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 웹툰의 양적 성장 이후, 질적 성장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
0. 질적 성장?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에는 주관적 보편성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다소 당황스러운 주장을 한다.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단어는 둥근 사각형과 같이 형용 모순인 것처럼까지 느껴진다. 어떻게 개인의 '주관'(물론 칸트는 취미판단과 관련해서 '주관'을 '객관적이지 않은' 즉 비-객관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이 '보편성'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다는 것일까? 이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판단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타인에게 그 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주관을 객관적인 판단인 것처럼 동의를 요구해가며 그것을 객관적인 아름다움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라는 개인의 판단은 원자화된 것으로 머무를 수 없으며, 그것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의 보편적인 성질이라는 것이 칸트의 설명이다.
[ 그림 2,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비판' ]
‘취향’은 현 시대에서 타인의 간섭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가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것들만을 즐기고 있어도 '개인의 취향'이라는 마법과 같은 단어로 그들을 허용한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적인 규칙은 관대라는 외피 아래 차가운 무관심을 가리고 있다. 우리는 기묘하고 기이한 취향을 가진 이들에 관심을 두지 않기 위해 그들을 허용한다. 그러나 칸트가 밝힌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의 본질적 속성을, 아름다움과 필연적으로 친연성을 가지는 예술 작품에 도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기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관대하게 수용할 때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취향이 보편적인 것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만, 다수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지지하는(것 처럼 보이는) ‘취향 존중’이라는 마법과 같은 단어로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렇지만 취향 존중이라는 단어로 외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요구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차가운 외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거절당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요구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이다.
현 시점에서 웹툰에게 필요한 것이 질적 성장이라면 우리는 우선 질적으로 훌륭한 웹툰과 저급한 웹툰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다. 무엇이 훌륭한 웹툰이며, 무엇이 저급한 웹툰인가? 그리고 동시에 저급한 웹툰이 많아지는 것이 문제적인가? 적어도 나는 이에 대해서 전혀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질적 성장을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수평적 확장이라는 의미로 변형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저급한 웹툰에 대한 나의 변명이 가능할수도 있을 것 같다.
저급한 웹툰이란 무엇을 뜻할까? 일말의 반성과 고민도 하지 않고 처벌하는 기계로서 ‘정의 구현’에 충실한 사이다 웹툰?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그려진 ‘여성향’ 또는 ‘남성향’ 웹툰? 개인의 고난과 역경을 모두 삭제하고 성공을 위해 단선적으로 질주하는 일명 ‘상태창’ 웹툰? 이들은 모두 ‘양산형’이라고 불릴만큼 각종 웹툰 플랫폼에서 신작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이들을 저급한 웹툰이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저급한 웹툰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 자체는 사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떠한 작품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적어도 이 글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인 저급함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주관적인 저급함이기 때문이다.
웹툰을 보는 독자들은 그 웹툰이 객관적으로 저급한지와 무관하게 자신이 즐기는 웹툰이 저급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저급한 웹툰이라고 판단될지라도 충실하게 즐기고 있다. 즉각적으로 자신의 만족을 충족해준다면 독자들은 스토리, 작화 등과 같은 일반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웹툰을 성실하게 즐길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웹툰을 무려 추천하기까지 한다. 앞에서 언급한 ‘요구’와 유사한 방식인 (저급한 작품에 대한) 추천은 일반적으로 변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니 훌륭하다는 건 아니지만…”등 과 같은 방패 뒤에 늘어지는 구차한 변명들은 저급한 웹툰을 즐기는 충분히 많은 이유들이 있다는 설명과 같다. 저급한 웹툰에 대한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는 즐길만한 웹툰이 아니지만 자신은 즐기고 있다는 묘한 배덕감에서부터 비롯한다. ‘취향 존중’의 시대에서도 저급한 웹툰을 즐기는 독자들은 자신이 즐기는 웹툰이 적어도 ‘훌륭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자신의 취향이라고 변명하면서도 이 저급한 웹툰이 자신의 취향이라는 점에서 오는 ‘수치심’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연숙 평론가가 사라 어메드(Sara ahmed)의 수치심 개념을 설명하면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는 항상 말하고 싶어하는 주체”이며, (수치스러운 것을) “말하고 싶어하기에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주체”다. 우리는 저급한 웹툰을 즐기면서 수치스러워하고 그것을 말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수치심이 지시하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마조히즘적 쾌락’은 독자들이 가장 숨기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은밀한 취향을 지시한다, 개인의 가장 은밀하고 설명할 수 없는 취향이라는 점에서 ‘저급한’ 작품에 대한 취향은 권위적이고 논리적인 논증이기보다는 앞뒤가 맞지 않고 횡설수설과 같은 변명의 형식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저급한’ 웹툰을 즐긴다고 생각할 때 어떠한 웹툰을 ‘저급한 웹툰’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간단한 답변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일종의 교양(bildung)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즉각적인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웹툰을 보는 독자들이 자신이 보는 웹툰이 교양있고 훌륭한 웹툰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웹툰을 즐기는 ‘저급한’ 취향을 가진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저급한) 취향을 숨기고자 하면서 동시에 끈질기게 설명하고자 한다. 자신의 마이너하고 저급한 취향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질적으로 저급한 웹툰의 가능성을 마주하도록 만든다. 교양 없고 천박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실패’를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내밀한 취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적 취향’을 당당하게 즐기자는 자유주의적 구호로 연결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서 비롯하는 수치심을 끈질기게 붙잡고 왜 누군가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취향을 반복적으로 즐기는지를 스스로에게, 나아가 타인에게까지 설명하는 지에 대한 이유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과 연결되는 것이 ‘저급한’ 웹툰에 대한 적절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1. 질적 확장.
한편 내가 나의 취향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질적 성장’이라는 단어를 다소 자의적으로 ‘수직적 상승’이 아닌 ‘수평적 확장’으로 변화시킨 것을 상기해보자. 취향에 대한 변명은 끝났지만, 용어의 의미를 변화시킨 것이 아직 유효하다면 우리는 최근 웹툰의 획일화에 대한 문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이다’, ‘회귀물’, ‘상태창’ 또는 성인 웹툰으로서 ‘남성향’과 ‘여성향’ 웹툰들은 현재 연재중인 웹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위해 웹툰이 공식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이들 바깥에 있는 웹툰과의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이들은 ‘저급한’ 웹툰에 속하지는 않는다. 스토리, 작화 등을 내부적인 웹툰 스튜디오를 통해서 개발한 뒤에 각종 플랫폼에 연재되기에, 세련된 작화와 빠른 전개와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가지만 구별하기 힘들만큼 유사한 특성들을 보인다. 자본을 투입하여 질적으로 성장한 웹툰이 양적으로도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외견상 웹툰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은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질적 성장’을 ‘수평적 확장’으로 사용한다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웹툰의 서사 진행 방식이 일종의 유행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것은 산업화에 따르는 필수적인 귀결이지만, 획일화를 수반한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가령 ‘상태창’ 웹툰은 고난을 웹툰의 세계관을 관장하는 존재를 통해 고난을 삭제시키는 방식으로 쾌감을 산출한다. 고난이 얼마나 빠르게 ‘해결’될 수 있는지가 웹툰의 인기 비결이라는 점에서 웹툰들은 고난의 삭제 속도를 경쟁적으로 올리고 있다. 즉각적인 쾌감을 세련된 작화를 통해 선보이는 상태창 웹툰은 지나치게 일괄적인 방식으로 웹툰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 그림 3, '상태창'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 '나 혼자만 레벨업' ]
이미 문제점이 여러 차례 지적된 ‘사이다’ 웹툰 또한 독자들 대다수가 등장인물들에 대해 동일하게 평가한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 댓글창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쓸모없는 ‘키보드 워리어’ 짓으로 취급받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타인에게 정당한 것으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쓸모없는’ 짓만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가령 「집이 없어」의 주인공인 ‘백은영’은 여전히 댓글창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며 그러한 상반된 평가들까지 웹툰을 즐기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다’ 웹툰은 전혀 논쟁적이지 않다.
1. 잘못이 없는 내가 저들에게 피해를 입었다.
2. 부당하게 피해를 입은 만큼 피해를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3. 따라서 나의 폭력은 저들의 부당한 폭력과는 다른 정당한 폭력이다.
사이다 서사의 모든 캐릭터들이 근거하고 있고, 모든 독자가 내면화한 위와 같은 논변이 매력적인 이유는 '논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와 같은 논변이 논쟁의 여지 없이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웹툰이 구축하는 세계 자체가 저 논변이 옳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져있으며, 적어도 저 웹툰을 보는 당시에는 논변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다는 것이다. 즉 행위에 대한 가장 단순한 고민인 선악에 대한 판단까지 '이미' 이루어져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정당한 손에서 비롯하는 폭력은 서사 진행을 가속화한다.
정리하자면 현재 유행하는 유사한 스타일의 웹툰은 '서사 진행의 가속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빠른 서사 진행을 보유한 웹툰‘만’이 웹툰 플랫폼에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는 구조는 다양한 웹툰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우리는 웹툰을 즐기면서 동시에 등장인물들에게 불쾌해할 수 있고, 내가 불쾌해 한 등장인물을 불쾌하지 않아하는 다른 독자에게 자신의 불쾌함을 요구하는 오지랖도 부릴 수 있다. 웹툰 플랫폼이 가진 가장 뛰어난 장점이자 위험한 장점이기도 한 댓글창은 등장인물들을 위한 일종의 공론장이 되며 끊임없이 웹툰을 읽어내는 자신의 시각을 ‘요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웹툰에서도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많은 가능-웹툰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웹툰이 저급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독자들이 참여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은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들이 웹툰의 궤적을 그릴 수 있게 속도를 늦추는 것은 웹툰이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오히려 확장하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