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의 법칙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뉴턴의 운동법칙 중 제1 법칙은 관성의 법칙이다. 위에 서술된 원리처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방해받지 않는 한 지속해서 움직이게 된다. 이 이론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비판하기 힘들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한 개념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이론이 물리의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창작하는 창작자들의 작업환경에도 적용된다. 그러니까 뉴턴의 운동법칙은 인간의 심리적인 요인까지도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가령, 최근에 출간된 김한조 만화가의 작품 『일어나요 강귀찬』(파란 의자, 2023)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이 작품은 ‘20년 차 만화가의 밥벌이 생존기’라는 부제가 붙은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만화가 웹툰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대적인 흐름을 잘 반영해 놓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미 만화는 종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웹으로 봐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강귀찬이라는 한 만화가의 삶을 통해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잘 담아 놓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강귀찬은 웹툰 0.5세대 만화가로, 만화가 웹툰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에 가장 먼저 ‘웹툰’이 무엇인지 감각적으로 느꼈던 인물이다. 하지만 “웹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시절”(50쪽), 강귀찬은 소신을 품고 출판 만화로 승부를 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 마음은 독자들도 짐작하겠지만, 사후적으로 봤을 때 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실수는 돈벌이와 관련이 있다. 웹툰이라는 플랫폼 자체가 수많은 독자와 접촉할 수 있는 성질을 지녔으니, 돈벌이의 측면에서도 유리한 것이다. 그러니 웹툰 작가가 아니라면 아무리 재미있고 좋은 작품을 그려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 ‘작품’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규모와 속도가 다르니 김한조 만화가의 말대로 익살스럽지만, “존버를 안 해 존망”(50쪽)하게 된 것이다.
[ 그림 1, 『일어나요 강귀찬』 표지 ]
하지만 나는 김한조 만화가의 이 말이 백 퍼센트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순수하고 애정 있는 작품 자체는 온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실존적인 이야기는 교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가 과거에 만들었던 작품은 가치 없지 않다. 김한조 만화가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출판 만화를 고집했을 것이다. 나아가 오히려 동시대에는 이런 출판 만화 IP가 자연스럽게 변주될 수도 있다. 최근 웹툰 IP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지만, 비슷하고 유사한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런 가벼운 작품을 확장하기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는 숨은 보석을 찾아 확장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이유는 실존의 영역에서 거짓 없이 만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만화의 관성은 웹툰으로 흘러가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 휘어지고 쓰러지고 자신감도 점점 시들어 가는 것처럼, 하나의 신체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 역시 한번 거세게 흐름이 형성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것이 현실이다. ‘웹툰’이라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이 웹툰이라는 시공간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제약이 없다. 무겁게 책을 보관할 필요도 없고, 작은 공간에 먼지가 쌓이도록 책을 쌓아둘 이유도 없다. 때론 팔목이 아프기도 하고 스마트폰 빛으로 시력이 나빠지거나 점점 거북목이 되는 단점도 있지만, 작품을 읽는 요령이나 창작자의 수고 면에서 장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웹툰의 경우는 만화를 ‘소비’하는데 최적화된 경우라는 생각도 든다. 검지손가락으로 세로 스크롤로 당기는 방식이 뭐랄까 이전 장면들을 소거시키기 때문이다. 웹툰과 만화의 차이는 이미 너무나 많은 연구자와 만화가들이 느끼고 경험하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 새로운 것을 논하는 것은 의미 없다. 하지만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웹툰의 바람을 한순간에 멈추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웹툰의 질량 가속도는 메가톤급이니까.
많은 단점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웹툰은 흐르고 흘러 바다로 향할 확률이 높고, 웹툰을 향한 단점은 여러 연구자나 만화가 또는 평론가들의 문제 제기에 의해 수정 보완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웹툰’은 웹툰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앞서 이야기한 뉴턴의 운동법칙이다. 동시대는 만화가가 되기 위해, 또는 만화로 먹고살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는 수많은 예비 작가가 존재하고, 웹툰 IP 또한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각종 매체에서 웹툰의 세계화를 떠밀고 있으니 현시점에서 그 누구도 웹툰의 관성을 한순간에 멈추지는 못할 것이다. 웹툰 또한 수많은 단점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작은 틈일 뿐, 자생적으로 또는 수많은 자본의 힘으로 터진 근육과 찢어진 살결을 스스로 치유할 확률이 높다. 이것이 바로 관성이 힘이다. 관성은 김한조 만화가의 작품 『일어나요 강귀찬』처럼 한 개인에 의해 작동되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모여 만든 ‘시스템’에도 적용된다. 조금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공포 앞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 새롭게 불어오는 아니, 이미 커다란 진격의 거인이 된 웹툰의 메커니즘이 발전되면 발전되었지,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숙명과 관련이 있다. 웹툰은 현재 스무 살 청년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이런 시기에 웹툰만이 강성해야 할까. 웹툰을 잣대로 모든 만화를 바라봐야 할까. 하지만 이 방식도 참이 아니다. 종이로 만화(책)을 보는 세대가 가지고 있는 ‘관성’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화계에서 열심히 작품을 탐닉하는 대부분의 독자가 공감하듯이, 웹툰 시대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웹툰이 건강하고 슬기롭게 이 시대의 상처를 잘 담아내고, 재미있고 유익한 웹툰이 계속해서 발표되기를 원할 것이다. 만화계 안에서도 인정 욕망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한 걸음 물러서면 만화가 건강하게 독자들에게 다가가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바람 속에서 여전히 출판 만화나 독립만화가 종이책으로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들에게는 웹으로 만화를 보기보다는 무게 있는 출판 만화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보다 만화적으로 다가온다고 확신한다. 취향 차이이지만 취향이 본질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론가 박인하가 임재진의 입장에 동의하며 쓴 다음과 같은 구절, “페이지 만화는 한정된 페이지에 작가가 의도한 연출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칸 분할과 배치를 활용”하는 반면 “웹툰은 처음부터 한정된” 페이지가 없을뿐더러, “출판 만화의 엄격한 규칙(한 칸/ 네 칸 / 페이지)을 적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작가의 의도에 맞춰 분할된 칸을 활용(1)”한다는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발언 속에는 ‘창작-제작-유통’의 관계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만, 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그릴 때 의식하는 출판 만화의 조건이 되기도 하니 그렇다. 물론, 여기서 ‘의도’는 감각적인 것도 포함된다. 역으로 ‘만화’가 ‘웹툰’으로 변모될 때, 느끼는 이 개념은 ‘웹툰’이 ‘출판 만화’로 변모될 때 신경 써야 하는 부분과 다르지 않다. 그 역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니 그렇다. 아무리 웹툰에서 성공했을지라도, 출판 만화로 옮겨 놓으면 싱겁게 느껴지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가 출판 만화에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면, 독자들은 냉정하게 떠날 것이다. 그러니 웹툰은 웹툰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기는 것이고, 역으로 출판 만화는 출판 만화대로 서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 그림 2, 이대미 작가의 『비우』와 최근 작업하고 있는 웹툰 〈너라는 발견〉]
하지만 웹툰이 웹툰으로 남아있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웹툰이 웹툰으로 남아 있다면 종이로 만화를 탐닉했던 많은 독자는 접근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서도 나의 작품이 웹툰 독자들에게만 소비된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인가 아쉬울 수 있다. 작가들의 소망이 무엇이겠는가. 공들여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은 자식과 같은 작품이 특정한 세대에 국한해 읽히기보다는 다양한 세대의 독자들에게 인정받고 공감받기를 소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웹툰 작가들은 종종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출판 만화의 형식에 기대어 제작하게 된다. 그때부터 페이지 읽기와 칸과 칸 사이의 유기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시공간에서 자유로웠던 웹툰의 형식을 밀어내고, 어느 정도 제약과 한계가 존재하는 출판 만화에 애정을 쏟는다.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솔직한 이야기는 동시대의 현역 만화가들의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 웹툰의 출판 만화‘화’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다. 현역 작가들의 목소리로 창작자의 입장과 작업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헤아려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평론가가 시대 흐름과 관련해 여러 지점을 짚어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아쉽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과정을 돌파하기 위해 『비우』(미메시스, 2016)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몸이 아파 『비우(2)』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하진 못했지만, 너무나도 다행히 〈너라는 발견〉(2023~)(3)이라는 제목으로 네이버 웹툰에 도전해 발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첫 장면을 생각하며 이대미 작가의 출판 만화 시절과 웹툰 만화 시절이 지금은 어떤 면에서 다르고 어떤 면에서 같은지, 어떤 점에서 아쉽고, 어떤 지점에서 편한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이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단순히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담는 것이 아니다. 출판 만화를 성공적으로 잘 마친 예술가가 웹툰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지에 대한 고군분투의 과정일 것이다. 앞서 김한조의 만화 『일어나요 강귀찬』과 과도 만나는 지점이 있어 즐겁고 흥미롭게 이 작업을 이행해나갈 수 있겠다. 만화를 평론하는 사람보다는 만화를 직접 그리는 만화가가 보다 피부에 와닿게 이야기해 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 공감하기에 이대미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듣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아담하게 적어나가기로 했다.
이대미 작가는 내게 ‘매체’가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에 엑센트를 넣었고 말을 이어 출판 만화의 경우,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과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편의 시(詩)와 비슷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판형에 따라 다르지만, 한정된 공간(판형)에서 나의 의도를 내밀하게 녹여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웹툰의 형식을 무시하자는 발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출판 만화’와 ‘웹툰’의 매체 차이를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세로 스크롤이 가진 공간 자체가 하나의 세계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차이와 특이점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 것이다. 덧붙여서 자기 작품을 유통하는 방법도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당대의 웹툰 작가들은 “경제적인 활동 따위를 대행해” 주는 회사에 들어가 자기 작품을 어떻게 유통할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출판 만화의 경우, ‘원고 투고’라는 시스템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방식보다는 에이전시(agency)에 작가들이 의존하는 분위기가 짙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작가들은 이런 여러 다양한 시스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유통하고, 만화를 그리는지 연구하는 만화가들도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대미 작가의 『비우』를 굉장히 좋아했던 한 명의 독자로서 웹툰 〈너라는 발견〉을 통해 좋은 작품을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이 작품이 책으로 출간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연출이 달라지고, 작가의 의도가 반영될 것인지 셈해보는 것은 서로 다른 매체 환경 차이에서 발생하는 작가의 의도를 놀이의 차원에서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원고의 처음 청탁 주제인 ‘웹툰 단행본,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출판 만화와 웹에서 펼쳐지는 세로 스크롤(scroll) 만화인 웹툰이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형식을 지니고 있으니, 예비 만화가들은 서로 다룬 이 두 환경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성세대의 경우, 이미 출판 만화를 경험했으니 출판 만화를 연습할 필요가 없다. 과거 그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환경 자체가 하나밖에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절박하게 연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대에 출현하는 신세대들은 앞으로 출판 만화의 창작환경 또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출판 만화의 독자 또한 지독한 ‘관성’의 힘으로 여전히 만화책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웹툰의 세계가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만화의 세계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예비 만화 지망생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시대에 출현하는 웹툰 출판 만화가 이미 독자들에게 웹툰으로 인기를 얻은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웹툰 출판 만화는 ‘작가’를 발굴하진 않는다. 이미 주어진 경쟁체계에서 작품을 선별할 뿐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정말로 작가를 위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일부 웹툰의 이야기가 단선적인 스토리텔링에 그친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그룹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AI가 통계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의 창작가가 오랜 시간 살면서 겪고 견딘 시간의 흔적을 바탕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 또한 무조건 옳다고 볼 수 없지만, 이야기를 기계로 찍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오판은 만화계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출판 만화 역시 보장된 인기 작가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들을 찾아야 하고 만화영상진흥원은 이런 출판사와 작가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그럴 때 예비 작가들 또한 웹툰에 실린 자기 작품을 출판 만화로 변주할 때, 탄탄한 출판 만화 환경 속에서 그들만의 리듬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나는 이대미 작가의 『비우』에서 어린 소녀 비우가 언니의 숨겨진 비밀을 이해하고 난 후, 자신을 냉정히 쳐다보게 되는 순간을 작가의 허락을 받고 인용하기로 한다. 웹툰이라는 새로운 매체에서 작가는 〈너라는 발견〉을 통해 어떤 작품을 선보일까. 2016년에 출판된 작품에서 선보인 따뜻하면서도 잔잔한 감정선을 웹툰에서도 성공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이것은 독자의 욕심일까. 그리고 그 작품이 다시 출판 만화로 선보인다면 어떤 표정을 지닐까.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 명의 독자로서 여러 매체에서 발생하는 장단점을 즐겁게 탐닉할 수 있을 것 같다.
만화는 무엇인가.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잔잔한 깨달음과 소중함을 만화의 형식으로 안겨주는 장르이지 않겠는가. 나는 한 명의 만화가에게 이런 마음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이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다. 이제는 출판 만화가 아닌, 웹툰의 형식에 자기 몸을 싣고자 애쓰고 있는 모든 만화가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이 웹툰으로 자기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벌면서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만화계는 이 바람에 담긴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 차례다. 이 과정에 대한 고민이 웹툰을 출판 만화로 변주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역으로 출판 만화를 웹툰으로 반복하는 것과 멀리 있지 않다.
< 각주 >
(1) 박인하(외), 「웹툰의 정의」, 『웹툰입문』,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31~22쪽.
(2) 독자들을 위해 이대미 작가의 『비우』 인터뷰 [이해가 아닌 깊은 이해]를 옮겨 놓는다.
- http://www.munhwada.com/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68
- http://www.munhwada.com/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69&ps_mode=modify
- http://www.munhwada.com/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70
- http://www.munhwada.com/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71
(3) 이대미 작가의 〈너라는 발견〉은 연재 중이지만, 작가의 말처럼 재정비 중이어서 작품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공개되던 당시 바닷가 풍경을 그려 놓은 이대미 작가의 감각은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다. 영화적 요소는 세로 스크롤의 장점이지 않겠는가. 여하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너라는 발견〉의 줄거리를 기술해 보자.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작가의 꿈을 포기, 고향으로 돌아와 삶의 방향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은수. 옛 연인, 태오. 그가 나무가 되었다! 그의 삶의 여정을 쫓으며 발견하는 지평선 너머 혼의 신비와 그 기적의 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