읽는 만큼을 다 사면 놓을 자리가 없단 말 자체에는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치 놓을 자리가 없긴 해. 그런데 너희는 굳이 그만한 양을 섭취할 생각도 없는 걸 굳이 폭식해가면서 남의 작품을 가치 없다고 깎아내리고 있잖아? 굳이 안 그래도 되지 않니? 나는 이미 직업이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말이다-라고 반쯤 우는 심정으로 책에 파묻혀 가고 있었다. 이러니 어디 방송에 나온 사람이 “우리집엔 만화책이 200권이나 있어요!”라고 으스대고 옆에서 우와와 하는 걸 보고 있자면 한숨이 푹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는 아직 책장 몇 칸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분량이잖아요. 좋아하는 작가 몇의 작품 전집 정도만 사면 그 권수는 가볍게 넘는 수준이죠? 이것저것 보겠다고 하면 만화는 답이 안 나오기 시작한답니다. 왜냐면 만화는 여차하면 시리즈 하나가 수십 권이 넘어가는 게 허다하다고요!
이를테면 차마 구매를 시작할 생각도 못한 <아빠는 요리사>만 해도 2023년 현재까지 계속 나오고 있는데 권수가 158권째고, 중간에 전개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이후로 일단 멈춰놓고 있는 <원피스>는 기어이 100권을 넘겼다. 1994년부터 잡지 연재로부터 챙겨 보고 있는 한국 무협만화의 고전 <열혈강호>는 2023년 6월 88권 째가 나왔다. 이게 한 타이틀마다 내어놓고 있는 권수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은 한국 소년만화 <웨스턴 샷건> 같은 작품은 그래도 40권에서 딱 마무리를 지어줬는데 앞서 언급한 책들이 원체 길어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이쪽도 만만찮은 분량이다. 여기에 복각판이나 애장판, 완전판 같은 타이틀이 붙은 새 판본을 또 사는 경우도 있다. 복간본이 나오다 발매 중지되면 사정을 이해할까 하다가도 피눈물이 난다.
그나마 이렇게 새로 나오는 건 욕을 하면서도 ‘새로 나왔으니 사는’ 경우지만, 많은 경우는 새로 나올 가능성 자체가 없어 지금 안 사면 아예 구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사야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중간에 구멍이 나면 복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래서 애가 태어나서 꺄륵거리며 뒹굴다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 뼈와 살(표지와 본책)을 분리해대기 시작했을 때 엄마와 아빠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저 책들 대부분은 ‘책으로는’ 다시 구할 길이 정말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일본 만화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대작이 아니면 비교적 적은 부수로 많이 찍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책들이 이빨이 빠지면 중간의 몇 권만 새로 살 방법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빨이 안 빠졌다고 이것들이 딱히 팔 수 있는 물건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팔아서 재산이 될 만한 가치를 인정받는 역사성 있는 물건들은 경매로 가지, 당×근마켓 류나 알×딘 중고서점 류에 올라가면 그야말로 헐값이다. 하지만 이건 팔 수나 있다. 동인지라면 어떨까? 소량 생산물이니 권당 단가 자체가 상당히 높은 편이고 특정 장소에서만 살 수 있었는데, 적어도 한국에선 내용 면으로나 인지도 면으로나 어디 가서 팔 방법 자체가 없는 물건이다. 이런 걸 사 보겠다고 차비를 억수로 써 가며 서울을 오르내렸으니 동인지 무더기를 볼 때마다 별 감정이 다 올라오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 한국 애니메이션 동인지 사러 갔다가 미래의 아내를 만났으니 책들은 할 몫을 다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정리하면 만화는 팔기도 마땅찮고 분량도 어마어마한데, 공간을 심각하게 차지한다. 심지어 박스나 책장 구석에 들어가 있는 책은 다시 꺼내 읽기조차 어렵다. 책이 3천 권을 넘긴 시점에 책 목록을 기재하는 일도 포기했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욕먹으면서 웃돈을 줘야 하는 것도 힘들며, 그렇다고 버리면 다시 구할 수 없어 막상 필요할 때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상황이 된다. 게다가 사이즈조차 보통 책과 달라서 다른 책과 함께 꽂기도 버겁고, 열악한 시장 상황을 극복한다고 고급화 전략을 쓴 책들은 박스 등이 딸려 오는 바람에 아예 다른 공간에 수납을 해야 한다. 넘쳐나는 책을 한 공간에 넣어 본다고 만화책 전용 삼중책장까지 설치했지만 이걸로도 역부족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그런 연유로 만화책을 보관하기 위해 보관용 콘테이너를 별도로 임대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분은 본인이 수집한 책들을 사람을 고용해 DB화를 시키고 그 결과물로 책을 내기도 했다. 나는 거기까지 가기 전에 무릎이 꺾인 채 야 이젠 정말 못해먹겠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 후회를 할 일은 아니지만 짓눌리고 싶진 않다
나는 만화책을 읽기 위해 샀다. 그 점 자체는 후회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정 분량을 넘어서면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에서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직업이 된 시점부터는 더더욱 많은 작품을 섭취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책의 양이 내 삶을 잡아먹기 시작하면서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만화책을 아무런 문제없이 ‘보관’하고 싶다면, 서재라는 공간을 둘 수 있을 만큼 널따란 집 즉 비싼 부동산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리 윤택한 처지가 못 된다.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좋으련만 신은 내게 그런 종류의 행운을 허락한 일이 없다.
만화책은 특성상 부동산을 필요로 하게 하는 덕질 품목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부피를 많이 잡아먹는 항목이다. 독자로서는 언제나 다시 펴들면 이후 분량을 독파할 만큼 재밌고 좋지만, 생활인으로서는 이만큼 골치 아픈 것도 드물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고민하는 이 시점에선 눈 딱 감고 많은 책을 버려야지 하는 심정이다. 다 읽은 것들이니 머리엔 남아 있고, 여차하면 문명의 이기인 전자책으로 다시 구매해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원고를 쓸 때 사놓고도 어디 상자에 박혀 있는지 찾을 엄두도 못 내는 책은 그냥 전자책으로 다시 구매하기도 하고, 원고를 위해 필요한데 아차 하고 사지 못했던 작품을 저해상도로라도 전자책 사이트에서 구매한 경우도 왕왕 있다. 아예 유료 웹툰 시대가 무르익은 지금은 많은 작품이 회차별 결제를 하면 되어 훨씬 편하기도 하다.
이런 대안들이 있어 그나마 이 내보내기라는 결단을 앞두고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책으로 넘겨 읽던 시대를 지나온 입장에서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내가 만화를 즐기고 싶어 했지 짓눌리고 싶어 한 건 아니니까. 지금도 만화를 일정 이상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엇비슷한 감상을 느끼며 살고 있겠지만, 혹 만화책을 많이 사 읽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만화책을 보관하는 데에 너무 매이지 말고 내보내고 또 채우는 데에 익숙해지시길 권한다.
[ 그림 3, 요즘은 나도 만화를 전자책으로 사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자책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장점 하나만으로도 다른 많은 단점을 상쇄한다. 이미지는 전자책으로 <요나단의 목소리>를 구입해 읽는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