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고 조아리며) 선생님, 헬레나 대신에 저를 데려가십시오! 저는 헬레나와 똑같이 만들어졌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재료로 말입니다! 제 목숨을 대신 가져가세요, 선생님! (재킷을 열어 가슴을 보여준다.) 여길 자르세요, 여길!(1)”
우리는 늘 기술에 목말라한다.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것에 미래를 건다. 그래서 인류는 늘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고 세우고 부서뜨렸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신(神)을 찾기 위해 노력하듯이 새로운 기술을 구원의 대상처럼 쳐다본다. 미래를 걸 새로운 대상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죽지 않는 존재를 상상하자. 죽지 않는 드라큘라 수집가가 자신의 방에 있는 인류의 모든 발명품을 나열한다면, 각각의 시대마다 자랑하고 확신했던 인간의 획기적인 기술이 상품처럼 전시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기술을 바라보며, 조금은 서툴고 투박하지만 지혜로운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전시된 것들이 낡은 것으로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인류에게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품이 등장할 때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놀랐고, 새로운 기술로 인해 이곳의 패러다임이 수정되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예를 들어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자(文字)와 인쇄술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지금 내가 쓰는 문자의 경우도 ‘한글’이라는 발명품이다. 이렇게 내 생각을 ‘한글’이라는 발명품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마법과 같은 것이다. 인쇄술은 어떠한가. 지금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지만 인쇄술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책이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에 혁명을 경험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겠다.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발명품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하지만, 이 기술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매우 놀랐고, 일부의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삶의 패턴이 바뀐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웹툰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할 무렵, 그 누가 핸드폰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만화를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이처럼 발명품은 생활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 그러니 어느 한 특정한 ‘기술’은 우리들의 삶을 회전해 놓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역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적고 있다. 물론, 단점도 모순도 부조리도 동시에 발생하겠지만, 주류 담론으로 인식되는 순간 여리고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은 하나의 기술이라는 개념을 넘어 ‘믿음’의 형태로까지 확장된다. 요즘 뜨겁게 이야기되고 있는 AI 기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만화계에 있기 때문에 ‘만화’와 관련해 AI의 쓸모와 우려만을 생각하겠지만,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흔적은 만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술은 물론 문학, 음악, 요리,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히 적용된다. 따라서 동시대는 인공지능 기술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의가 여러 방면에서 이어지고 있고, 이 기술의 수직적인 발전으로 인해 윤리적인 측면까지 동시에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림 1, VR 기술의 도움으로 딸과 재회하는 엄마의 모습 ]
최근에 인공지능 기술과 관련해 영상 몇 개를 시청했다. 조회수가 2023년 11월 현재 3,536만 회에 달하는 〈VR 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2020)가 그중 하나다. 이 영상에 대한 방송국 측에 기획 의도와 소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기억 속, 그리운 누군가가 있나요?
네 아이의 엄마였던 장지성 씨는 3년 전 가을, 일곱살이 된 셋째 나연이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오늘 VR(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나연이를 다시 만난다.
과연 엄마는 나연이를 놓아줄 수 있을까?
이 문구를 보면 한 엄마가 사랑하는 아이를 잃었고 오래도록 가슴 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시대의 기술은 이 빈틈을 채워준다. 물론, 환상이고 가상의 한 형태이지만 엄마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딸 나연이의 숨결과 손길을 만져본다.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의 두 눈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그 증거다. 눈물이 기술의 놀라움을 증명한 것이다. 굳이 기술의 진보적인 측면을 논하지 않더라도 장지성 씨의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켰다. 그러니 그 누가 기술의 쓸모 없음을 논할 수 있으며, 기술의 진보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기술에 선의가 있을 때, 기술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이 영상은 엄마가 딸 나연이를 재우면서 끝이 난다. 이 과정은 애도의 과정이기도 하다. 엄마 입장에서 예쁜 딸이 편히 잠자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안심이 놓이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눈물은 기술의 진보를 우려하지 않는다.
[ 그림 2,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 ]
또 다른 영상은 가수 터틀맨(임성훈)을 기억하고자 한 영상이다. 2023년 11월 현재 조회수 1,179만 회이다. 이 영상은 Mnet에서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다. 〈거북이〉 멤버 금비와 지이 그리고 고(故) 터틀맨이 함께 기술의 도움을 받아 2020년 촬영되었다. 무대에서 선보인 노래는 원작자인 가호의 노래를 박성일이 편집하고 〈거북이〉가 노래 부른 밝은색 톤의 곡 〈새로운 시작〉이다. 노래와 함께 “그냥 저희 노래를 듣고 여러분들이 즐겁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라는 구절이 흘러 지나간다. 이 영상을 보는 가족들과 관계자는 눈물을 흘리며 지금, 이 계절에 없는 터틀맨을 그리워한다. 오랜 시간 그룹 〈거북이〉를 사랑하고 잊지 않았던 팬들은 그때 그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와 다시 조우하게 된다. 이 영상 또한 기술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 나게 만든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계절에 터틀맨은 돌아올 수 없지만, 그가 내 곁에 잠시나마 머물러 있어 줄 수도 있음을 기술은 펼쳐 보인 것이다. 올해가 2023년 11월이니 이 영상을 위해 사용된 기술은 더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눈물’의 농도는 더 짙게 흐를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VR이나 음악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술의 영역도 그렇고 문학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문학의 경우 이미 인공지능이 시를 쓰고(2) 있고 인공지능이 작가들과 협업한 작품(3)이 출간되기도 했다. 나아가 2023년에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시와 소설을 쓸 수 있는 책까지 소개(4)되고 있으니, 인공지능 기술은 피부 속 깊이 침투한 셈이다. 실제로 몇몇 중고등학교에서는 창작 수업에 인공지능이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여러 가지로 쓸모 있는 발명품임을 의심할 수 없다.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 화가들이 당혹했던 것처럼 동시대의 예술가들이 여전히 ‘불안’의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카메라의 발명으로 인해 회화의 표정이 변주되기도 했고, 일부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발명품으로 사진 예술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나가기도 했으니 말다.
하지만 이런 쓸모와는 별개로 인공지능 기술만이 가지고 있는 단점도 있다. 가령,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적 ‘잣대’를 검열 없이 통과한 사례가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제이슨 앨런(Jason Allen)이 디지털아트 및 디지털제작 사진(Digitally-Manipulated Photograohy) 부문에서 인공지능이 창작한 그림으로 입상해 인간의 잣대를 허물어 버린 것이다. 인간이 만든 평가 잣대를 다른 ‘종족’이 개입해 상을 받아 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처럼 인간이 만든 잣대를 보기 좋게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인간만이 예술이나 놀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믿음이 보기 좋게 깨졌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불안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3년 6월 5일 JTBC에서는 〈이 웹툰 안 보겠다〉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제작자 측에서는 “창작 아닌 마무리 보정에 AI를 활용”했을 뿐이라고 강조했지만, 많은 독자는 이 작품을 보지 않겠다고 보이콧(boycott)했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 발생한다. 국내의 웹툰 세계를 모두 장악한 네이버와 카카오가 독자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웹툰 공모전에서 AI 활용을 금지한 것이다.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은 철학자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이 긴장감 속에서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이론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엇갈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주인의 경우 평소에 노예가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예에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주인을 따를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주인 곁에 있다면 주인은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사실상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오래도록 진정한 주인 행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일어난 보이콧 운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네이버와 카카오라는 거대한 플랫폼이 AI 웹툰을 공개했을 때, 많은 독자가 원하지 않자, 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은 권력이 역적 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거대한 플랫폼이 오랜 시간, 자신들이 마치 웹툰의 주인공처럼 행사했던 것이 수정된 것이다. 플랫폼의 경우 독자가, 행인이,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쓸모없어진다는 것을 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텅텅 빈 공간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니 웹툰과 관련된 인공지능에 대한 이런 사건은 창작자나 웹툰 관계자들이 주시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해프닝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런 현상을 잘 묵도하고 있다가 언젠가는 의미를 변주할 필요가 있겠다. 즉, 만화의 주권과 권리가 독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평론가 입장에서 독자의 견해만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만화의 주권이 만화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독자에게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지성은 우리 만화를 지킬 수 있게 해준다.
[ 그림 3, AI 웹툰 보이콧 운동 ]
인공지능과 관련해 새로운 논의는 앞선 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의 측면은 나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니, 평론가 입장에서 알 길이 없다. 개발되거나 소개될 때 이런 기술이 나왔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 기술과 관련해 만화와 관련된 글도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주제로 다뤄지는 글이 대중들이 알고 있는 선에서 소개되는 듯도 하지만 경청해야 할 것은 있다. 첫째로 효율을 극대점으로 생각해 볼 때, 자신만의 스타일(5)을 인공지능에게 학습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 지점은 중요하다고 본다. 둘째로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만화를 검열 없이 공개적으로 볼 수 있는 플랫폼(AI 코믹 북스, AI 코믹스, 롤(LOOL))을 소개해 준 글(6)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독자들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앞서 보이콧 운동으로 인해 인공지능 웹툰을 보는 것이 힘들 상황에서 인공지능 웹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어느 한 만화가는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기성 만화가들이 한동안 앞설 수 있다(7)”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현재 사용하고 최신 기술들을 숨기지 않고 공유한다. 밑그림을 그려주는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해 주는 ‘챗GPT’, 자료 정리와 함께 중요한 부분을 묶어주는 노션(Notion) 등의 기술이 그것이다. 이런 기술을 소개하면서 인공지능 시대의 만화가는 영국의 산업혁명 시절의 노동자와 닮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사라졌어도 또 새로 생긴 일자리도(8)” 생겼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특별한 재주를 가진 극소수의 기능공은 장인 또는 예술가 대접을 받으며 ‘전통 문화 장인’으로 살아남았다. 반면에 대부분의 기능공은 일을 더 하고 돈 덜 받는 기계 시대의 노동자가 되었(9)”으니, 만화가도 과거의 이런 사례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화가는 유행에 긴장하되 목을 맬 필요가 없음을 넌지시 내비친다. 이것은 만화가의 ‘긍지’이기도 하겠다. 만화가의 ‘긍지’는 예술가의 긍지와도 만난다.
위의 글에서는 동시대의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는 점과 세상은 변화에 발맞추어 일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질 테니,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장인’이 대접받았다는 구절에서는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는 명품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의 선전(善戰)을 꿈꾸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또다시 기술 발전으로 인해, 만화는 새로운 표정을 찾게 될 수도 있다. 이 내용 또한 발터 벤야민이라는 문예 비평가의 입장에 기대어 설명된 것이지만, 현역 만화가의 입장을 통과해 이야기된 지점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것들을 제공한다.
코로나 시작 시기가 생각난다. 코로나가 무섭게 번지던 시기 어떤 사업은 하향했지만, 어떤 사업은 상승했다. 이처럼 각각의 시대마다 기회와 위기와 공포가 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니 급박하게 변하는 흐름에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이런 흐름 자체는 지나치게 ‘기술’만을 앞세우는 것은 아닐까. 자신과 닮을 AI를 만들어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기술을 통해 동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기지만, 무엇인가 기술의 진보를 쫓아가야만 한다는 뉘앙스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 필자들이 기술만을 응시하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변화하는 시대에 기술의 흐름과 쓸모를 진단해 보자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무엇인가 조금은 더 이야기해야 할 듯하다.
[ 그림 4, 캉탱 쥐티옹의 『꽃은 거기에 놓아 두시면 돼요』 표지 ]
최근에 출간된 캉탱 쥐티옹의 『꽃은 거기에 놓아두시면 돼요』(바람북스, 2023)를 읽었다. 죽음과 관련된 주제였고, ‘늙음’이라는 실존적인 무게와도 관련이 있었다. 나이가 들고 약해져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노인들은 요양원에 방문해야 했고,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 에스텔은 수많은 어르신의 임종을 시켜보며 이들이 편히 갈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헛소리하며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더라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 환상 속에 기꺼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노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에스텔처럼 잘 들을 수 있는 능력(10)을 갖춘 존재들은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포기한 채 환상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걷는다. 일부의 독자들은 인공지능과 관련해 ‘죽음’이라는 키워드와 ‘늙음’이라는 키워드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죽음을 응시하는 것과,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인공지능에게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당대의 인공지능 기술 관계자들은 인공지능에게 ‘죽음’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침묵의 세계』에서 막스 피카르트가 당대는 ‘죽음’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11)했었는데, 이 말처럼 동시대의 사람들은 ‘죽음’을 응시하지 못해서 인공지능에게 알려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고 해서 ‘죽음’ 자체를 일부의 독자들은 굉장히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죽음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의 언어를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삶과 죽음은 기표가 다를 뿐이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오해와는 무관하게 인공지능에게 죽음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고, 유한성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할 필요가 있다. 만화계에서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을 학습시켜 〈인공지능 이현세〉를 제작한다고 한다. 이현세 또한 노장의 만화가로서 죽음을 응시하지 않을 리 없고, 그런 마음이 작품에 녹여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기계가 이런 미세하지만, 중요한 요소를 알고 있을까. 인공지능에게 이현세의 만화를 학습시키는 기술자들은 죽음의 변증법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 작업을 이행하고 있는 것일까. 확신할 수 없다. 기술자들은 어쩌면 오로지 동시대의 헤게모니를 획득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 이현세〉가 죽음을 응시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이현세를 닮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만화를 그리는 것과도 만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죽음을 가르쳐 주는 인공지능 기술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윤리적인 행위이니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술 전쟁 시대에 윤리적인 지점을 제시할 수 있겠다. 인간은 영생을 꿈꾸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학습된 인공지능이 영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곁에는 명작이 있다. 명작은 고전으로 남아 반복된다. 하지만 명작을 쓴 저자는 계속해서 생산해 내지는 않는다. 즉, 끝이 있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인공지능 글이 쏟아지고 있다. 짧은 나의 글도 그런 글 중에 하나이겠다. 하지만 내 글이 다른 것이 있다면, 인공지능은 죽음을 학습할 필요가 있고, 이런 죽음도 인공지능에게 학습시켜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을 상징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겠다.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새롭지도 않은 다소 지루한 터널을 통과해야 했나 보다. 처음으로 ‘로봇’이라는 단어를 쓰고 이 제목으로 희곡을 쓴 카렐 체페크는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인한 노동의 문제를 다룬 첫 작가이다. 그는 작중 인물을 통해 대리자의 신분으로 말한다. “저는 헬레나와 똑같이 만들어졌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재료로 말입니다! 제 목숨을 대신 가져가세요,”라고 말이다. 로봇이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게 한 이 말은, 자신을 학습 시켜준 인간에게 하는 말이다. 언젠가 먼 훗날에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 등장하는 리플리컨트처럼 인간의 말에 불복종하는 존재가 나타날까. 만약 이런 존재가 나타나더라도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면, 조금은 더 유익한 미래가 펼쳐질 것 같다. 다소 낭만적으로 글이 쓰였지만, 기술과 과학은 늘 미래와 함께 걸어가니, 글도 미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낭만은 아름다운 것이겠다.
< 각주 >
(1) 카렐 차페크, 『로봇』, 김화숙 옮김, 모비딕, 2022, 178쪽.
(2) 슬릿스코프, 카카오브레인, 『시를 쓰는 이유』, 리멘워커, 2022.
(3) 김유림 외 그리고 산, 『9+i』, 블루버튼 2022.
(4) 아트 엔지니어, 『챗GPT와 함께하는 시 창작』, 다른, 2023.
노라 리, 『챗GPT와 함께하는 소설 창작』, 다른, 2023.
(5) “지금까지의 기존 AI모델들은 다양한 스타일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창작의 본질은 개성과 독창성에 있다.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AI에 학습시켜 개인화된 AI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작가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AI의 편리함과 다양성을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김한재, 「AI의 만화 생성 어디까지 왔나」, 『지금, 만화』 19호, 팬덤북스, 2023, 16쪽.
(6) “AI 코믹 북스는 AI를 활용해 만든 최초의 만화책인 〈베스티어린 연대기〉(The Bestiary Chronicles)〉 시리즈, 저작권 분쟁 논란이 있었던 〈여명의 자리야(Zarya of the Dawn)〉 등의 유명 AI 코믹북을 서비스하는 해외 플랫폼이다. …(중략)… 2023년 이후 국내에도 AI를 통해 생성한 이미지를 전문적으로 업로드하는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AI 코믹스는 국내 최초 AI 만화 창작자 커뮤니티라고 소개하고 있는 AI 이미지 커뮤니티 플랫폼이다. …(중략)… 롤(LOOL)은 한국어와 영어를 지원하는 ㈜빌리버의 미국업인 LOOOL INC의 AI 웹툰 플랫폼이다” 백종성, 「AI 그림과 웹툰 플랫폼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가?」, 『지금, 만화』 19호, 팬덤북스, 2023, 21~26쪽.
(7) 김태권, 「나는 AI로 이렇게 만화를 그린다」, 『지금, 만화』 19호, 팬덤북스, 2023, 28쪽.
(8) 위의 글, 35쪽.
(9) 위의 글, 35쪽.
(10)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부인의 ‘공상’이야말로 그분에겐 현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사실 공상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아내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추억이든, 그림이든, 책이든... 아니면 게임일 수도 있고, 평생 품었던 꿈일 수도 있습니다. 부인은 그걸 현실로 삼으신 겁니다. 그러니 부인이 볼 때 망상 병자는 우리겠죠. 어쩌면 떠올리지 않고 싶으신 걸 수도 있습니다. 그걸 제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누구도 할 수 없죠. 이곳에 입소하신 분들의 대다수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만 살고 계시죠. 모두 잊고 사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꾸며내는 분들도 있죠. 어찌 됐든 간에 그분들에게는 기억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거죠. 저는 간호사로서 제게 맡겨진 사명이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실과 망상 중 무엇이 고통을 주는지 파악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 말입니다.” 캉탱 쥐티옹, 『꽃은 거기에 놓아두시면 돼요』, 오승일 옮김, 바람북스, 2023, 156~157쪽.
(11) “언어 속에는 또 하나의 침묵,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동적인 어떤 것일 뿐이다. 즉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중지, 그 최후의 끝일 뿐이다. 다 비워버린 생명 ―그것이 오늘날의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그렇게 죽음을 당했다.”(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 까치, 2013,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