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꿈 꾸세요 : 죽지 않는 만화에 치유되기
"승자가 전쟁을 보유하고, 패배한 자에겐 전쟁이 사라진다."
-발터 벤야민-
전쟁을 다룬 많은 매체에서 ‘전장’은 생생한 현실이 되고는 했다. 스필버그가 만든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도입부나, 놀란이 만든 <덩케르크>(2017)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 영화가 너무 생생한 나머지, 전쟁을 경험했던 몇몇 이들은 영화 보기를 거부했다고도 한다. 여러 촬영 관련 수상을 거머쥘 정도로 생생했던 묘사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실제감을 살리는 효과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진짜’처럼 묘사하는 일은 전쟁에 대한 간접경험이 되어줌으로써 ‘왜’ 전쟁이 해로운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즉, 전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전쟁에 반대하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이토록 잔혹하다면, 그런 건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재앙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리얼리즘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차츰 전쟁의 참혹함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일로 변형되고야 만다. 전쟁의 이유나 과정이 사라지고서, 그 자리엔 서로를 향해 싸우거나 죽인다는 ‘감정’만이 남으며, 구역을 ‘폭격’하고 상대를 ‘제거’하는 일만이 남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파생되는 방향이 있다. 어떤 작품이 전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면, 어떤 작품은 그런 전쟁이 남긴 현실을 보여주려 한다. 전쟁을 묘사하는 게 점점 픽션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우리에게 남은 현실은 점점 ‘리얼’에 가까워진다. 왜냐하면 전쟁은 이미 경험한 사람의 것이지만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우리 모두의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람보>(1982)와 <오발탄>(1960)처럼 전후를 다룬 작품을 떠올려볼 수 있다. <람보>의 람보는 전장에서는 값비싼 장비를 다뤘지만 여기서는 자동차 하나 다룰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전장에서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돌아와서는 전쟁범죄자라는 낙인만을 얻는다. <오발탄>의 철호는 상이군인이 되어 집으로 복귀하는데, 작품의 제목대로 ‘오발탄’이 되어버린 그는 전쟁 이후에 남겨져 갈 곳을 잃었다. 전장의 기술은 사회로 복귀했을 때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게다가 상처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악몽이 된다. 그러니까 앞서 전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일이 리얼리즘이라면, 이처럼 ‘현실’에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도 리얼리즘이다.
자리를 옮겨 리얼과 픽션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싶다. 어떤 작품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그에 모티브가 된 ‘리얼’일까, 아니면 작품을 거쳐 표면화된 ‘픽션’인 걸까. 영화나 드라마처럼 현실의 질감으로 작업한 경우라면 전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물이나 대상의 특징을 잡아 묘사한다는 ‘데포르메’를 거치고 나면, 현실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면들로 구성된 ‘픽션’에 가까워진다. 현실의 몇몇 사건을 소재 삼아 작품을 꾸리는 일은, 이미 전쟁의 스펙터클이 우리 현실을 초과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영화나 만화는 항상 현실이 남긴 ‘인상’들로만 작업하게 된다. 이를 따라 현실은 점점 만화처럼 변해가면서 전쟁의 참상을 지우려 한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전쟁의 기억 속에서 만화는, 역설적으로 현실의 인상을 보존한 매체가 된다. 마치 한때 꿈을 꾸었다가 깨어나는 일처럼, 만화는 그 안에 현실의 인상들을 갖고서 이를 픽션화한다. 헌데 그렇다면, 만화는 현실을 미화하거나 하는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혹은, 만화는 우리가 잊어야 하는 아픔을 구태여 붙잡아두는 ‘나쁜 꿈’인 것은 아닐까.
△ <람보>(1982)
소위 만화적 연출이라는 걸 떠올려보자. <톰과 제리>나 <심슨 가족> 같은 만화에서 캐릭터는 목이 졸리거나 납작해지기도 하는데, 이들 존재는 만화적 연출 덕택에 죽지 않으며 또한 시청자도 이를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시청자는 만화세계에 대한 불문율을 알고 있으므로, 만화가 내보이는 폭력성에서 ‘죽음’이나 ‘상처’ 같은 큰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그 점에서 만화는 사실 전쟁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매체는 아니다. 만화가 현실을 사로잡으려 들 때, 현실은 자신의 인상만을 남기고 떠나간다. 쥐었던 손을 펼치면 그 안에는 현실의 이미지가 아닌, 상처나 아픔만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어떤 면에서 만화가 선보이는 안전함은, 낯설고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벗어나 ‘도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만화는 도피와 망상으로 점철된 ‘나쁜 꿈’일 수도 있다. 이는 물론 만화와 전쟁의 궁합이 나쁘다거나, 혹은 만화가 전쟁의 참상을 간과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만화가 갖는 데포르메의 성질이 전쟁의 특징적인 면을 묘사할 때는, 나머지 작은 문제가 소외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우려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만화에서 다뤄지는 전쟁은, 현실의 르포 형태를 한 게 아니라면 대부분 ‘전후’를 다루고는 한다. 여기서 전후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전쟁의 당사자가 될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이 1세계나 2세계에 속할 텐데, 이 경우 ‘전쟁’은 대부분 미디어 안에서만 고찰될 뿐이다. 즉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미디어로 접하는 우리에게 전쟁은 항상 ‘전후’로만 받아들여진다. 한편으로는 그런 점도 있다. 전쟁이 남긴 문제를 직면하는 일은, 망가진 경제와 같은 ‘거대’ 문제에만 이목이 쏠릴 뿐, 남겨진 것을 말하지 않는다. 미디어가 폭격이나 총성 같은 리얼리즘을 전한다면, 전쟁이 남긴 상처를 말하는 일은 마치 이런 전쟁 안에서만 존재하는 ‘픽션’처럼 여겨졌다. 이른바 그 이야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현실로 풀려났을 때 이들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처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만화는 현실을 지배하는 ‘거대’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를 말할 수 있다. 만화는 현실을 말해야 한다는 ‘거대’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기에, 표면의 주름이 남긴 상처를 말할 수 있다.
만화가 현실에서 비교적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만큼, ‘전후’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스카 에이지는 <그 시절, 2층에서 우리는>( 오스카 에이지, 『그 시절, 2층에서 우리는』, 선정우 역, (서울: 요다, 2020)) 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정치성을 지워버림으로써 동아시아에 확대되고 있다”(p.125)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서브컬처는 분명히 오랫동안 무언가의 우화였지만, 그것을 우화로 받아들일 만한 기반을 잃었을 것이고, 따라서 쭉 우화가 기능 부전을 일으킨 시대를 살고 있다”(p.132)고 말한다. 이 말은 만화가 처음에는 현실의 인상을 갖고서 작업했지만, 끝내 그 자신이 ‘인상’ 자체가 되고야 만 상황을 가리킨다. 만화는 처음에 현실의 어떤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출발했지만, 끝내 그 자신이 모티브가 되어버림으로써 내면에 품은 현실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오스카가 말하듯, 오히려 이 덕분에 일본 만화가 한국에서도 널리 사랑받을 수 있어 보인다. 일본 만화에서 전후 문제를 한국사와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우화가 사라진 시대는 되려 신화에 가깝게 된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역사성을 현재에 결합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점에서 소개하려는 세 작품이 있다. 첫 번째는 엔도 타츠야의 <스파이 패밀리>다. 이 만화는 동국과 서국에 전쟁이 벌어진 이후를 다룬다. 전쟁이 끝나 냉전에 진입한 가운데, 동국과 서국의 스파이가 서로 만나 ‘첩보’활동의 일환으로 가족을 꾸린다는 내러티브로 진행되는 이 만화는 ‘가족’이라는 설정으로 안전지대를 설정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죽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듯, 가족이 찢어지거나 고통받는 일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가족’을 꾸린다는 설정은 장르적으로 보호받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자가 만화를 따라가며 주로 보게 되는 ‘가족’의 내부는, 차갑고 잔혹한 바깥세상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설정이 작품이 전하려는 메시지와 어우러지는 방식이다. 가령 이야기의 골자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듯, 전쟁고아 출신의 로이드가 “아이들이 울지 않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일념이다. ‘가족’을 꾸리고자 아냐를 입양한 로이드는 아냐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신념을 작게나마 실천하는 듯 보인다.
동국과 서국 간에 벌어진 냉전과 양국의 스파이가 모여 가족을 꾸렸다는 설정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언뜻 보았을 때 상반된 두 사람이 가족으로 이어지는 일은, 냉전의 장막을 ‘바깥’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차단막인 듯 보인다. 동국과 서국의 스파이, 그리고 전쟁고아와 실험견이 한데 모인 자리는 전쟁이 남긴 ‘상처’들이어서 매우 가슴 아픈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작품은 ‘가족’의 형태를 빌려 이들의 ‘전후’를 보듬는다. 이 작품에서 전쟁은 이미 과거의 일로 남아있지만, 반대로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는 위협이기도 한데,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하나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가족은 상처를 가두는 감옥일 수도 있겠지만, 작품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설정을 위해 제시되는 ‘외부’이다. 가족을 끈끈하게 하는 것은 외부의 전쟁이고, 여기서 내부는 그런 외부가 남긴 잔향이다. 말하자면 작품은 우리 세계에 전쟁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거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 <바이올렛 에버가든>(2015~2022)
다음으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아카츠키 카나의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다. 이 작품은 상이군인인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대필가로 일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작품의 도입부는 바이올렛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데,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던 그녀는 군인인 길베르트에게 거둬져 전쟁병기로 길러진다. 이후 길베르트와 함께 전쟁을 수행하던 그녀는 폭격을 맞아 양손과 길베르트를 잃으며, 병원에 옮겨져 종전을 맞이한다. 작품의 1화는 이런 상황에서 시작한다. 작품은 전쟁이 끝난 ‘이후’를 다룸으로써 전쟁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상처를 다룬다. 이때, 바이올렛의 의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상기시키는 장치가 된다. 이는 그녀가 어떤 형태로든 전쟁과 얽혀있음을 보여주며, 전쟁과 상처의 이미지를 한데 종합하는 효과가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라 할 수 있을 손이 기계로 대체된 일은, 남은 삶 모두를 전쟁의 연장선에 둔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이올렛의 의수를 보고 놀라는 일은, 단순히 소녀와 기계의 상반된 조합이어서인 것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전쟁과 얽힌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인 듯 보인다.
동시에 이 의수는 바이올렛이 사랑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도 지대한 역할을 한다. 의수는 그녀와 길베르트를 이어주는 기억이 전쟁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데, 바꾸어 말하면 신체 일부가 전쟁의 상처로 대체된 이 상황에서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사랑’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사라진 신체를 어찌할 수 없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 의수는 바이올렛이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을 함께한다. 바이올렛이 기계 의수로 사용하는 타자기는, 서로 같은 금속 재질임에도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한다는 점에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한다. 바이올렛은 길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말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이를 위해 ‘자동수기인형’을 직업으로 택한 그녀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정제해 하얀 표면에 쏟아붓는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상처는 타인의 상처와 대결하고, 차가운 인상의 타자기가 도리어 따스한 마음을 담는다는 점을 알게 된 그녀는 전쟁병기로서의 자기 또한 긍정하게 된다. 이른바, 기계와 기계가 부딪히는 이 모습은 총구 대 총구로 겨루었던 전쟁의 참혹함을 반대로 역설한다.
△ <86 -에이티식스->(2017~)
세 번째 작품은 아사토 아사토의 <86-에이티식스->다. 전쟁과 인종갈등을 다룬 이 작품에서는 소년병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인병기가 자아를 갖고 침공해온 이 작품에서는, 그에 대항하는 소년병의 기체가 대외적으로는 무인 기체로 홍보되고 있다. 그리고 제국의 논리는 이들이 인간이 아니므로, 확실히 ‘무인병기’라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작품의 출발점은 ‘인외’와 ‘인외’간의 대립이고, 또한 기계 대 기계로의 대립이다. 작품은 전쟁이 이루어지는 86구의 소년병과 이들을 통솔하는 소령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를 통해 전쟁의 의미를 되새긴다. 특히
<86-에이티식스->의 흥미로운 점은 인종차별이나 소년병처럼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를 철저히 작품에 국한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어린 나이의 소년소녀가 전투를 진행한다는 서브컬처의 장르론을 따르기 때문인데, 이는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들 세계를 ‘가볍게’ 즐기는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은 가벼움은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를 바깥에 펼쳐두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작품에 남는다는 점에서 진중하고, 또 핍진하다.
내용이 작품에 남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작품 속 세계가 진짜인 듯 느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톨킨의 작품은 방대한 세계관과 설정 덕택에 정말로 살아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 세계가 너무 완고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곳이 정말로 있다고 믿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즉 한 작품에서 핍진성은 그 세계의 리얼리즘을 구축하지만 반대로 우리 현실이 무너지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다른 경우지만 <에이티식스>에서도 이런 효과가 일어난다. <86-에이티식스->는 전쟁으로 인해 인력자원이 빠르게 대체되는 상황에서, 여러 소년병을 묘사한다. 앞서 말한 대로 작품 세계의 핍진성을 이루는 이 설정은, 현실의 몇몇 것을 닮았지만 그와 같은 상처가 짊어진 ‘무게’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런 일에는 “상처를 스펙터클화한다”는 말이 뒤따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의 어떤 전쟁을 두고서 그와 같은 일에 ‘공감’하는 사례를 낳기도 한다. 그말대로, 창작물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마저 속이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