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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시대정신 - 탈피, 그리고 ‘최적’

23년을 마무리하며 매체적 특성을 중심으로 웹툰의 트렌드 변화를 살피고, ‘현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023-12-22 김득원

| 사회적 변화와 흐름: 매체의 역할

‘시대정신’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자 하니, 사회적 변화의 흐름을 짚는 게 먼저이리라 생각된다. 한국의 근대화는 식민화, 분단 그리고 전쟁을 근대화 과정에서 모두 경험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와 인식, 제도에 다면적인 흔적을 남겼다. 김종엽, 정민승(2019)은 이런 사회적 습속의 형태 중 하나로 국권 및 주권의 상실을 ‘부끄럼’을 들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던 해방의 상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 88 올림픽 등을 통한 국제적 존재감의 획득은 “성공”을 극복에 대한 절박한 목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결속은 대체로 체제 내 혁명과 전복, 몰입으로 개개인의 이익보다 조직적 개편에 보다 무게추가 실리곤 했다. 단순히 구성원의 안위를 위한 복수가 아니라 공통의 이념과 향상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의 개념에 가까웠던 것이다. 당시의 흐름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건 전통 매체(종이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였다.


[ 그림 1. 전통매체 이용률 추이 (1993~2019), 한국언론진흥재단 ]


그러나 성공에 대한 의지와 변화는 사회적 위계의 재구성, 신분 질서의 재확립 등을 동반하였고, 이로 인해 협력과 연대의 네트워크가 소실되었다. 능력 중심의 각자도생 사회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모든 걸 능력의 결과로 치환하게 했다. 기존 있던 폭넓은 사회 이동은 모두에게 기회가 열린 공정한 세상이라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으나, 부조리에 의한 결과마저 능력에 의한 차이로 둔갑시키게 된다. 자본주의 심화로 인한 경쟁의 과열은 현상 유지를 곧 퇴보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때 주요한 역할을 했던 건 인터넷 기반 매체의 등장에 따른 정보량의 급증과 개인 미디어의 출현이다. 사회적 흐름에 더해 편리성과 효율성의 추구는 객체화의 가속과 자연스레 연결되었던 것이다. 무한한 성장은 사회적, 개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고 곧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지나,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 세태이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감성을 낳고, 변화는 내용과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삶의 조건이 변화였기에 삶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지각의 방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문화예술의 생산과 향유의 방식 또한 폭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빠르게 변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대정신’이라 정의할 수 있는 태도 혹은 경향은 무엇일까. 혹자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국민의 50~60%가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을 단일화된 시대정신으로 볼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시대정신이란 공통으로 지향하는 가치와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규범이 들어가야 한다고 규정짓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융합과 세계적 변화의 성격, 그 방향성까지 따져가며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렇듯 거시적 관점의 ‘시대정신’을 말하는 건 다양한 영역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동반되어야 하므로, 해당 지면에서는 웹툰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매체적 특성을 중심으로 만화-웹툰의 변화와 흐름, 그 안에서 두드러졌던 요소를 확인하여 시대정신의 일부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 ‘웹툰(Webtoon)’이라는 매체의 속성

웹툰은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이다. 기존에 만화라는 장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웹툰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어 구분 짓고자 했다.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 웹툰은 매체에 주안점을 둔 용어이다. 인쇄된 출판물로 소비하던 만화를 웹과 앱으로 보게 된 것뿐이지만 게재 및 소비 방식의 변화는 만화 자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세로 스크롤 연출과 컬러 원고의 작업량 배분, 웹툰의 산업화, 최소 분량의 기준, 스튜디오 시스템 등 웹툰과 관련된 이론과 비즈니스가 떠오르고 여러 플랫폼과 업체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웹툰 산업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권당 7~8화 분량의 만화책, 2주 혹은 한 달을 꼬박 기다려 1개 회차가 나오던 출판만화 시장은 매주 새로운 에피소드를 쏟아내는 웹툰 시장에게 입지를 갉아먹히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형식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며, 데뷔를 위해서 가능성을 증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분야도 아니었다. 단지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게시물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의 질뿐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 또한 만화를 소비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대중들에게 이야기를 더 빨리, 많이 볼 수 있으며 원하는 바를 작가에게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댓글 시스템이 있는 웹툰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매주 새로운 회차의 웹툰이 올라오는 게 당연해진 지금, 일주일을 기다려 새로운 회차를 결재하는 대중들은 많은 작품을 빠르게 접하게 되었기에 기존의 즐거움에서 온전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더 강도 높은 자극 혹은 신선한 충격을 찾는다.

특정 캐릭터를 조명하기 위해 회상 시퀀스를 넣어 서사를 탄탄하게 만드는 과정, 어려운 전투일수록 더 많은 회차를 소비하여 전개되는 양상이 지탄의 대상이 된 건 웹툰에 대한 ‘기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확실한 해답과 결론이 신속하게 정리가 되어야만, 기다림의 가치를 온전히 누렸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넘쳐나는 콘텐츠의 속도감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전달 형태, 그러니까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결과를 보여주는, 혹 과정을 보여주더라도 꼭 짧은 시간 안에 확인하게끔 하는 유형의 변화가 주된 테마로 발현되는 중이다. 이 지점으로 인해 오랫동안 회귀, 빙의, 환생(이하 회빙환)의 성행을 ‘MZ 세대들의 희망이자 욕망’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 그림2. 회귀, 빙의, 환생 관련 6 작품: <화산귀환>, <광마회귀>, <내가 키운 S급들>, <역대급 영지 설계사>, <상남자>, <투신전생기> ]


| 꿈과 현실: 완전무결에 대한 동경

수많은 자기 계발 서적에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며, 매일 꾸준히 하라는 말’을 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균형 잡힌 육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식단 조절과 병행되는 성실한 단련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쉽지 않으므로, 모두가 동기 부여의 명목을 찾으며 정체되었다. 이 실체 없는 개념을 움켜쥐기 위해, 안전하고 확실한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생활의 관성에서 눈을 돌리는 심리로 회빙환이 대두된다.

이미 망가졌다고 느껴지는 몸, 그리고 결과 없이 떠나보낸 시간들이 원망스럽다고 느껴질 때에 우린 과거로의 회귀, 혹은 의식만은 ‘나’의 것이나 시작 지점은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삶을 꿈꾸게 된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회빙환에 대한 열광은 초기화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데에서 시작된다. 노력 없이 무엇도 이룰 수 없음을 알지만 노력을 하더라도 성과를 오롯이 누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으므로, 최소의 노력과 대처를 통해 최대의 결괏값을 얻어내고 싶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완전한 합리를 콘텐츠에서나마 목도하고 싶다는 욕망이 낯선 건 아니다. 회빙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익숙한 클리셰의 차용과 약간의 변주는 창작의 기본적인 수순이다. 그러나 공감보다는 동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 동경 안에 현실은 배제되어 있는 시장논리는 지극히 수동적으로 보인다.. 

사이다 참교육 서사의 흥행 역시 부조리 해결의 수동성과 연결된다. 체제 자체를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보다는 체제 내에서 초능력이든, 기연(其緣)이든, 뭐든 얻어서 당한 방식 그대로 복수해 주겠다는 대목이 그렇다. 회방환은 기존의 경험을 통해서 체제 내에서의 해결이 전제되고 예고된 상황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안전한 어려움만을 목도하고 싶다는 건 일종의 방어 기제가 아닐까.


| 꿈과 현실, 그 간극의 양가성

무모하고 자극적인 것이 즐비하는 이때에 조명되는 건 객관적인 불행과 고군분투 서사였다. 그들의 과정이 공감과 위로를 주기에, 결과에서도 사이다만을 갈구하기보다 함께 소소한 축하를 나누는 것이다. 새삼스레 일상툰이 조명되고 있는 현 시류는 이러한 진화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가능과 불가능을 나눌 때, 불가능에 가깝게 분류된다면 ‘꿈’이라 부른다. 물론 가능에 가깝다면 ‘현실’이 되리라. 너무 어렵지 않아 보이고 거창하진 않지만 비전이 보이는, 상충되는 가치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최대한 덜 절망하고 싶다는 양가성은 MZ로 불리는 구성원들이 향유하는 심정이 아닐까.


[ 그림 3. Harry Clarke, <A Descent into the Maelström(소용돌이 속으로)>, 1919. ]



이는 마셜 맥루언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용돌이 속으로>에 나오는 뱃사람처럼 주위에 펼쳐진 양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탐구해야 한다고 전했던 지혜와 맞닿아 있다. 두 형제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 그러던 중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돛대에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았고, 다른 한 사람은 혼란 속에서도 소용돌이와 그 주변을 관찰했다. 그리하여 무거운 것들은 더 빨리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지만 가벼운 것들은 천천히 주위를 돌다가 밀려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가방을 비우고 자신의 몸에 묶어 바다로 뛰어든다. 결국 돛에 자신을 묶은 사람은 배와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빈 가방에 자신을 묶은 사람은 살아남았다. 맥루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현재 중요해 보인다고 여겨지는 것, 당장 눈앞의 것에 현혹되어 매몰되는 게 아니라 거센 소용돌이의 흐름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관찰하여 길을 탐색하라는 것’이다.

성장에 대한 독촉, 과도한 경쟁과 떨어지지 않는 불안감, 선망과 무력감의 낙차는 모두 공허의 패배감으로 이어짐을 모두 경험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정보 취합을 통한 우위 확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분초사회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타인의 취향과 선택에 편승하려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중의 유행, 디토소비에 몰두하는 지금의 세태는 대중과 창작자가 가진 관점의 소산이기도 할 것이다. 혼자 실패하는 것이 아니므로, 적어도 혼자만 낙오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에 현시대 웹툰을 통해 들여다보고 확인할 수 있는 시대정신이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는 ‘탈피’, 즉 벗어나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닐까 한다.


| 탈피, 그리고 ‘최적’이라는 시대정신

잠깐이나마 현실을 외면하도록 하고,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짐으로써 점점 구체화되어 가는 자아는 순간의 자극과 유희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의 사회상과도 매끄럽게 이어진다. 벗어난 능력 있는 이들을 그들 간의 커뮤니티를 새로이 형성하고 구축하여 아예 새로운 판을 짠다. 한낱 장기말로 소비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일단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결국 시대정신이란 미명 하, 군중을 통솔하고 이끄는 건 일종의 폭력이 되는 셈이다. 

가치 아래 뭉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가치를 만들어 내는 프로슈밍(Prosuming) 시대이다. 프로슈밍은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생산자(Producer)이자 동시에 소비자(Consumer)가 되는 프로슈머(Prosumer)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웹툰이 함양해할 시대정신은 탈피와 ‘최적’이다.


[ 그림 4. 정치호, Alvin Toffler(앨빈 토플러), 더스쿠프 ]


플랫폼은 본래의 의미였던 ‘공론장’ 이상으로 거대해졌으나, 자정의 힘을 잃었다. 사람이 모이면 자본이 축적되고, 축적된 자본은 권력으로 탈바꿈한다. 더욱이 산업의 형성이란 상품을 더 잘 팔기 위한 수단의 성장과 다름없다. 웹툰이 이만큼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던 증명과 허락의 부재, 자율성과 다양성의 가치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형성되고 있는 이때, 시대정신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건 웹툰이라는 매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이다.

‘작가’의 브랜딩, 작가만의 아이덴티티 구축은 최적의 수요 창출을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웹툰의 기존 플랫폼에서 지향하는 바가 본인이 원하는 바와 다르다면, 새로운 토대의 개척이 필요하다. 비집고 들어가 작품이 잘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가진 고유의 개성으로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이는 곧 매체의 성질에 대한 변화, 나아가 매체를 대하는 대중의 변화까지 불러일으키는 작은 바람이 될 것이다. 같은 상황을 보더라도 내뱉는 말은 모두가 다르다. 그 감상을 신선한 방식으로 흥미롭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덕목이다. 작가와 대중이 달라지면 산업은 따르게 된다. 유행을 선도하는 건 일부지만, 유행으로 굳히고 이를 소비하는 건 대중이다. 웹툰 산업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며, 작가와 대중이라는 점은 언제까지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참고 자료 > 

* Marshall McLuhan,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김성기, 이한우 옮김, 민음사, 2002.

* 김난도, 『트렌드 코리아 2024』, 미래의 창,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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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원

만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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