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 조석 작가의 '너는 그냥 개그만화나 그려라' 1 ]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작가가 우리에게 필요할까. 온라인 플랫폼 연재는 기록이 반영구적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내용상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한번 진행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행여나 오탈자가 나기라도 하면 독자들은 이를 재빨리 문서화해서 나무위키 같은 곳에 올린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사전에 검토를 해준다면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그게 잘 되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가 개인이 더 신중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작가 개인에 따라붙는 일련의 논란들이 추후의 활동과 연계되므로, 개인의 자취와 거처를 위해서라도 더더욱 필요한 조처다. 하지만 만화가 예술활동이라는 점에서 작가 개인의 생각과 관념이 들어가는 것을 피해 가기란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상툰이라는 웹툰의 장르가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작가가 아닌, 고민을 충분히 털어놓는 행위를 끌어내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일상툰은 개인의 사고와 관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나,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양의 숙고를 보여주기에, 일상툰의 역할은 분명하다고 말이다.
먼저 일상에 대해 알아보자. “이런 건 일기에나 써라.” 자신의 생각이 과하게 들어가 공감하기 어려울 때 이런 댓글이 달리곤 한다. 요즘은 소갈비찜 레시피가 더 자주 보이지만 창작물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위의 댓글에 더 가깝다. 이는 웹툰이 아무리 작가의 창작물이라 한들 일정 정도는 독자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만화가 온라인에 공개되는 순간부터 ‘만화’란 일정 정도 작가의 손을 떠나니 말이다. ‘일기’라는 표현에서도 짐작 가능하듯 이런 비난은 작품을 사유화하는 일을 경계한다. 애초에 작품은 작가의 것인데 사유화하지 말라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어느 정도는 점잖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분명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뜻과 생각을 투영할 권리가 있다. 애초에 예술이라는 건 만드는 이의 생각이 빠지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허나 독자들의 이러한 비난은 작품에 자기 생각을 넣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사회성을 유지하라는 것에 가깝다. 같은 말이라도 더 나은 표현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잊지 말 것, 너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숨기는 것만 못하다는 점 등이다.
이미 우리가 영화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있기도 한데, 해석의 자유가 그것이다. 영화를 해석하는 일은 감독이 딱히 의도하고 만든 게 아니더라도 관객이 의미를 새로 창출하기도 한다. 어떤 감독은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해석을 따라 비난받기도 하고 때로는 사과문을 쓰기도 한다. 이는 영화에서 작가주의가 태동함에 따라 감독은 영화의 안팎을 조율한다는 의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즉, 감독은 영화의 대외적인 얼굴로써 작품이 어떻게 비쳐지는지를 항상 의식해야만 한다. 웹툰에서의 작가 또한 그러하다. 웹툰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며 이를 ‘만화’라는 범주에 넣기 시작할 무렵, 여기에는 작가의 팬들이 생겨났다. 재밌게 본 이들은 더 나아가 만화를 그리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만화 장르과 관련있다. 웹툰 만화의 초중반에는 일상툰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는데, ‘일상툰’이라 함은 작가 개인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므로 자연스레 작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한편으로 이러한 일상툰 붐은 SNS의 유행과 맞물려 극대화되었는데, [역전! 야매요리]의 정다정 작가 등이 대표적이다.
일상툰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작가 개인의 일상인지를 확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상’툰의 특성상 개인의 삶에서 소재를 찾는 것은 맞았지만, 만화에 매번 쓸만한 소재가 나오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결국 언제가 소재가 고갈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결국 일상툰의 작가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일상만이 아닌, 주변인의 일상에서 소재를 찾기 시작했고, 실제로 있었던 일에 약간의 허구를 첨언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게 완성된 일상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백퍼센트 ‘실화’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만화적 허용으로 변형된 일상툰에서 작가의 일상을 찾는 팬들에게 ‘일상’은 허구와 구분되지 않았다. 소재 고갈 등의 이유로 인해 일상툰은 한계가 명확했다. 일상툰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일상툰은 곧 작가에게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었던 일을 일종의 ‘배신’으로 여겨지게 했다. 어떤 독자는 진짜로 있던 일이 아니라면 만화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냐고 비판했지만, 이미 ‘일상’이라는 장르가 되어버린 일상툰에서 작가 개인의 삶은 그 본연의 위치를 떠나버렸다.
그렇게 일상 없는 일상툰이 탄생했다. 일상툰은 여전히 작가의 일상을 묘사했지만 이제 독자는 그게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를 개의치 않았다. 일상툰에서 중요한 건 자신을 소개하는 능력과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오는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SNS의 인플루언서와 유사점이 있어서 작가 중에는 SNS의 인기인이 되거나, 또는 SNS의 인기인이 웹툰을 직접 연재하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고, 독자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즉, 일상툰은 어떤 면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에 대한 가상의 합의와도 같았다. 사실 인생은 편집되지 않은 날 것과도 같아서 재미있는 부분은 소수고 나머진 재미없거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일상툰’은 그런 와중에 재미있는 사건을 골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일부러 재미있는 사건을 만들러 간다 해도 이는 결국 일상에서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이었고, 이미 일상에서 특정한 사건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은 충분히 깨어지는 것이었다.
[ 그림 2, 너는 그냥 개그만화나 그려라 ]
이른바 일상툰의 재미는 발견에 있었다. 일상툰은 만화를 그리는 작가 또한 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는 점을 보여줬다. 일상툰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는 큰 틀에서 삶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일상툰이 보여주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서도 찾을 수 있는 부류의 재미로 이해됐고 그런 재미를 겪는 일에 관해 사람들은 공감했다. 삶에는 단순히 고통만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는 점에서 일상툰은 일상생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즉, 일상툰의 주된 목적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관한 ‘그럴듯함’을 전파하는 일에 있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에서 감지된 건 해석하는 측의 능력이었다. 일상툰의 독자들은 현실 세계의 허구와 진실을 두고서 그럴듯함을 시험했다. 작가는 손을 떠난 작품에서 해석의 권한이 독자에게 있다는 걸 감안해야 했고, 어떤 때는 자신이 의도한 것과 배치되는 의미로 전달되기도 했다. 이제 일상툰에서 묘사되는 사건들은 단순한 허구 이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일상툰은 단순히 작가 개인을 드러내어 소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서 작가와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묘사가 되었다.
여기서 일기장의 비유가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일기장은 개인의 사적인 삶, ‘일상’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일에 목적이 있다. 일기장은 그만큼 진솔하지만 세계에 대한 개인의 시선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대개는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주지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일기장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일은 자칫하면 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을 여과 없이 마주하게 된다. 일상툰이 대개 개그물 노선을 택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작가의 사적인 삶을 담은 일기장이기도 한 일상툰은, 설사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더라도 작가의 감정이 드러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만화를 보며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면 일상툰은 행복의 감정을 다뤄야만 했다. 설사 그게 거짓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속임으로써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만 있다면, 오케이였다. 이런 작품은 그 속내에서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지만, 충분히 고민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옹립되고 지지받았다.
물론 모든 일상툰이 유머나 위트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단지의 [단지](2015~2017)처럼 다소 자전적이라고 부를 만한, 개인사의 슬픔을 꺼내두는 작품도 있다. 이들 작품은 개인의 아픔을 세계로 확대해서 희석함과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지닌 이들에게 다가서고, 이를 토대로 이야기의 장을 열어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혹자는 다소 민감할 수 있을 개인사가 인터넷 세상에 박제되는 일에 우려를 보내기도 하지만, 이들 일상툰의 자전적인 성향은 그러한 일상이 더는 자신의 삶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파악되지 않게끔 해준다. 즉 일상툰의 개그적인 분파가 무료한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면, 자전적인 분파는 그러한 상처가 ‘무료한 것’이 되기를 꿈꾼다. 언젠가 이런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날이 오리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웹툰의 형식으로 평탄화하는 일이 바로 일상툰이다. 일상툰의 이러한 분파는 만화가 작가의 사적인 저작물임을 재확인해줬고 독자에게도 만화는 사적인 발화의 창구가 되어줬다. 작가와 독자는 이들 만화를 일종의 사유지로 이해했다.
이때 독자 일부는 작가의 일상을 공유함에 있어 이해하기 어렵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의문을 제기했다. ‘작품’은 일기장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보다 성숙할 것을 작가에게 청원했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너무 많은 일상을 투입하는 일을 우려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던 작품이 외부에 알려지는 일을 두려워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의 사유지가 외부에 공개되고 나면 단순한 흥미로만 방문하는 관광객들에 의해 망쳐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상툰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든다면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라면 차라리 일기장을 쓰라는 비판과 인터넷상에 남을 흔적을 피해갈 수 없다. 반면 개인의 고민을 얇게 풀어놓는다면 픽션과 논픽션이 마땅히 구분 가지 않아서 일상의 의미가 퇴색되고야 만다. 온라인 플랫폼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만큼 개인을 드러내기도 쉽지만, 개인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독자 또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일상을 녹여내는 일에서 숱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쪽이든 간에 우리에겐 ‘고민’이 필요하고, 작가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