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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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의 인종차별표현 사태와 네이버의 오래된 방관

네이버가 혐오표현과 인종차별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2023-11-03 위근우


때로 어떤 실수는 너무나 기초적인 실수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9월, 해외로 서비스 중이던 네이버웹툰 <참교육>(영문명 <Get Schooled>)에서 ‘Fucking Nigger(망할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인 독백을 일부 글자만 가린 채 공개했다가 큰 비난을 받고 미국 연재를 중단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내 연재 역시 장기 휴재 중인 상태다. 대체 어떡해야 미국에서 금기시되는 소위 N워드를 그대로 노출하는 실수를 할 수 있는가. 당장 작가들의 역량과 상식부터 의문시 되지만, 무엇보다 한국을 대표하는 네이버라는 거대 인터넷 플랫폼에서 이런 기본 중의 기본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특정한 재현이 혐오 차별적인 맥락을 담아냈느냐 아니냐는 해석의 문제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쓰면 안 되는 말, 쓰면 안 된다는 걸 다들 상식적으로 알 만한 말을 그대로 노출하며 해당 작품의 담당 편집자를 비롯한 네이버 구성원들은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한 걸까? 나는 지금 동네 구멍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여전히 믿기 어려운 이 사태에 대한 황망함은, 그래서 이 사태에 대한 책임과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까지 난망하게 만든다. 변명의 여지없이 너무 명백한 실수라 잠시 뭐에 씌어 인식의 사각(死角)이 만들어졌으리라고, 이것을 의도적으로나 혹은 인권 의식의 부족함 때문에 벌인 일은 아닐 거라고 판단하는 게 차라리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태의 불가해함에 방점을 찍을수록, 네이버의 잘못은 비록 치명적이되 일탈적이고 일회적인 ‘실수’로 규정된다. 따끔하게 질책 받아야 하되 조직 내적으로 발생한 문제라고는 볼 수 없는 그런 실수. 도덕적 반성보다는 마치 반도체 생산처럼 공정의 꼼꼼함으로 재발을 방지하고 책임질 실수.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사안의 어이없음에 매달릴수록 우리의 시야는 좁아진다. 이번 사건은 좁게 집중해서 보면 갑자기 벌어진 일탈적인 잘못처럼 보이지만, 카메라를 조금만 뒤로 빼서 사건을 둘러싼 배경 맥락을 함께 둘러보면 사건이 발아할 가능성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일에 대한 네이버의 책임은 이러한 각각의 가능성을 검토하며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인종차별표현 논란이 다른 작품이 아닌 <참교육>에서 발생했다는 걸 알았을 때, 결국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N워드처럼 너무 투명한 형태로 나왔다는 게 여전히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몇 번이나 이 작품의 서사적 쾌감이 다분히 약자 혐오 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이번의 인종차별 재현 역시 기존의 문제가 반복 심화된 것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의 설정부터 그러하다. 학생에 대한 체벌금지법이 만들어지자 “어른의 생각보다 영악”한 아이들은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고 “교권, 교실 붕괴의 문제가 나날이 지적”되자 “교권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합법적 체벌이 가능한 교권수호국이 등장하게 된다(큰 따옴표 인용은 모두 <참교육> 1화에서 직접 인용). <참교육>의 쾌감은 이처럼 체벌 받지 않을 권리만 행사하고 학생으로서의 의무는 회피하는 밉상들을 교권이라는 대의와 주인공 나화진의 무력으로 ‘참교육’시키는 것에 있다. 학생이 인간적 대우를 받을 권리와 교육자의 권리가 함께 추구될 수 없다고 가정하는 제로섬 게임의 세계관부터 근거가 희박하거니와, 무엇보다 청소년을 비호감적인 사회적 무임승차자로 규정하고 그들을 응징하는 서사는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한다. 해당 작품에서 여성 중심적이고 남성 혐오적인 사상을 학생에게 강요하는 페미니스트 초등 여교사를 등장시켜 역시 교권수호국이 응징하는 에피소드가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페미니스트 초등교사 비밀 집단이 학생들을 암암리에 세뇌하니 경찰 수사를 해달라며 국민청원까지 올렸던 실제 헛소동을 모티브로 삼은 이 에피소드에서 페미니스트 여성 교사는 딱 이 작품의 주요 독자층이 원하는 만큼 혐오스럽고 말이 안 통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니 그가 교권수호국에 의해 따귀를 맞는 장면은 더없이 통쾌한 정의구현이 된다. 학생에 대한 체벌을 금지시키고 어릴 때부터 페미니즘 초등 교육이 필요한 건 구조적 약자로서 차별에 취약한 학생과 여성을 위한 조치지만, <참교육>은 수많은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이 믿는 것처럼 그들을 위한 차별시정조치를 사회적 무임승차로, 그에 의한 기득권들의 불만을 역차별로 그려낸다. 이 얄팍한 사기극이 가능하려면 구조의 문제를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 인종차별 논란이 벌어졌다.


작가들은 인종차별 논란이 생기자 영어권 독자들에게 “현재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다문화와 이민자 가정이 처한 상황을 그렸”으나 “한국의 다문화 가정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더 크고 보편적인 사실과 차별의 범위를 간과”했고, “역사적으로 거의 동질적인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사과문을 게재했다(큰 따옴표 안의 사과문은 서울신문의 번역을 인용). 다시 말해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재현하는데 천착하느라, 미국을 포함한 글로벌스탠다드로서의 혐오표현 기준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딱히 정상참작은 되지 않는다. 그들이 해당 에피소드 첫 회에서 묘사한 시골의 다문화 사회에선 반에 ‘순수 한국인’인 학생이 한 명밖에 없고, 일진인 에티오피아 출신이 소수자인 한국 학생을 괴롭힌다. 다시 한 번,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의 맥락은 삭제되고 한국인이 당하는 역차별의 세계가 재현된다. 그러니 백인 혼혈인 교권수호국 직원에게 흑인 혼혈 학생이 “미국에서 옐로우 몽키라는 말 들어본 적 없어요?”라 놀리자, 그에 대해 N워드를 독백하는 게 정당화된다. 다시 말하지만 N워드 문제는 너무 투명해서 작가도 네이버도 변명하지 못했지만, 만약 그만큼 투명한 방식이 아니었더라면 페미니스트 여교사를 응징하고 진정한 성평등 교육을 역설하던 에피소드처럼 외국인 청소년에 대한 혐오와 응징을 정당화한 뒤 진정한 인종평등을 역설하는 스토리가 진행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번 사태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일탈이 아니다. 순도 100퍼센트 인종차별표현이 등장한 건 놀랍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우회적인 순도 80퍼센트 인종차별적 재현이 나올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건 그동안 학생이나 촉법소년,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던 역시 순도 80퍼센트짜리 혐오적 재현을 방관한 결과다.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한 올바른 질문은 ‘네이버는 어쩌다 이토록 기초적인 실수를 했느냐’가 아니라 ‘네이버가 얼마나 방관하고 있었기에 이런 안일한 실수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느냐’다. 플랫폼의 진정한 책임은 이 방관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웹툰 같은 디지털 콘텐츠에 대해선 창작자와 플랫폼의 자율 규제를 그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나 역시 <참교육> 같은 작품들의 해악에도 불구하고 사전 검열을 해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율 규제에서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효용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것에 있다. 자율이란 타인의 강제가 아닌 스스로 규율을 부여하고 종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재 플랫폼의 자율 규제에선 타인의 강제에 따르지 않는 자유로움만 강조되고, 그들이 어떤 규범적 기준을 세우고 어떻게 스스로를 종속하는지 알 길이 없다. 즉 ‘자(自)’만 부각될 뿐 ‘율(律)’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가령 박태준의 <외모지상주의>나 전선욱의 <프리드로우>에서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캐릭터를 심각하게 희화화하거나, 작품 내에서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게이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납작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네이버는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을까. 인식은 하되 어느 정도까진 허용된다는 기준은 있는 걸까, 아예 인식을 못하는 걸까, 과거 <복학왕>의 청각장애인 재현 논란이나 봉지은에 대한 여성차별적인 재현처럼 외부적인 공론화가 이뤄져야 사후적 처리를 하는 걸까. 혐오표현과 차별적 재현에 대해 네이버가 도덕적 기준보다는 외부 반응에 더 민감하다는 혐의는 문제적인 작품들이 아닌 외려 문제없는 작품에 대한 사후적 대응에서 더 잘 드러난다. 지난 2021년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바른 연애 길잡이>, <성경의 역사>, <이두나!> 등의 작품이 남성 혐오를 드러냈다며 댓글과 별점으로 말 그대로의 테러를 벌인 일이 있다. 특히 <바른 연애 길잡이>에 대해선 한 캐릭터가 엄지와 검지로 ‘조금’이라는 포즈를 취한 것이 남성 혐오 사이트인 메갈리아의 심볼을 재현한 것이며, 캐릭터가 놀라며 낸 ‘허버’라는 의성어도 ‘허버허버’라는 남성 혐오표현이라 주장했다. 메갈리아가 남성 혐오 사이트라는 주장부터 반박해야 할 것 투성이지만, 어떤 의미로든 <바른 연애 길잡이>의 해당 장면에서 남성 혐오를 읽어낼 맥락은 없었고, 무엇보다 혐오표현의 핵심은 누군가의 기분을 불쾌하게 한 것이 아닌 그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에 있다. 남성들이 주장하듯 ‘허버허버’가 남성이 허겁지겁 먹는 걸 꼴 보기 싫어하는 여성의 언어라 한들 그것이 어떤 존엄을 훼손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생떼에 <바른 연애 길잡이> 작가는 사과에 가까운 해명문을 올려야 했는데 만약 네이버가 무엇이 혐오표현인지에 대한 자율적 기준이 있었더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테러에 단호하게 작가를 지킬 수 있었을 게다. 결국 ‘허버허버’조차 아닌 ‘허버’도 ‘어버’로 수정해야 했다(1). 이걸 그저 선제적이고 타이트한 기준의 적용이라 볼 수 있을까? 정작 과거 카카오톡 이모티콘 중 남성 혐오라는 이유로 ‘허버허버’가 삭제될 때 함께 여성혐오라는 이유로 삭제되기도 했던 표현인 ‘오우야’는 박태준만화회사의 최근 연재작 <촉법소년>에서 아무 문제없이 등장했다. 남성들이 먹는 모습을 희화화하는 ‘허버허버’가 수정될 만한 표현이라면, 여성을 오직 성적 대상이자 관음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오우야’는 왜 그냥 두는가. 그러니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네이버의 자율 규제엔 스스로 부여하는 규율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여 이번 <참교육> 사태에서 네이버의 책임은 단지 이토록 큰 회사에서 정말 기초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에 있지 않다. 자율 규제라는 미명 아래 작품의 재현윤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특히 혐오 정서에 편승해 조회수를 끌어당기는 인기작들을 방관했다는 것이 그들의 진짜 잘못이자 책임질 몫이다. 혐오표현과 재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는 쪽에선 세상을 무균실로 만들 셈이냐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벌어지는 일은 재현윤리를 요구하는 이들이 세상을 무균실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팬데믹의 시기에 제발 마스크 쓰고 손 좀 씻고 백신 맞자고 통사정하는 것에 가깝다. 나를 비롯한 여러 비평가들이 <참교육>을 비롯한 인기 웹툰들이 혐오 정서를 팔아 승승장구하는 것에 대해 몇 번의 글을 통해 우려를 남겼지만, 그걸 그대로 방치하다 이 사달이 났다. 우리가 무균실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그들이 안티 백서다. 물론, 그냥 병에 걸린 뒤 적응면역을 얻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다. 만약 그렇게라도 네이버가 이번 사태로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자율 규제의 기준을 만들고 내부 교육을 한다면 그래도 다행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 출발점은 이번 일이 그저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1) 만화규장각 '웹콘텐츠의 주요 소비층, MZ세대를 알아보자' https://www.kmas.or.kr/webzine/column/2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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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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