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지 못한 전쟁 만화가 기약하는 것들
전쟁 만화를 읽고 쓴다는 것
전쟁 만화에 관한 평론을 처음 써보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로 아트 슈피겔만의 <MAUS>를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수기와 엮어 읽으며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글을 썼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풀>)나 6.25 이산가족 문제(<기다림>) 등 한국 전쟁을 다룬 김금숙의 작품들을 논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다른 글에서 논했던 <노근리 이야기>(박건웅)와 닮은 면이 있었다. 두 작가의 작품들 모두 한국 전쟁이 남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흔을 그렸고 그것을 먹으로 새긴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노근리 이야기>는 세계 대전을 다룬 프랑스 만화 <포로 수용소>(자크 타르디)와 함께 읽었다.
전쟁에 관한 작품들은 모두 비슷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 이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부정될 수 없는 참상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두겠다.’ 그 목소리와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번을 엄숙하게 읽었다.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고 문장을 얹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언가 바스라지거나 무너질 것 같아서, 놓치거나 잊어버리고 말 텐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뭔가를 받아적는 마음으로 비평을 썼다. 그때그때 책임의 순간을 가까스로 모면해왔다는 생각이 이제 써야 할 네 번째 글 앞에서야 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나 부담스럽다, 또 전쟁에 관해 쓰는 것이. 단지 소재의 무거움 탓만은 아닌 듯해서 이유를 오래 고민했다. 지난 몇 년간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소식이 유독 지척에 있는 것처럼 들려온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긴 할 것이다. 폭격과 사망에 관한 보도가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치솟아온 생활 물가도 시시각각 국제 상황을 상기시켰다. 몇 년 전 유럽 여행에서 만나 지금도 근황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메일로 전한 근심과 우울 역시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사실 그동안 써온 세 편의 글 모두는, 전쟁을 현재적으로 다루려 애썼을 뿐 정말로 현재의 일로 다루진 않았다. 역사를 기억하려 썼다는 말은 내심 그 모든 일을 지나간 것으로 전제한다는 은연한 고백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실은 더는 전쟁을 논할 방법이 없다고 느꼈다. 전쟁 만화를 읽을 때마다 그 감상의 방식이 비슷했다. 깨닫기와 반성하기. 기억하기와 연민하기. 결국 다 같은 말 아닌가. 에세이와 신문 기사, 소설, 논문, 또 다른 전쟁 만화들을 참고해 읽어봐도 읽을수록 새로움은 고갈되었다. 알고 느낀다는 두 가지 동사 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엄연히 실재하는 과거의 역사로 보든 현재형인 사회적 이슈로 보든, 전쟁 앞에서 내가 지을 줄 아는 표정과 포즈가 겨우 그것밖에 없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느낀 것은 정치적 차원의 막막함과 무력감이었고, 전쟁 앞에서 정말로 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밀려 왔다.
전쟁을 그리는 새로운 방식, <커튼 뒤에서>
본래는 이 글의 지면을 사라 델 주디체의 만화 <커튼 뒤에서>를 소개하는 데 쓰려 했다. 만화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2차 세계 대전을 그렸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전쟁의 전조와 진행 과정을 8살 소녀 야엘의 시선 안에 담았다. 전쟁의 풍경을 포착하기 위해 어린이의 시야를 빌려오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순수한 아이의 시각에서 극대화되는 전쟁의 참혹함’ 같은 구도는 거의 거북할 정도로 빤한 것이 되었다. 극명한 대비 구도는 자주 사안을 납작하게 재현할 때가 많아 싫어한다. 그런데도 <커튼 뒤에서>는 그간 읽어왔던 다른 전쟁 만화들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주었다. 다른 만화들이 그랬듯 ‘또’ 세계 대전을 그렸는데도 말이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이었다. 두껍고 부드러우며 무게가 제법 나갈 듯한 커튼이 첫 장면을 가득 채운다. 평면의 그림인데도 질감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 모습이 사실적이다. 무늬와 결이 세밀하게 표현되었고 색과 그림자가 무게감을 더한다. 커튼 하나만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인물과 사물, 배경 모두가 녹빛 커튼에 조화로운 색감과 형으로 그려졌다. 말풍선의 색과 모양, 위치까지도 허투루 배치된 것이 없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빨간 머리 앤’의 삽화를 몹시 차분하게 그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작품 곳곳에 그려진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어루만져보고 싶을 만큼 아늑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런 그림체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럼에도 채도가 낮아 어딘가 우울한 기색을 띠는 탓이고, 작품의 주인공인 8살 소녀 야엘이 불안해하고 냉소할 줄도 아는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커튼 뒤에서>는 어린이로서 야엘의 양각과 음각을 고르게 그려낸다. 무른 자두를 던지고 놀며 옷을 엉망으로 만들 땐 활기차고 명랑해 보이지만, 새엄마를 바보 취급하며 짓궂게 굴 때는 그 장난이 냉정해 보이기까지 한다. 8살 야엘은 커튼 뒤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보고 무슨 일인 건지 이해도 못한 채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자라면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우울에 빠지곤 한다. 마치 실존하는 어린이처럼 가감없는 시선 덕에, 야엘을 통과해 작품이 그려내는 전쟁의 현실이 설득력 있으면서도 새로운 느낌으로 와닿는다.
야엘의 가족이 겪은 전쟁은 구성원 전부가 유대인이어서 공통의 피해를 일괄적으로 경험하는 식이 아니었다. 엄마는 유대인이지만 아빠는 유대인이 아니어서 아빠 쪽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유대인인 야엘의 엄마를 멸시했다. 야엘은 유대인을 혐오하는 최초의 태도를 집 밖이 아닌 가족들 속에서 목격했을 것이다. 학살의 위협은 비유대인인 아빠와 새엄마를 지나쳐 야엘과 그녀의 동생만을 향한다. 하나의 가정 안에서도 엇갈리고 부딪히며 복잡히 뒤엉킨 사정은 야엘을 비롯한 작품 속 인물들을 더욱 실존하는 이처럼 느끼게 한다. 집 안에 들이닥친 군인을 피해 커튼 뒤에서 벌벌 떠는 장면만으로 전쟁이 한 사람에게 겨누는 생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전달된다. 그러한 전달이 가능한 것은 이야기의 끝의 끝까지 야엘의 인격을 정밀하게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아올리는 것만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고, 그건 내 좁은 식견 안에서는 전쟁 만화의 연출로는 새로운 것이었다.
이 글이 <커튼 뒤에서>를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묻는 것이 전쟁 만화의 가능성을 묻는 과정에서 필요한 질문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 <커튼 뒤에서>를 한 번 더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 작품이 내게 새롭기만한 것이 아니라 드물게 마음에 든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커튼 뒤에서>는 내가 읽어온 십수 권의(아직 읽지 않은 것이 많은 걸 안다) 전쟁 만화 중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작품이다. 경청이나 기억에 대한 의무감도 없고, 선한 의도를 고려해 되도록 좋게 평가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는 채로, 순수하게 좋았던 유일한 전쟁 만화였다. 나는 <커튼 뒤에서>가 타 작품들과 달리 좋을 수 있었던 이유, 좀 더 근본적으로는 애초 다른 작품들과 다를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을 말한 다음에 가능한 이야기, <필리스트>
실마리가 된 것은 조금이라도 시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에 관한 만화를 읽으면서였다. 원혜진이 10년 전에 출간했던 <아! 팔레스타인>(2013)과 2021년 이어지는 작품으로 낸 <필리스트>를 읽었다.
<아! 팔레스타인>은 ‘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역사'라는 부제 그대로 팔레스타인이 겪어온 분쟁의 역사를 만화 형태로 기록한 작품이다. 총격에 사망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을 삽입해 충격을 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습만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랐다. 마치 <먼나라 이웃나라>처럼 단순한 그림체 안에 상당한 역사적 지식들을 빼곡하게 담았다. 이런 형태가 된 건 만화의 목적 자체가 정말 학습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연재되던 당시 이스라엘로 인해 벌어진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입장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여론은 이스라엘에 치우친 상태였다. 만화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그려졌다. 기록조차 미비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정리해 남기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정보량이 상당하다. 노고는 성공적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출간 당시보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더 많이 알려졌다. 그 변화에 있어 이 만화의 기여도는 내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컸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지식의 공백을 메워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출간된 지 10년 넘게 지난 시점에서 <아! 팔레스타인>을 읽으니 그다지 와닿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전달되는 정보에 충격을 받기에는 그 골자가 알려진 편이었고, 상세 정보가 너무 많아 전부 다 주의해 읽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마음을 심드렁하게 했던 것은 이 만화를 읽는 내내 느낀 갑갑함이 그간 전쟁 만화들을 보며 느낀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의의의 상당 부분을 역사의 기록과 전달에 두고, 고증을 위해서인지 생략을 포기하는 방식이 닮아 있었다. 차곡차곡 왜곡 없이 전달하기 위해서일까. 이렇다 할 플롯을 내려놓은 채 순행적으로만 진행되는 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팔레스타인>처럼 그간 읽어온 전쟁 만화들도 전달하려 애쓰느라 전달에 실패하는 역설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반면 <필리스트>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만화였다. 작가에게는 <아! 팔레스타인>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느껴졌던 것 같지만, 연달아 읽어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작품으로 읽혀서 놀랐다. 전작이 역사적 사실을 학습만화처럼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허구의 사건을 동화처럼 다뤘다. 여전히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전달하겠다는 의욕은 같았지만 택한 장르의 차이만으로도 크게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차이는 전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감각적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을 읽다보면 부담감이나 지루함으로 귀결되었던 의무감이 대부분 희석된 채로 읽을 수 있었다.
<필리스트>는 내게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작품은 7살 어린이 리나에게 할아버지가 전해준 신화로부터 시작한다. 거대한 어머니나무와 검은 새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에 흰 새들이 찾아왔고, 풍요로운 나무를 뺏고 싶었던 이들이 결국 검은 새들을 모두 죽이고 나무를 차지해버렸다는 이야기. 이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작은 새의 이름이 ‘필리스트'다. 참혹하게 핏빛으로 물든 어머니나무를 본 필리스트는 비통함에 자신의 목을 꺾고 떠나는데,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이 작은 새가 돌아와 노래를 부를 때 비로소 다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노골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신화를, 만화는 시선을 잡아챌 정도로 강렬한 새빨간 색을 이용해 표현했다. 잔인한 흰 새들의 눈도, 빼앗긴 어머니나무도 모두 이 새빨간 색으로 그려졌다. 만화가 찾아낸 타협 없는 색감에 압도됐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만화를 보며 처음으로 좀 역겹고 두려운 감정을 느꼈고, 그 정도는 느껴야 작화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팔레스타인이 겪고 있는 학살의 참혹함은 최소한 그 정도 색으로 표현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 타당함 속에, 비로소 이 역사가 만화로 그려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역사를 하필 만화로 그리는 일에 나는 내내 이러한 필연성을 바라왔던 것이다.
<아! 팔레스타인>과 <필리스트>가 같은 작가를 통해 시차를 두고 쓰였다는 사실은 ‘이 일이 여기 있었다’는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으면,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되묻게 했다. 전쟁 만화가 익숙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너무 많은’ 만화가 엇비슷하게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했지만, 오히려 충분치 않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남았기에 자기 선과 색을 찾지 못한 이야기들도 있을지 몰랐다. ‘학살 피해자로서 유대인의 역사가 이야기되어온 것에 비해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부족하다’던 <아! 팔레스타인>의 주장을 떠올릴 때, <커튼 뒤에서>를 비롯해 ‘새로운’ 방식으로 전쟁을 보여주던 만화들 다수가 유대인 학살을 이야기하고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필리스트>는 천사 같은 어린이의 시선으로 참상을 담아내는,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만화이기도 했는데 그 빤함을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다. 오래 공들여 추출했을 <필리스트>의 새빨간 색이 마음을 조금 움직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