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가 인기를 끈다는 소식이 있다. 언론은 이 만화를 소개하며 죽음과 부활, 살해 등의 내용이 나오는 작품이 초등학생에게 끼칠 영향을 우려했다. 확실히 이 만화는 1화부터 살해 묘사가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며, 어떤 영향일진 모르지만 좋은 쪽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매체를 소비하는 일에서 그에 영향을 받는 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다. 단순히 만화만을 논한다면 게임이 폭력을 유발한다거나 하는 식의 오해로 빠지기 쉽다. 그러니 이런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디까지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최애의 아이>에서 아이돌, 전생, 환생, 이세계 등의 키워드를 가정하고 이것들이 현재 한국 문화의 어떤 지류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아이돌과 이세계의 결합은 과연 어떤 이유로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복합적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판데믹이 있던 2020년대 이후 한국에 본격화된 서브컬처 중에는 ‘버츄얼’ 문화가 있었다. 소위 버츄얼 유튜버에서 확장되어 온 인터넷 방송 문화는 스트리머 ‘우왁굳’이 출범한 이세계 아이돌(통칭 이세돌)을 필두로 아이돌 문화로 확장됐다. 카카오 웹툰에 [차원을 넘어 이세계 아이돌]과 [마법소녀 이세계 아이돌]과 같은 형태의 미디어믹스를 선보이기도 한 이 그룹은 오늘날의 대중이 ‘버츄얼’과 ‘아이돌’ 양쪽 모두에 별다른 저항감이 없음을 보여준다. 혹은, 이 둘을 향유하는 소비층이 서로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출생의 젊은 세대에게 버츄얼과 아이돌 문화는 서로 겹쳐볼 수 있는 문화이기 전에 삶의 자연스러운 한 영역을 구성한다. 진로와 곰표가 서로 다른 상표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같은 자리에 놓이듯, 문화는 삶의 영역에 따라 구성된다.
버츄얼 아이돌은 이 둘이 ‘어떻게’ 엮였는지보다 향유하는 소비층을 분석해야 한다: 단편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로블록스와 같은 메타버스 형태의 문화가 아이돌 문화에 접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버츄얼 아이돌’은 ‘버츄얼인데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것’보다 ‘아이돌이 버츄얼 활동을 하는 일’에 더 가깝다. 뭉뚱그려 서술하기엔 아쉬움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후자를 따라 이야기를 전개해보려 한다. 인터넷은 자아실현의 창구가 될 수 있을까? 개인의 재능을 선보이는 창구로서의 버츄얼을 생각해보자. 기존에 재능은 현실 세계의 여러 제약에 의해 선보이기 어려운 ‘가치’였으나, 인터넷 방송과 같은 1인 미디어의 출현은 재능을 선보이는 방식에 있어 스스로의 운용에 중점을 뒀다. 버츄얼 아이돌은 재능을 선보이는 창구로서 현실과는 다른 장소, 대안적 세계인 ‘이세계’를 선택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버츄얼 세계를 현실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이버 가수 아담의 시대가 ‘네트워크’ 안에서만 존재하는 생명체 정도를 상상했다면, ‘버츄얼’이라는 용어는 아바타를 마치 신체의 연장선처럼 여긴다. 버츄얼 세상에 존재하는 아바타는 현실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나’가 가상공간에 나아감으로써 현실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는 형태다. 기본적으로 이는 익명으로써 현실의 제약을 탈피하는 것이자, 부분적으로는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이기도 하다. 즉 버츄얼 아이돌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아이돌을 대신해 인터넷 세계로 도피한 게 아니다. 버츄얼과 아이돌은 그 가상성에서 ‘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가치로 사유된다. 그리고 장르로서의 이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도피’이기보다 하나의 대안일 수 있는 듯 보인다.
1인 미디어의 발흥이 ‘발화 창구’로서 언론의 수평화를 이루어 냈다면, 1인 방송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기성 제도와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초과한다. ‘재능’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선보일 수 있다는 말은, 아주 정확하게도 몇 년 전에 유행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연장선에서 바라보아질 여지가 있다. 시스템에 개인이 소속되는 게 아니라, 개인이 하나의 시스템이 된다고. 오늘날 웹툰과 웹소설 등에서 활용되는 이세계 설정은 정확히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과거에 이세계가 판타지의 형태로 소위 ‘트럭’과 연결되었다면, 오늘날 이세계라는 말은 ‘현실’을 떠올릴 수 없게 하는 어딘가를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자아실현의 창구로써, 이세계는 현실의 담론이 연장될 수 있는 어딘가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라면 이세계란 기존과는 다른 시스템이 적용되는 현실이어야만 한다.
이는 소위 현실을 등지고 새로운 곳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기보다 자신이 소속될 수 있는 현실을 풀어가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나’라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 두면서 기성의 현실을 바꾸는 이야기는 흔히 빙의, 회귀, 환생과 같은 이야기로 펼쳐지고는 한다. 가령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상남자]처럼 같은 현실을 더 충실하게 살아보려는 일은 과거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와 같은 부류의 회귀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근래의 회귀물에서 발견되는 요인은 기존에 알던 현실이라도 상황을 낯설게 가져감으로써 이를 마치 ‘이세계’처럼 묘사한다는 점이다. 특히 과거 회귀물이 <백 투 더 퓨쳐>처럼 하나의 작은 변화가 미래의 큰 이야기를 끌어내는 타임루프 계열에 더 가까웠다면, 근래의 작품에서는 개인의 욕구가 더 반영되는 모습을 보인다. 과거를 바꿔 파국의 세계를 구하는 일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려는 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세계]와 같은 거시적인 이야기에서 관심이 멀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세계가 되었으므로 자신을 구하는 일이 곧 그런 게 된 것일 뿐이다. 개인의 자아를 외부로 확장하는 일은 세계의 크기를 곧 ‘나’의 크기에 맞춤으로써 자아실현의 욕구를 실현한다. 이른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더 나은 자신이 되는 일’이 됨으로써 거시담론을 수행하는 ‘나’는 ‘이세계’를 ‘이, 세계’로 이해한다. 어딜 가든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게 자신이라면, 거꾸로 보았을 때 우리는 항상 ‘나’라는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맥락에서라면, 이들이 과거와는 달리 자신만을 챙긴다고만은 볼 수 없다. 혹자는 이들의 태도를 이기적이고 자기폐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이들에게서 현실은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태도일 뿐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인터넷 방송 또한 1인 미디어라는 점에서 개인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혼자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용하는 일에서 어떤 ‘자기’가 될 것인지가 더해진 게 버츄얼 아바타의 형태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참조해볼 수 있는 건 게임 속의 캐릭터를 ‘가상공간의 나’로 여기는 게임 문화다. 우리는 역할극(Role Playing)의 성격이 왜 ‘가상의 나’로 이어졌을지를 떠올려보아야 한다. 버츄얼 아바타에서 중점이 되는 캐릭터 컨셉과 이를 이행하는 일은 ‘역할극’의 일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게임의 고전적인 방법론과 문화를 따라가고 있다. 게임 속 캐릭터를 자신처럼 여기며 활동하는 일은 게이머의 역할이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기보다 어떤 ‘나’가 되는지에 더 중점을 둔다는 걸 보여줬다. 어떤 경우, 게이머는 게임 속의 캐릭터가 자신을 대신해 성장하거나, 감정을 얻기를 원한다.
게이머에게 가상세계는 ‘가짜’일지 모르지만 그곳에서의 감정이나 경험 또한 가짜인 건 아니다. 이른바, 이들에게 세계란 ‘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어디든간에 ‘나’는 이어지기만 하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버츄얼 아바타를 통한 아이돌 활동은 그곳이 일반적이지 않은 이세계라 할지라도 경험까지 일반화하진 않는다. 어딜 가든 팬들에게서 사랑받는 경험은 동일하다는 믿음이 있고, 적어도 이는 ‘이세계’에 갔다가 돌아오는 식의 경험을 부질없게 여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어딜 가도 자신을 믿어야만 비로소 세계에 대한 향유는 가능하다. 근래에 유행하는 빙의물의 경우가 그러한데, ‘빙의’되는 매체는 각기 다양하지만 이들 모두는 자신이 본래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흐름이 아니더라도, 작품을 보는 우리로써는 계속해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탓이다.
가령 [플레이어]의 경우 웹툰을 보던 ‘나’가 웹툰 세계에 전생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웹툰 속 세계의 신은 그런 ‘나’를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운용한다.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일차적으로 주인공이 이입하지만, 부가적으로는 웹툰에 댓글을 남겨 작가에게 의견을 피드백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어떤 세계든 계속해서 존재해야만 한다. 독자는 이야기 안에서 탑을 오르는 주인공의 처지에 이입할 수도 있지만, 그런 주인공이 전생해왔다는 점을 잊지 않기에 반대로 만화 속의 신에게도 이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메타’의 관점은 우리가 어느 세계든 간에 자신을 관찰자의 입장으로 바라봄으로써 빙의, 회귀, 환생의 장르를 현실에서의 도피로 여기지 않게 해준다. 즉 이들은 현실을 포기해 ‘이세계’로 망명하지 않았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영화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이들 영화는 평행우주를 묘사하지만, 이들 우주와 살아가는 현실은 서로 겹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 작품에선 ‘계속해서 존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나’가 강조된다. 이들은 서로 다른 판본으로서의 ‘나’가 존재하는 이세계에 방문하지만 이 모두에서는 결국 ‘나’를 찾는 여정이 강조될 뿐이다. 버츄얼 아이돌 활동도 그렇다. 버츄얼 활동을 두고서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상 공간에서라도 실현한다는 식으로 보면 곤란하다. 버츄얼 아이돌은 아이돌의 활동 무대를 가상 공간으로 옮겨둔 것이다. 이른바 버츄얼이란 이세계, 우리 현실의 연장으로 존재하는 이세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웹툰에서 동시대 담론과 문화 흐름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며 결국 웹툰은 우리 모두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빙의, 회귀, 환생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이세계’의 활용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나’로서 현실에서는 제약받던 능력을 발굴한다면, 버츄얼 아이돌 활동 또한 다른 제약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중점을 둔다. 아이돌 활동은 현실에서의 ‘나’에서 재능에만 집중하도록 나머지 배경을 제거해버린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세계는 우리가 서로를 편견 없이 대하게 된다는 인터넷 시대 초창기의 담론을 되풀이하고 있기도 하다. 그때 우린 “인터넷 세상은 인종이나 성별, 국적으로 서로를 나누지 않는다.”고 말하며 미래사회에 희망을 품었다. 이세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큰 틀에서 ‘이세계’라는 환경에 놓인 이들 서브컬처는 우리가 현실도피로 여겼던 문화 향유 방식이 사실은 자신을 발굴해 자아를 실현하는 진취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린 본래 살아가는 현실을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저버리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