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이 한국사회에 등장해올 무렵인 2006년은 [마음의 소리]가 처음으로 연재되던 해이자, 금융위기를 반년 남짓 앞둔 시기이기도 했다. 2007년 미국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한국경제에도 영향을 미쳤고, 경제위기를 겪으며 자라난 이 세대가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연령대를 좁혀보자면 1990년에서 2000년생 이전으로 좁혀볼 수 있을 이 세대는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웹툰을 보며 자랐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한국사회의 경제위기와 천안함 사건, 세월호 사건 등에서 위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한국사회의 지형도를 그려보기보단 웹툰이 변화해온 과정을 따라가면서 동시대인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살펴두고 싶은 건 동시대인에 관한 정의이다. 우리는 웹툰을 두고서 스낵컬처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만약 웹툰이 남는 시간에 간편하게 즐기는 콘텐츠에 불과하다면 여기에서 ‘의미’를 찾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웹툰에서 시대의식을 찾고자 한다면, 웹툰을 사회적 의식을 담은 매체로 이해하고 이를 소비하는 독자층을 동시대인으로 파악하는 일이 요구된다.
조르주 아감벤은 『장치란 무엇인가』에서 동시대인을 “시대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동시대인은 시대를 증오하지만 이에 벗어나지 못한다. 동시대인은 불만이 너무 많아서 시대에 항상 반기를 든다. 때때로 동시대인은 시대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무기력감에 빠지고는 한다. 요약하자면 동시대인은 자신이 시대에 괴리된 것을 느끼면서 시대를 따라가려 들지만, 이를 따라갈 수 없어서 괴로움을 느끼는 상태다. 동시대인에게 시대란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에만 불과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부재의식의 공간이다. 동시대인은 자신이 그 현장에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동시대인은 시대가 고꾸라지는 도중에도 자신이 거기에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만 할 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통을 느끼기에 이들은 하나의 개인으로 형상화되며 이는 곧 시대를 따라잡으려는 일, 즉 ‘참여의식’에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웹툰이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은 그러한 간극에서 동시대성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스크롤 형태로 작성되는 웹툰 포맷은 소위 ‘시간을 따라 달린다’는 점에서의 가로 포맷과 방향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시대 의식을 발현하는 주된 매체 중 하나였는데, 영화를 상영하는 필름롤은 가로로 찍힌 프린트를 세로로 롤아웃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 영사기란 것은 그 상영에서 가로를 투사했지만 투사의 방향은 전적으로 세로였던 것이다. 이를 따르자면 스크롤 형태를 따라가는 웹툰의 포맷도 그 양식에서는 영화와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웹툰에서 ‘시간을 달린다’고 말하는 일은 겉보기에 이상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그 속내에서는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점 하나, 영화가 동시대를 ‘살아간다’고 보았을 때 시간을 달린다는 점이 우리와 ‘함께’하는 동시대의식을 발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세로 판형에서 롤아웃 되는 웹툰은 우리와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걸까? 어쩌면 그렇기에 이들의 시대는 우리와는 ‘다르다’고 볼 법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세계가 마치 우리의 세계인 것 마냥, 그 스크린 안에서 현실 세계로 확장되어 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때 우리에겐 영화 속 세계만이 전부가 되어, ‘바깥’이란 걸 따로 생각해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로 인해 영화에서 동시대 의식은 영화를 보는 중에 발현될 수 없었다. 영화는 그 자신이 상영되는 중에는 관객을 자기 안에 붙잡아둔다. 영화는 관객이 자신의 시대에 소속되게 함으로써 동시대인으로 발현되는 일을 막으며, 영화에서 동시대의식은 영화를 ‘보고 난 후’라는 시간차에 따라 발현된다. 그래서 영화에서의 동시대성은 이미 흘러가버린 것을 붙잡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반면 웹툰은 실시간으로 연재됨에 따라 독자가 자신의 소속을 항상 현실에 둘 수 있게 해준다. 웹툰은 매화가 분절점이 되어주기에 아무리 몰입하더라도 독자는 간극 안에서 현실에 붙들리게 된다. 이를 따라 웹툰은 독자를 작품에 완전히 몰입시키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하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문제의식을 일으킬 수 있다. 웹툰에서 동시대 의식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웹툰이 보여주는 현실에 대해 실시간으로 비교함에 따라 발현된다. 이른바 웹툰은 세로 스크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다른 방향성을 획득하며, 여기서 우리는 동시대에서 어긋나는 경험을 한다.
[ 그림 1, 좌) 최규석 작가의 '송곳' 우) 연상호, 최규석 작가의 '지옥' ]
웹툰은 그 형식에서 이미 동시대성을 획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최규석의 [송곳](2013~2017)은 2008년 전후로 있었던 이랜드의 홈에버 사건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며, 동일 사건을 다룬 영화 <카트>(2014)보다 더 빠른 시기에 등장했다. [송곳]은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은 사건들에 관해 더 빨리 대응했고, 웹툰이 부여잡지 못한 현실을 숙제로 남겼다. 영화가 봉합을 통해 모든 것을 담으려 노력한다면 웹툰은 매화마다 어쩔 수 없이 간극을 남기기에, 웹툰은 독자가 자신을 투입할 여지를 남겼다. 최규석 차기작인 [지옥](2019~2020)은 고지라는 가공의 현상을 묘사한다. 고지는 인물의 죽음에 대한 예지이며, 이를 따라 새진리회라는 종교집단이 세를 뻗친다. 사건이 펼쳐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묘사되는 한국사회는 2020년의 판데믹에서 신천지를 비롯한 교인들의 모임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었다는 점에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정확하게는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은 없었지만 만화가 연재되던 실황에서 독자들은 가공의 현실이 자기들의 현실이 될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다.
이른바 웹툰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실황에서 발생하는 간극이 오히려 현실을 끌어들이는 틈새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상 매체가 사건 발생 직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에 대한 주목도가 빠르게 감소하는 반면, 웹툰은 독자가 자신을 대입하는 일이 언제든지 가능하다. 이는 구구절절 끼워 맞추기 식으로 웹툰을 현실화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현실이 나란히 벌어졌을 때 이들 간에 주어진 틈새가 독자의 동시대 의식을 자극하는 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유라면 웹툰의 오래된 팬층이 웹툰의 현재에서 찾은 게 무엇인지를 소명하는 게 가능하다. 두 세계가 ‘마찰’됨에 따라 발생하는 과열은 현실에서는 그저 경쟁과 피로 사회의 일면에 불과했으나, 웹툰에서 ‘마찰’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투신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됐다. 웹툰은 분명 현실적이지는 않았지만 개인이 자기만의 현실을 소유하게끔 해주었다. 가령 현실에서 상대방과 간극을 재고 관계를 갈무리하는 일이 경쟁과 피로의 맥락으로 풀이됐던 이유를 떠올려보자. 디지털 대비 아날로그는 일방적이고, 일회적이고, 소모적인경향이 있다. 이는 아날로그적 관계, 살아가는 현실에는 Ctrl+Z처럼 사건을 되돌릴 수도 없고, 자신이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웹툰의 독자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건 웹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웹툰 세계의 올드비가 되어버린 이들 세대에서 현실은 회귀, 빙의, 환생의 세 가지 요인이 부재한다. 현실은 작업물의 최종판본으로써 항상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이 된다. 그리하여 현실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자 생각을 빨리, 더 많이 진행한다. 멈추지 않고 생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도 하지만 생각을 멈추지 않을 때 피로와 경쟁 사회의 이면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다. 이른바 웹툰이 자라온 시절은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반대로 무언가를 잊을 정도로 노력하는 일에 등치되었던 시절이었다.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물질적 체계를 보상화하는 수단은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것들도 물질화해버렸다. 이들 현실에서 감정의 가치는 기억하고 기리는 일보다 그걸 잊기 위해 현실에 과몰입하게 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때 웹툰은 단순히 스낵컬처로만 볼 수 있을까? 현실에 몰입하게 해준다면 오히려 현실을 잘 살아가기 위해 복용하는 약물, 혹은 영양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 그림 2, 좌) 현군,장성락(REDICE STUDIO),추공 작가의 '나 혼자만 레벨업 우) UMI, 슬리퍼-C, 싱숑 작가의 '전지적 독자 시점' ]
‘장르’와 속성이 어떠한 욕망에 대한 우회적 분출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세계물의 범유행은 특기할 만하다. [나 혼자만 레벨업](2018~2021)이나 [전지적 독자시점](2020~) 같은 작품에는 여러 장르적 코드가 따라붙지만, 이들 작품의 특징은 인물이 이세계로 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장소 자체가 이계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이른바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배제되거나 잊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하게 몰입할 만한 장소가 되며, 보기에 따라서는 이미 현실이 망해버렸으니 유일하다고도 보인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대 이세계 한국을 다룬 작품들은 현실적으로는 이미 실패해버렸으면서 사적으로는 과하게 몰입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면서 기존의 계급이나 관계가 초기화된 공간으로 풀이된다. 즉, 경쟁과 피로 사회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웹툰은 그들 자신의 실패만을 대리함으로써 성공에 대한 우월과 성취감만을 취득할 수 있게 해줬다. 웹툰은 영화와는 달리 매화마다 독자를 현실에 돌아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더 잘 직시하게 해줬다.
그리고 여기서는 여타 다른 매체와 차별화되는, 웹툰만의 동시대성이 발견된다. 통칭 ‘이세계물’이라 부르는 장르가 2020년대 이후 웹툰문화에 웹소설을 가공한 형태로 유입되었다면, 이런 유입의 원천에는 이들이 가공하기 쉽고 재빨리 투입하기 쉬운 상품이었다는 점이 있다. 2020년대의 웹툰 시장에서 실패의 위험이 없는 콘텐츠란, 오리지널 시나리오처럼 흥행의 불확실성을 끌고 가는 작품이 아니라, 원작 팬들이 이미 있고 또한 글 자체가 하나의 콘티로 작용해서 가공하기에 비교적 간편한 웹소설이다. 이들 제작사는 실패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 작품에 현실의 오리지널리티가 삽입되는 일을 경계했다. 비교적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야기하는 와중에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져버릴 것이 두려워서,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원작 기반 콘텐츠를 선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혹자는 후카사쿠 킨지의 영화 <배틀로얄>(2000)이 <오징어 게임>(2021)에 비교적 앞선 ‘원조’라고 말한다. 분명 <오징어 게임>은 갇힌 공간에서 서로를 죽인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징어>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것과는 달랐다.
<오징어 게임>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한다는 점이다. 이들 작품에서 참가자들이 게임에 참여하는 이유는 공통적으로 돈이 부족해서다. 경쟁 사회에서 몰락한 이들은 다시금 경쟁 사회로 빠져들기를 택하며 이 과정에서는 ‘오징어 게임’이라는 추억이 개입한다. 마치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이들 게임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이들로 하여금 ‘과거’를 살고 있게끔 여기게 한다. 즉 살아가는 현실과 내쳐진 현실 간에 틈을 보여줌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게임에 몰입하게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웹툰은 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틈에서 현실의 빛을 보게 해준다는 점이 아닐까. 동시대성이 내보이는 간극은 마치 모 만화의 주인공처럼 빈틈이 현실의 삶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 틈은 <오징어 게임>처럼 방심하거나 밟으면 나락에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잠시나마 숨을 돌릴 구석을 제공한다. 누군가는 웹툰이 그저 스낵컬처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아무런 의식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웹툰은 우리에게 충격을 흡수하는 ‘가짜 바닥’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