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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사라진 판타지 세계

<성검전설>과 <여고생 드래곤>으로 보는 요즘 판타지

2024-03-25 주다빈

근 몇 년간 웹툰 시장에 판타지물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왔다. 웹툰의 태동에는 일상물이 있었다. 많은 만화가는 자신의 일상을 소재로 한 웹툰을 만들었다. 네이버 웹툰의 가장 초기에 있었던 조석 작가라든지 <낢이 사는 이야기>의 낢 작가, <나이스 진타임>의 나이스진 작가 등등 많은 생활툰 작가가 네이버 웹툰의 태동에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상대적으로 독자의 진입 장벽이 낮은 생활툰으로 웹툰에 모여든 독자들은 플랫폼 안에서 작품을 탐색하며 읽을거리를 찾아냈다. 이후 많았던 생활툰 작가들은 플랫폼 연재에서 인스타로 생태께를 옮겨갔고 그 공백을 다양한 장르의 웹툰이 강세를 보이며 메꿨다. 물론, 이후로도 <대학일기>나 <모죠의 일지>처럼 계속해서 인기작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이전만큼 주류 장르로 인식되며 여러 작품이 연재되고 있지는 않다. 그렇게 한번 시대가 바뀌고 한참 동안 박태준 작가의 <외모지상주의>로 대표되는 학원물이 가장 많이 연재되었다. 그맘때쯤 여러 웹툰 플랫폼이 갖고 있던 스토리 IP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시작했고 각 플랫폼은 순수 스토리 IP를 확보하는 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아낸 이야기 화수분이 웹소설이었다.

그러면서 웹소설에 엄청난 세간의 관심이 몰리고 있는데 웹소설은 이전에 인터넷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PC통신 시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 특히 이렇게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었던 소설들은 주로 판타지, SF, 추리 소설처럼 순수문학과는 달리 조금 더 재미 추구적인 장르문학이었다. 특히 국내 웹소설 시장에서는 여러 장르문학의 가지 중, 판타지물이 가장 많이 집필되었다. 그렇기에 웹소설의 웹툰화가 분주하게 일어나는 과정에서 웹툰 시장에 엄청난 물량의 판타지물이 공급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특히 카카오페이지의 경우 판타지 웹툰 유통에 집중하면서 카카오페이지=판타지물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나 혼자만 레벨업>, <상수리나무 아래>와 같은 유명 판타지 웹툰이 등장하며 새로운 부흥기를 맞았다. 이렇게 웹툰 시장에 등장한 대부분의 판타지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그림체와 엄청난 배경 묘사로 많은 팬을 끌어모았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판타지물이 쏟아지자, 장르 간의 유사점을 찾기도 쉬워졌다. 판타지물의 대부분은 본격적인 스토리 전개에 앞서 정해진 규칙처럼 판타지 세계관을 설명함으로써 현실의 독자를 이세계로 끌어들이곤 했다. 독자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배경이 군주제인지 공화정인지 또 동양풍인지 서양풍인지 등을 이해한 뒤 본격적인 사건을 읽어나갔다. 이러한 쿠션 덕에 독자는 웹툰의 주요 사건에 더욱더 몰입하거나 사건의 맥락을 짚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규칙처럼 느껴졌던 판타지 장르의 스토리 전개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할 글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게 된 계기를 최근 인기작인 <성검전설>과 <여고생 드래곤>을 통해 논해보고자 한다.


<성검전설>과 <여고생 드래곤>의 본격적인 스토리를 논하기 전 주인공과 주변 인물을 먼저 짚어보고 가야 할 듯하다. <성검전설>의 주인공인 존 나르센은 이름부터 웃음을 자아낸다. 한국인이라면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존나 센’을 서양 판타지물 스타일로 변형시킨 이름으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이름은 주인공의 가장 큰 특징이면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 나르센은 금발의 백인 남성으로 묘사되는데, 현재에 와서는 인종의 다양성을 위해 다인종의 히어로들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슈퍼맨, 베트맨처럼 고전 히어로들은 백인 남성으로 대표됐던 것을 연상시킨다. 특히 중장발의 금발 머리는 마블 히어로 중 한 명인 토르와 굉장히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여고생 드래곤>의 주인공인 여고생의 이름은 김민지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인 데다가 주변에 한 명쯤은 있는 이름인 ‘민지’로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갖고 있다. 다만 드래곤이 나오는 이세계물에서는 흔히 등장하지 않는 이름으로 오히려 여기에서 발생하는 간극으로 ‘김민지’라는 이름이 독특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각 웹툰의 주인공 이름뿐만이 아니다. <성검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매우 직관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이름 없는 자가 소환한 사신의 이름은 스아신, 숲속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거대 곰의 이름은 고므 등 대부분 이름 그 자체가 캐릭터의 특징과 연결된다. <여고생 드래곤>은 <성검전설>처럼 이름 자체가 캐릭터의 특성을 나타내지는 않으나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이용한다. 스토리 내에서 등장 비중이 큰 캐릭터의 이름은 ‘스미스’이고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전형적인 오타쿠 외형을 한 인물의 이름은 도미니크다. 판타지 장르에서 주인공은 대체로 뜻깊거나 멋진 이름을 부여받았던 것과 상당히 대비되며 한편으로는 성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두 작품은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기존의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를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림 1, 자신을 소개하는 주인공들 좌) <성검전설>, 우) <여고생 드래곤> ]


이세계에도 통하는 현실 개그

이 두 작품은 그런데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성검전설>의 경우 2022년 지상최대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네이버웹툰에서 정식 연재를 하게 된 작품이다. <여고생 드래곤>의 경우 연재의 배경이 <성검전설>에 비해 더욱 흥미롭다. 작가인 땅콩은 2020년 디시인사이드의 갤러리에 3화까지의 작품을 업로드 했고 엄청난 관심을 받았었다. 이후 사람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을 연재하지 않았는데 돌연 2021년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다수의 독자는 기존에 제작되어 오던 판타지물과 크게 다른 두 작품을 선택했고 결국엔 정식으로 플랫폼 연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스튜디오 방식이 주가 된 지금의 웹툰 시장에서 개인 작가들이 정식 연재를 따내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두 작품의 연재는 값진 결과였다. 이 두 작품의 연재는 독자의 선택이라는 단순 ‘운’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작품이 연재되던 시기에 두 작품이 필요했다는 필연적인 느낌이 있다. 남은 지면에서는 각 작품을 가볍게 둘러보면서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풀어내고자 한다.

그런 생각이 들게 된 이유 중 첫 번째로는 판타지가 익숙하지 않았던 독자와 판타지 애독자 사이의 중간 단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꼽고 싶다. 장르문학으로서 판타지의 경우 오랜 시간 하위문화로 소비되며 두꺼운 팬층을 가진 한편 새 독자가 유입되는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았었다. 판타지 문학을 읽는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 사이의 간극은 그렇게 묵혀온 시간만큼 벌어졌다. 물론 굳이 서로 다른 양극단에 있는 독자를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플랫폼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판타지 장르에 관심이 없던 독자가 판타지 장르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높은 클릭 수는 곧 이윤으로 돌아온다. 즉 독자가 장르 편식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개그는 물론 많은 만화가들 사이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로 여겨지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독자를 한 번에 끌어안을 수 있는 분야이다. <성검전설>이나 <여고생 드래곤>의 경우 스토리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시공간적 배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꼭 판타지 속 배경을 이해해야만 웃기는 개그가 아니다. 판타지 세계는 단지 개그를 더욱 웃기게 만드는 요소 정도로 작동한다. 따라서 판타지물이 친숙하지 않은 독자 역시 어려움 없이 웹툰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그렇게 작가는 개그 소재를 내세워 더 넓은 독자층을 포섭할 수 있다. 이렇게 모여든 독자는 이 작품을 계기로 또 다른 판타지 장르 작품을 탐색하게 될 테니 플랫폼은 자연스럽게 판타지 장르의 새로운 독자를 확보할 발판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판타지물이 요일 목차에 올라오는 만큼 기존에 판타지물을 즐기지 않았던 독자라도 한 번쯤 다른 작품을 고려할 넛지를 만든 것이다.

둘째로는 앞선 이유와 완전히 다른데, 이미 독자들이 판타지에 충분히 혹은 과하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좋은 쪽의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많은 양의 판타지물이 연재되고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세계관을 설명해 가며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독자들은 이미 여러 종류의 판타지를 읽으며 1화부터 사건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을 만큼 판타지 장르에 대한 배경지식을 길렀다. 그렇기에 평범한 여고생으로 자신을 소개한 주인공이 바로 다음 컷에서 도마뱀이 되어도 여고생이 이세계의 드래곤과 영혼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뚱딴지 같은 소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즉 판타지물을 읽으며 쌓아 올린 정보를 조합하여 스스로 작품의 전반적인 세계관을 추측하여 작품을 읽어나간다. 한편 한 장르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독자들이 해당 장르에 따분함을 느낀다는 쪽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아 온 장르인 만큼 이미 많은 클리셰가 사용되어 왔기에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의 경우 이미 전체 줄거리가 흘러갈 방향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말로 ‘환생 트럭’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아마 <성검전설>의 첫 화를 읽던 독자들은 비장한 모습의 용사가 등장한 모습을 보며 몇 컷의 엄청난 액션 컷을 지나 마왕을 쓰러뜨리고 전설로 구전되며 시작될 이야기를 상상했을 것이다. <성검전설>은 마치 기존의 판타지물을 지향하는 것처럼 초반에는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며 공고한  한 컷 한 컷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이내 용사가 마왕과의 전투를 앞두고 성검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으로 앞서 신중히 쌓아 올린 긴장감을 순식간에 끊어내며 독자에게 반전 재미를 가져왔다. 이 작품의 재미는 판타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느껴질 개그 요소가 가득하다. 이렇듯 두 웹툰은 기존 판타지 장르에 염증을 느낀 독자에게 오히려 새로운 재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 그림 2, 개그 요소가 가미된 액션 좌) <성검전설>, 우) <여고생 드래곤> ]


이렇듯 작품을 읽으며 판타지 장르의 새로운 독자 모집과 판타지 장르의 환기라는 큰 틀에서 두 작품이 연재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나름의 문장으로 풀어내 보았다. 물론 두 작품의 연재 시기가 약 1년 정도 차이가 나며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때에 두 작품을 함께 묶어 ‘요즘 판타지물’이라 부르기엔 너무 오랜 기간이 함께 묶인다는 반론이 생길 수 있겠다. 한국 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만화 웹툰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웹툰 독자들이 주로 즐겨보는 웹툰 장르의 1위는  코믹/개그였으며 판타지는 3위에 그쳤었다. 그러나 2023년에 발행된 실태조사에 따르면 두 장르가 반전되어 1위에 판타지가 3위에 코믹/개그가 위치했다. 1년간 판타지 장르의 독자가 많이 증가했고 이 변화의 과정에서 두 작품이 있었다. 또 기존의 클리셰를 따르는 판타지물이 많은 구독자를 끌어모으는 때에도 개그라는 소재를 잘 활용한 두 작품이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공유하는 동질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싶다.

물론 이 두 작품 사이에 차이도 존재한다. 앞서 연재되었던 <여고생 드래곤>의 경우 그림체나 전반적인 스토리 전개 방식에 있어서 판타지보다는 개그물에 가까워 보인다. 또 인물들의 엉뚱한 대사나 행동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반면 <성검전설>의 경우 그림체나 큰 스토리 줄기는 기존의 판타지물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이러한 관례를 파괴해 독자의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웃음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판타지물이기에 두 웹툰의 개그가 더욱 웃기게 느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판타지물이 웹툰 독자들이 주로 즐겨보는 장르 1위를 지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2021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21’을 펴내며 키워드로 ‘카우보이 히어로’를 언급한 적이 있다. 소비 흐름이 빠르게 변모하는 만큼 그 소를 통제할 카우보이의 중요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였는데 고작 1년 만에 즐겨보는 웹툰 장르가 변한 것을 보면 웹툰 장르의 트렌드 역시 순식간에 변화하고 있다. 그런 시류 속에서 <성검전설>과 <여고생 드래곤>은 트렌드 변화 속도에 독자가 올리탈 수 있도록 잘 견인했을 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 그 자체기도 하였다. 만약 두 작품처럼 기존 판타지물이 또 한 번 탈피할 수 있다면 판타지물은 독자에게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필진이미지

주다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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