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이라는 한자는 ‘冊’으로도 쓰고, ‘册’ 으로도 쓴다. ‘冊’은 죽간을 말아놓은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 한자를 누여서 보면 종이를 실로 엮어 제본하는 현대의 책과도 그 형태가 닮았다. 책의 기원은 다양한데, 일정한 평면 안에 문자와 그림으로 정보를 담았다는 점이 공통점이 되겠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쓰기 위해서는 쓰는 방법 및 읽는 방법이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져야 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책은 읽는 흐름이 왼쪽에서 문장이 시작하고, 한 면안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읽어야 하며, 왼쪽 면을 읽고 오른쪽 면을 읽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은 어떤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든 간에, 작가와 독자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만나고자 한다면 꼭 지켜야 하는 사회적 약속이 되었고 작가의 연출은 그 사회적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펼침면의 구조상 생길 수밖에 없는 정보의 배치 제한은 책이라는 매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연출적 특징들을 낳았다. 우리가 현대적 의미에서 ‘만화책’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지면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그림과 글로 구성된 이야기를 컷과 홈통으로 디자인한 작품을 담는 매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시대가 변하며 만화의 내연과 외연이 확장되고 만화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만화 원작을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를 통해 영화, 드라마, 웹툰, 뮤지컬, 연극, 소설 등 다른 매체로 각색하는 경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제는 새로운 일도 아니다. 한 분야에서 작품성, 대중성 등 흥행 요소를 검증받은 타 미디어 작품이 만화로 제작되는 반대의 경우도 늘었다.
그러나 만화책이 원작인 작품이 타 매체로 재해석되어 호평을 받는다 하더라도, ‘책’으로 읽는 마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수없이 많은 작품 중 몇을 어렵게 골라보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되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각색된 애니메이션 역시 성공적으로 영상화되어 모두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만화책 원작과 각색된 작품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고자 함이 아닌, 어떤 작품을 만화‘책’으로 읽었을 때의 보다 즐거웠던 경험을 공유하는 데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 레이먼드 브릭스, <바람이 불 때에>·<에델과 어니스트>
[ 그림 2, 레이먼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와 '에델과 어니스트' ]
누군가 도서관에서 레이먼드 브릭스의 책을 찾고자 한다면 그의 책은 일반적으로 어린이 자료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의 대상 연령층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매우 다양함에도 그는 보통 어린이 그림책 작가로 분류된다. “열다섯 살에 만화를 그리려고 윔블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최초로 그림책 삽화에 만화 기법을 사용한 작가”라는 소개글을 빌지 않아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만화에 대한 정의-연속 예술-에 입각하여 그의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를 위대한 그림책 작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만화가이기도 하다고 표현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자극적인 소재 없이도 컷의 배치에 따른 스펙터클의 연출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예로 그의 대표작 중 <바람이 불 때에>(시공주니어, 1995)와 <에델과 어니스트>(북극곰, 2022)는 적지 않은 분량이 소시민의 일상과 대화에 할애되었는데, 이러한 파트는 작은 컷으로 세분화하여 배치하였다. <바람이 불 때에>는 최대 7단X4컷, <에델과 어니스트>는 최대 5단x4컷 구성까지 취한다. 이렇게 작고 빼곡한 컷들이 배치된 뒤, 핵 전쟁의 위험성을 다룬 <바람이 불때에>에서는 그에 이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경우 양쪽 펼침면 전부를 여백 없이 한 컷으로 활용하여 등장인물이 느꼈을 감정의 폭/깊이 및 사건에 대한 압도감 등을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바람이 불 때에>는 등장인물이 노부부 둘뿐이며, 부부의 시골집이 주된 공간적 배경이다. 레이먼드 브릭스는 자칫하면 지루해지기 쉬울 수 있는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유쾌한 캐릭터들과 재치 있는 대화, 사랑스러운 에피소드 등을 통해 리듬감 있게 전개하였다.
<바람이 불 때에>는 애니메이션으로 1986년 개봉되었는데, 영어 원제(<When the Wind Blows>)는 원작과 동일하나, 국내에는 <바람이 불 때>라는 제목으로 수입되었다. 데이비드 보위가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였으며, 원작의 화풍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실사 영상을 삽입하거나, 미니어처로 만든 배경 및 소품을 활용하여 원작과는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그려낸 점이 특기할만하다.
그러나 원작의 20~21p와 같이 단일 컷뿐만 아니라 컷 28개를 포함하는 한 페이지가 하나의 컷 역할을 하고, 더불어 양 펼침면이 하나의 컷처럼 기능하는 연출은 매체의 특성상 원작 ‘책’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해두고 싶다. 또한 핵폭탄 투하에 따라 방사능 오염이 심각해질수록 부부의 삶과 건강은 피폐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데, 방사능 피폭의 폐해가 심각해질수록 그에 따라 원작에서 색채 효과에 어떻게 변화를 주었는지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한편 <에델과 어니스트>는 레이먼드 브릭스의 부모님의 삶을 다룬 그래픽 노블이다. 그래픽노블 <에델과 어니스트>는 판형이 <바람이 불때에>보다 작게 출간되었는데, <에델과 어니스트>는 영국의 현대사를 겪어가는 소시민의 생활상과 그들의 일대기에 중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현재 출간된 판형이 <에델과 어니스트>에는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에델과 어니스트>의 메시지는 <바람이 불 때에>의 그것만큼 충격적이거나 경고성을 띠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양쪽 면을 모두 활용하여 압도적인 임팩트를 주는 이미지는 없다. 그러나 후반부 에델의 사후 어니스트가 홀로 남으면서 생긴 일상의 공백에 따라 조밀하던 컷의 배치는 그의 슬픔과 공허함을 대변하듯이 1페이지에 1~2컷만 놓일 정도로 커지고, 어니스트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1면에 1컷으로 진행된다. 책의 주인공은 에델과 어니스트였기 때문에, 에델과 어니스트가 모두 사망한 후의 장면들은 모두 그들이 남긴 것들이 컷의 중앙에 위치하며, 아들 레이먼드는 뒤돌아 그것들을 바라볼 뿐이다.
<에델과 어니스트>는 애니메이션으로는 2018년 개봉하였다. 레이먼드 브릭스 특유의 부드럽고 다정한 그림체와 색채를 한편의 ‘동화’처럼 따듯하게 구현했지만, 원작의 인간미 넘쳤던 감정 표현이 애니메이션에서는 부드럽게만 순화된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다. 레이먼드 브릭스 특유의 위트와 쾌활함을 좀 더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원작을 추천하고 싶다.
| 파코 로카, <주름>
[ 그림 1, 파코 로카의 '주름' ]
만화에서 흔치 않은 주제인 ‘노화’를 다룬 파코 로카의 <주름>(아름드리미디어, 2022)은 2008년 바르셀로나 만화 페스티벌 최우수상, 2011년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우수상을 수상했다. ‘알츠하이머’와 노화를 중요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노환 자체에 대한 정보적 접근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노년의 등장인물 간의 상호작용과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더 많은 그래픽노블이다. 2011년에는 <노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애니메이션화되었으며, 유수의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름>은 애니메이션화되면서 원제(<Wrinkles>)는 동일하나 국내에는 <노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에 없는 새로운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사건의 순서를 약간 바꾸는 방법으로, 두 노인이 갈등을 겪고 우정을 형성하는 과정이 기승전결에 따라 보다 용이하게 이해될 수 있게끔 내러티브를 각색하였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각색된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가 등장인물(특히 미겔)을 더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주름>의 키워드는 ‘사랑’과 ‘이해’다. ‘사랑’은 요양원에 보내진 노인들과 그들의 가족, 미겔과 에밀리오, 모데스토와 돌로레스 등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에 따라 생각해 봄직하다. 요양원 노인들을 통해 독자들이 노년의 삶과 노화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작품의 목적이라고 생각되어 ‘이해’를 또 하나의 키워드로 보았다.
만화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알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 효과적으로 연출한 페이지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46-47p에는 같은 구도의 컷이 의도적으로 반복되어 배치되어 있다. 달라지는 것이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인들이 무료히 앉아있다가 식사시간 및 저녁시간에만 자리를 비운다는 것뿐이다.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시곗바늘의 움직임만 바뀜으로써 요양원 노인들의 무력하고 우울한 현실을 표현하였다. 해당 페이지를 시선의 흐름에 따라 읽어가면, 시곗바늘의 움직임이라는 주어지는 시각 정보를 통해 만화 내에서의 시간의 경과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쪽 면의 12개 컷을 모두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소요하여 실제로도 시간의 경과를 체감할 수 있다. 이로써 독자는 요양원의 하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고, 그를 통해 노인들에게 정서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는 이 부분에 몇가지 장면을 더 추가하여 무력함보다는 외로움과 우울함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각색하였다.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주름>과 <노인들>에서 알츠하이머가 심각하게 진행된 에밀리오를 제외하면 가장 도드라진 변화를 보이는 등장인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미겔인데, 그 변화의 추동력은 에밀리오와의 우정이다. 그는 노화뿐만 아니라 사랑 등 ‘관계’라는 것에 시종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결말부에서는 에밀리오를 위해 그토록 꺼려 하던 2층(더 이상 혼자 거동할 수 없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함께 올라간다. 미겔은 시종일관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장난을 치거나 속임수로 푼돈을 받아내는데,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된 에밀리오가 2층으로 떠난 후 그는 에밀리오의 생활을 지금껏 도왔던 일, 다른 노인들에게 장난을 쳐왔던 일들이 모두 미겔 자신에게 필요했던 일임을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곁에 누구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해왔고, 또 모데스토를 따라 요양원에 들어온 돌로레스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제야 그는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고 싶고,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일이라는 것을.
애니메이션과 원작은 결말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미겔이 에밀리오를 바라본다. 미겔이 에밀리오를 바라보는 것은 관객의 시각이고, 알츠하이머 환자를 곁에 둔 가족과 친지의 시각이다. 에밀리오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알츠하이머 환자였던 모데스토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믿으며, 아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하곤 했던 미겔은(이러한 그의 언행은 상실로 인한 고통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기제로까지 보인다) 애니메이션에서 “저(에밀리오) 안에는 분명히 누군가 있다”라고 단언한다. 늘 하는 그의 농담에 에밀리오는 희미하게 웃지만 에밀리오가 정말로 미겔의 농담을 인식했는지, 혹은 단순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지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밀리오가 미겔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는 에밀리오와 ‘기나긴 작별’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에밀리오의 마음이 에밀리오의 안에 남아있다고 미겔이 믿는다’는 것이다.
한편 원작에서는 에밀리오가 미겔을 바라본다. 우리가 통상적으로는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알츠하이머 환자의 관점이다. 식사하는 것을 도와주던 미겔을 에밀리오가 잠시 알아보고 미소 짓지만, 미겔의 얼굴은 금세 에밀리오의 머릿속에서 휘발된다. 아마도 에밀리오는 이렇게 잊어버렸다가, 어느 순간 또 미겔이 곁에 있음을 알고 미소 지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에밀리오의 마음이 남아있다(즉, 에밀리오가 아직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주름>과 <노인들>의 결말은 이렇게 상반되는 시야를 조명함으로써 ‘노화’에 대해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보완적 역할을 수행하고, 궁극적으로는 두 작품이 의도하는 목표에 효과적으로 다다르게 한다.
끝으로 <주름>의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만 유달리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노화와 남겨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는 안토니아의 에필로그 부분이다. 모데스토가 알츠하이머가 심각해져 돌로레스가 2층으로 올라가고, 미겔마저 에밀리오를 위해 2층으로 올라간 후, 다섯이 함께 식사하던 테이블에 안토니아는 혼자 남겨진다. 그녀는 로사리오 여사의 옆자리로 옮겨가는데, 로사리오 여사는 온종일 혼자 창밖을 보며 이스탄불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는 노인이다. 안토니아는 혼자 됨에 체념하지 않고, 그녀의 말벗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 아직 젊은 세대에게 노년이란 후회나 연민, 혹은 질환만을 상대하며 인생의 종기만을 기다릴 것 같은 대상화된 타자로 간주되기 쉽지만, 누구에게나-요양원에서 여생을 마칠 노인이라도- 지금 여기의 삶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인에게도 현재와 미래는 존재하며, 그들도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과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바닷가에서 몰아치는 해무나,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뿜어내는 연기처럼 언젠가는 이 모든 기억이 하얗게 사라질지라도.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된 만화 몇 작품에 대하여, 원작인 가진 ‘만화책’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부분들에 대해 단견을 다소 나눠보았다. 당연하게도 원작 매체만이 가진 연출의 고유한 특성은 타 매체에서는 그대로 재현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결과적으로 타 매체는 그 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각색할 수밖에 없다. 상술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연출의 특성 외에 책 만이 갖는 고유한 성질 중 하나는 그것이 몸으로 겪는 ‘체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독서’라는 행위는 읽는 주체의 감각과 분리될 수 없다.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작품이 담기는 그릇인 매체에서 유래하고, 매체의 선택은 작품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작가와 독자들은 매체의 물성 역시 서사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 책의 판형, 무게, 볼륨, 종이의 재질…. 모든 것이 파라텍스트(para-text)로서 작품과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책의 완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물성을 감각하며 읽는다는 것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와 더불어 독자에게 하나의 체험이 된다.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꺼내고 책상이나 무릎에 얹는 순간의 무게감,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느끼는 종이의 질감…. 그 순간에 나의 삶과 작품의 질량은 중첩된다. 독자는 시선의 흐름에 따라 한 컷 한 컷을 탐험하고, 동시에 한 페이지를 보고, 동시에 펼침면 전체를 함께 인식하면서 확장된 우주를 경험한다.
스콧 맥클라우드의 저 유명한 만화에 대한 인식론을 다시 되새기자면, 우리는 만화책 안에서 공간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순간을 보여주는 미디어(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화면의 한계 때문에 스크롤에 따라 시선이 머무는 이 컷 밖에 볼 수 없는 웹툰까지도)에서는 겪을 수 없는 만화책만의 경험이다. 만화는 시각을 공감각으로 활성화하여 이야기를 전달하고, 만화‘책’은 그에 더해 우리에게 작품의 무게를 선사한다. 질량을 갖고 존재하는 작품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떠안고 받치는 일이다. 그것은 정보로는 전환되지 않아도 손끝에서, 책을 얹은 무릎에서 감각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만화가 미디어 믹스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돌고 돌아오는 이유일 것이다.
[ 그림 3,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