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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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어른의 초입 1부 - 나에게 꿈을 가지게 했던 만화들

'어른'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된 시점까지 웹툰 평론가에게 영향을 미친 만화들은 무엇이 있을까

2024-02-02 수차미

[ 그림 1, 물위의 우리] 


사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당시 등교를 했더니 선생님께서 어떤 사고가 났더란 이야기를 했다. 휴대폰 사용이 금지되었기에 휴대폰을 통해 기사를 보진 못했지만, 으레 있는 부류의 사건이라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수업을 들었다. 이후 점심쯤에는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이를 따라 사건에 대한 흥미는 사라지고야 말았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들어가면서 학교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는데, 그에 대한 이유는 선생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정규 수업을 마치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선생님들은 뉴스 속의 사건을 언급했고, 좋지 않은 상황을 전달해줬다. 성공이라는 말은 손쉽게 뒤집혔고, 분위기도 그랬다. 아마 고등학생이라는 점이 무거운 분위기에 일조했을 것이다. 같은 나이 또래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이 사건은, 개인사와 연결되지 못했지만 약간의 무기력감과 소외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는 어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아이들에 했던 “미안해”라는 말은 어른의 책임과 의무를 부각했다. 해당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사회에 내려진 진단은 우리를 ‘이후’의 존재로 만들었다. 주민등록증을 막 만들면서 어른의 초입에 들었던 그 시절은 아직도 나에게 인생의 한순간으로 남아있다. 유년기의 끝에서 마주한 순간은 어른이 된 후로도 줄곧 순간을 살아가게 했다. 마치, 이후의 삶은 그저 순간에 넘겨진 전체일 뿐인 것처럼 느껴졌고 이는 살아가면서 어른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세월호 이후의 한국만화에도 그런 조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아이가 미성숙한 존재로 묘사되면서 어른으로 하여금 성장의 가능성에 대한 손쉬운 설득을 하는 반면, 이후의 맥락으로 바라본 한국만화는 아이의 순수함으로 바라본 세계를 지켜내려 한다. 이들 만화에서 아이는 유년기를 끝내야만 어른의 초입에 들 수 있다고 믿는 것만 같다. 마치 유년기를 끊어내려는 듯이 행동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인간은 유형성숙하는 동물이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인간은 어른이 되어서도 유년기의 모습을 약간이나마 갖게 되는데 이는 ‘유년기’의 연장선에서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년기의 기억은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들 한다. 모든 어른에겐 아이였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나, 어떤 면에서 어른은 그저 몸만 커버린 아이니까. 실질적으로 우리는 어른이 된 후로부터 더는 성장하지 못한 채, 유년기의 유산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결국 ‘어른’은 아이의 ‘이후’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남은 것과 그렇게 남겨져버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가 되고야 만다. 그러니 어른과 아이의 은유는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른은 아이의 연장선에 있는 존재이기에 그 안에는 변하지 않는 핵심축이란 게 있다. 이 축은 개인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어서 살아가며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예 그럴 수도 없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삶을 그만둘 정도로 무너지거나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무너지고야 말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국만화에서 ‘책임’이라는 말은 바로 그렇게 개인의 본질을 유지해가는 일을 뜻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자신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간직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바로 책임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나서 아이였던 시절을 저버리는 게 아니라, ‘이후’의 삶은 그저 유년기의 연장선에 있을 뿐임을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존재원리를 유지하려 들며, 어른에게 ‘책임을 진다’는 건 아이가 아이답게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어른이 아이의 세계를 지켜주고자 하는 일은, 아이에게 빠른 성장을 요구하면서 세상에 적응하기까지를 기다려주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서 ‘나’라는 존재를 되찾아주는 일이다. 아이에게 부족한 건 자기를 책임지는 능력이고 어른의 의무는 아이에게 그걸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세계는 어른과 분리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가 아이답게 있을 수 있는 환경을 묘사하는 일은 적어도 아이의 세계를 그려내는 일에서 필수적이다. 


 

[ 그림 2, 신도림 ]


오세형의 [신도림](2016~2022)은 ‘키즈’라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만화다. 핵전쟁으로 망해버린 세상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아이들이 있고, 이들이 특수한 힘을 얻는다는 설정이다. 키즈는 성장판이 닫히기 전의 아이들에게만 적용되어 능력을 얻는 것이 곧 성장의 완성으로 취급된다. 즉, 키즈는 성장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을 성장판이 아직 남아있어야만 등장한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작중에서 키즈의 인물소개는 키즈가 되었을 당시의 나이 옆에 (n살)이 더해진 채로 표기된다. 키즈는 성장판이 닫혔기에 더는 성장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러한 점은 작중의 아포칼립스 설정과 연계되어, 세상은 더는 나아질 구석이 없는 듯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주어진 한계와 정해진 미래를 나서보려는 이들이 있다.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지상을 되찾고, 성장의 여지가 사라진 키즈들에게서 여지를 찾아보려는 이들이 있다. 

[신도림]의 이야기는 방사능과 성장판을 하나의 기점 삼아 ‘이후’를 모색한다. 작중 무대의 주인공인 키즈들에게서 ‘당시’의 나이가 표기되는 건 사건 이후를 살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성장의 여지가 있다=미래가 있다는 점으로 생각해볼 때 성장판이 멈춘 시기인 나이와 그 옆에 덧붙여진 (n살)은 잃어버린 시간으로도 여겨진다. 이를 따르자면 키즈들은 아이일 수 있는 시기를 잃어버린 채, 아이도 어른도 아닌 시기를 살아갈 뿐이다. 키즈들은 유년기의 끝을 마주하지 못한 채 어른의 초입을 떠돈다. 어른의 통과의례를 제대로 겪지 못한 이들에게서 책임은 생존과 연결될 뿐인 가치이다. 누군가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물러터졌다”고 말하며 주인공 일행의 동료의식을 비난할 때 그는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만이 성장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건, 그만이 성장판 이전에 머무르면서, 여전히 아이이기를 택하며 유년기를 보내는 덕택일 것이다. 

힘이 곧 정의인 세상에서 아포칼립스 세계의 생존자인 키즈들은 저마다의 정의를 갖고 행동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각자의 꿈과 이상을 따라갈 뿐이기에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여기서 만화는 성장에 관한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본래의 자신을 잃지 않고자 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더 강한 힘을 추구하려 하는 적대자 총리의 모습이다. 아이의 포지션인 주인공 일행에게 성장이라는 요인이 있다면, 어른의 포지션인 총리 일행에겐 진화라는 요인이 있다. 총리는 방사능을 비롯한 기술로 불로불사와 능력의 강화를 꾀하는데, 여기서 ‘진화’라는 표현은 어떠한 단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아이의 그것과 대비된다. 먼저 진화는 이전의 자신과 이별한다는 점에서 구세계를 죽여야만 하는 총리의 입장을 대변한다. 반면 아직 유년기에 머무르는, 어떻게 보면 철없는 듯 보이기도 하는 키즈들이 더하기 (n살)로 설명되는 일은 지속가능한 세계를 꿈꾼다는 점에서 단절을 요구하지 않는다. 

작중 내외로 ‘이상한 놈들’이라는 평가를 듣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은 ‘아이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이기를 잃지 않는 일로 풀이된다. 어떤 면에서는 아이다움을 잃지 않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면서도, 그런 아이다움이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대해 묻고 싶어진다. 주인공의 적대자들은 주인공을 일행이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지만, 책임이라는 말은 자신이기를 잃지 않는 일이자 타인의 의지나 주어진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이른바 환경이 인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인간이 환경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 이야기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사회는 다름 아닌 열린 미래로써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분명 이 만화에 키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곳은 아무런 미래가 없는 것과도 같았다. 성장판이 닫힘으로써 능력이 꽃핀다는 말은 이들을 사건 이후로 내친다. 키즈는 핵전쟁이 터진 바로 그 순간에 멈춰버린 존재이며 이들 모두는 마치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성장과 진화라는 두 개 단어로 풀어가는 이 이야기에서 ‘이후’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 그림 3, 수평선]


정지훈의 [수평선](2016)은 멸망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소년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만화는 소년의 세상이 끝났다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년과 함께 있던 어머니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껏 존재해왔던 소년의 죽음이었으며, 이제것 소년이 살아왔던 세계의 끝이기도 했습니다.” 만화는 유년기의 끝을 마주한 상태로 이야기를 출발시키고 이를 세상의 종말에 빗댄다. 유년기의 끝에 도달한 아이는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 세상에 내쳐진다. 그렇지만 이때 소년은 소녀를 만난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소녀가 소년에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고 물을 때 소년은 “확실한 건, 우리는 어디로든 가고 있다는 거야.”라고 답한다. 소녀가 소년에게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묻자, 소년은 “길의 끝에는 길의 끝이 있을 뿐”이라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소년에게 답한다. 지구는 둥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종말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아이의 모습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보는 내내 위태롭다.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미 아이들의 세상은 끝나버렸다. 아이는 불현듯 세상에 내쳐졌고 이제 그들은 유년기의 끝을 마주하지 못한 채 책임과 의무가 지배하는 어른의 세상에 떨어져 버렸다. 이들은 여정에서 여러 조력자를 만나지만 그들 어른 모두가 아이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다. 그러나 작품은 ‘어른’이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책임을 보여주면서 아이가 물었던 ‘이후’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제공한다. 아이들이 걷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아이에게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기보다 책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지만 인육을 먹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형태를 벗어난 인물이 있고, 전염병이 도는 상황에서 자진하여 그룹을 떠나는 인물도 있다. 정지훈은 아이를 주인공 삼아 이를 따라가지만 아이의 관점에서 어른을 평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필진이미지

수차미

< 만화평론가> 
* 2019 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상 신인 부분 
* 2019 한국예총 평론상 영화 부문
* 2020 서울시립대 영화평론 공모전 대학원생 부문
*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 저서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포스트 시대의 영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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