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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전쟁을 만화로 그릴 때 어려운 점

전쟁 만화는 ‘재미’있다. 지식 교양 만화로서 한 세대 전 전쟁에 대한 정보를 주고, 그 전쟁을 어떻게 바라볼지 세계관을 주며, 또한 젊은 만화가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재미’로 준다.

2024-06-06 김태권

실제 전쟁을 만화로 그릴 때 어려운 점

  일본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전원 옥쇄하라>와 <일본현대사>는 훌륭하다. 미국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 역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이 어째서 ‘재미있는’ 전쟁 만화인가 살펴보자.

우틸레 둘치(utile dulci), 유용함과 달콤함

  먼저 지식 교양 만화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사람들은 왜 지식 교양 만화를 보는가? 나에겐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지식 교양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 그렇다.

오래된 답변이 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학>이라는 작품에서 2천 년 전에 한 말이다. “유용함을 달콤함과섞는 작가라면 자기 자신과 출판업자에게 큰돈을 벌어줄 것이라 했다. ‘유용함을 달콤함과라는 말이 라틴어 원문으로는 우틸레 둘치(utile dulci)’.

  2천 년 후 지금은 어떨까. 유용함이란 지식 교양 만화가 주는 정보다. 달콤함이란 웹툰의 재미다. 정보와 재미를 함께 주는 작품을 그리라는 조언이다. 지식 교양 만화 그리는 사람에게 주는 로마 시인의 꿀팁이다. 지식 교양 만화는 독자에게 세 가지를 드려야 한다. 첫째는 정보다. 둘째는 그 정보를 어떻게 바라볼지 세계관을 드려야 한다.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는 재미를 들여야 한다. 재미가 없으면 독자는 작품을 봐주시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다룬 만화 역시 독자에게 세 가지를 드린다. 첫째는 전쟁에 대한 지식이다. 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한다. 둘째는 전쟁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셋째는 재미다. 전쟁을 다룬 작품 역시 재미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전쟁이란 끔찍한 일인데, 전쟁이 재미있어도 괜찮을까?”

살인, 불편하지만 재미있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전쟁이란 조직적인 살인이다. 큰 규모로 저질러진다. 어떤 명분으로 전쟁을 포장해도, 전쟁이 안 터졌다면 안 죽었을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살인은 오락 거리가 되기도 한다. 살인을 다룬 만화는 많다. <명탐정 코난><소년탐정 김전일>도 살인 사건으로 가득하다. 주인공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은 살인을 너무 많이 겪어, 이제 살인 사건을 봐도 덤덤하다. 오히려 누가 죽으면 해결해야 할 퍼즐처럼 받아들인다.

  실제 생활 속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주변은, 아시다시피, 치안이 잘 되는 안전한 동네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날마다 살인이 일어난다. 만화 세상 속 다른 지역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사회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그렇다고 이런 문제로 독자가 분노하지는 않는다. “눈 덮인 산장에서 김전일과 만난다면 산장 밖으로 달아나는 편이 목숨을 구할 확률이 높다는 농담을 독자가 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도 우리 동네는 살인이 자주 일어난다고 푸념한다. 독자도 작가도 만화 속 등장인물도 살인을 우스개로 취급한다.

  어째서 만화 속 살인 사건은 불편하지 않은 걸까? ‘픽션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살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역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 때문이다.

  1827년에 영국 작가 토마스 드 퀸시는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라는 글을 썼다. 실제 일어난 살인 사건이 예술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평한 글이었다.

  1811년 런던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서 존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여러 명을 죽였다. 이 사건을 드 퀸시는 비평한다. 살인마를 예술가로, 살인 행위를 예술 작품으로 일컬었다. 살인 동기로는 돈이나 체면 등 현실적인 욕망이 제격이고, 피해자는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이어야 비극성이 살아난다고 했다. 살인 흉기로는 잔인하면서도 드라마틱한 것이 좋다고 썼다. 도발적인 글이다.

  실제 살인 사건을 즐기는 듯한 드 퀸시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살인을 오락 거리로 소비하는 대중을 풍자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글을 쓴 드 퀸시 자신도 살인을 오락 거리로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예외적인 사람의 이야기일까? 드 퀸시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이 올곧은 것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 역시 1946년에 <영국식 살인의 쇠퇴>라는 글을 썼다.

  일요일 점심 식사 후 선정적 타블로이드 신문을 읽는 영국 남성 대중이 오락 거리로 받아들일 영국식 살인의 조건은 무엇인가.

  범인은 존경 받는 인물, 교외에 사는 전문직 종사자. 동기는 불륜이나 체면. 불륜 사실이 들통나는 것보다 살인이 덜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범행 방법은 주로 배우자를 독살. 이런 배경이 있어야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완벽한 살인이 된다고 했다. 이에 비추면 2차 대전 당시 발생한 클레프트 턱 살인 사건(The Cleft Chin Murder, 갈라진 턱 살인사건)’은 흥미롭지 않았다고 오웰은 썼다.

  드 퀸시와 오웰의 글은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도 재미를 찾는 인간 심리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고 작가 자신이 대중의 심리에 동의한다는 건 아니다. 두 작가 모두 살인 사건에 대한 대중의 흥미를 대변하는 척하며 글을 썼지만, 이면에는 비뚤어진 관심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보인다. 작가 스스로는 선을 넘지 않은 것이다.

  작가가 선을 넘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살인 사건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던 대중 독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앞장서서 작가를 비판할 것이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의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가 이러한 논란에 휩싸였다. 1959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1966년에 출판된 책이다. 작가 카포티는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살인범을 인터뷰했다. 살인 사건의 동기와 과정, 살인범의 심리를 철저히 조사했다. 범죄자를 단순한 악인이 아닌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냈다.

  그래서 독자가 범죄자에게 공감하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점이 문제였다. 작가 카포티는 살인범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끔찍한 살인 사건을 책을 팔기 위해 선정적으로 소비했다고 했다. 피해자 유족의 항의도 받았다. 오늘날 <인 콜드 블러드>는 살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의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말썽 많은 작품이었다.

  실제의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에 독자는 관심을 주지만, 또한 그 작품 때문에 분노하기도 한다.

  전쟁은 오죽할까. 수 많은 살인이 일어난다. 게다가 클라우제비츠의 말마따나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 살인 이야기만도 버거운데, 얼굴도 모를 독자님께 정치 이야기까지 꺼내야 한다. 전쟁 만화가 불편하기 쉬운 이유다. 전쟁 만화를 잘 그리기란 어렵다.

<삼국지><효게모노>

  가상 속 전쟁 이야기는 덜 불편하다. 판타지 속 오크 군단이 몰살당하는 이야기에 눈물 흘릴 독자는 없다. 그런데 진짜로 일어난 전쟁 이야기는 불편하다. 마음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불편하다. 만화로 그리건 드라마로 만들건 쉽지 않다. 동시대의 전쟁은 특히 어렵다.

  25백 년 전에도 그랬다. 그리스 아테네의 시인 프뤼니코스는 인기 있는 극작가였다. 최초의 비극 작가 가운데 하나였다. 기원전 494년에 <밀레토스의 함락>이라는 작품을 썼다. 동시대의 전쟁이 배경이었다. 아테네의 자매 도시 밀레토스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시 정복당하는 내용을 다뤘다.

  아테네 관객은 눈물을 흘리며 불쾌해했다. 시민을 불쾌하게 만든 죄로 프뤼니코스는 법정에 섰다. 큰돈을 벌금으로 물고, 작품 <밀레토스의 함락>은 재공연이 금지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거리는 멀어지는 것 같다.

  충분한 거리가 확보된 예로 <삼국지> 창작물이 있다. 물론 동시대 사람이 보기에는 끔찍한 전쟁이었을 터다. 백 년 동안 전쟁의 시대가 끝난 다음 정착민의 인구가 1/3로 줄어있었다니 말이다. 그래도 우리 시대로부터는 18백 년 떨어진 전쟁이다. 마음의 거리가 충분히 멀다. 우리는 <삼국지연의>를 소설로, 만화로, 게임으로 즐긴다.

  어느 정도가 충분한 거리일까?

  야마다 요시히로가 그린 만화 <효게모노>를 읽으며 나는 거리의 문제를 생각했다. <효게모노>의 주인공 후루타 사스케는 센고쿠 시대의 일본 장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다. 후루타 사스케는 천하를 차지할 야심도 없고 전쟁의 명분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멋진 차를 마시고 아름다운 찻잔을 손에 넣으면 만족이다. 후루타 사스케가 보기에 센고쿠 시대의 사건과 전쟁은 미감과 미감의 충돌이다.

  센고쿠 시대와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는 일본 사람이 좋아하는 오락 거리다. 실제 일어난 전쟁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독자에게 충분한 마음의 거리가 있다. 끝난 지 4백 년 넘은 전쟁이라 그럴 것 같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미감과 미감의 충돌로 재해석해도 괜찮은 이유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어떨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일어난 조선 침략 전쟁이다. <효게모노>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다루면서도 오락 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후루타 사스케의 눈에는 이 전쟁 역시 조선의 찻잔을 가져가려는 미적 욕심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도 그런가.

  찻잔 욕심이 큰 주인공 후루타 사스케는 몰래 한국에 건너와 조선인 도공을 데려간다. 이 부분은 아마 작가 야마다 요시히로의 창작일 것이다. ‘무시무시한이순신의 추격을 따돌리고 겨우 탈출한다.

  작가도 나름대로 조심한다. 이순신이 훌륭한 장군으로 나오고,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가 조선에서 저지른 만행도 다룬다. 한편 작가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조선에 온 주인공 후루타 사스케는 조선인 여성 영자()’와 사랑에 빠진다. 작가의 의도는 조선과 일본을 화해시키려는 것이었을까? 의도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효게모노>를 퍽 좋아한다. 나는 별로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그래도 한국인 독자로서 나는 조선과 일본의 전쟁을 다룬 이 대목이, 읽다가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일어난 지 4백 년이 넘은 전쟁인데 그렇다. 임진왜란에 대해 한국 사람은 아직 일본 사람만큼의 마음의 거리가 생기지 않은 것일까.

  생각해 볼 문제다.

미즈키 시게루와 아트 슈피겔만

  그런데 미즈키 시게루와 아트 슈피겔만은 불과 한 세대 전의 전쟁 이야기로 재미있는만화를 그렸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을 형식과 내용 양쪽에서 살펴보자.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 형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배경 대 인물의 아이러니다.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그린 배경과, 특징만 잡아 호쾌하게 몇 개의 선으로 그린 인물의 대비가 일품이다.

  배경과 인물의 긴장이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 내용에서도 발견된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나는 그의 전쟁 만화에서 전쟁과 인간의 긴장을 본다. 나는 2021<지금, 만화><전원 옥쇄하라>의 평을 쓴 일이 있다.

  “주인공을 특정하기 어려운 이 작품에서, 옥쇄를 앞둔 (주인공) ‘전원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남는 일이다. 그런데 플롯의 이론에 따르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주인공은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인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열심히 하는가? 이 질문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들은 살고 싶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력감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 무력감의 정체는 군국주의에 짓눌린 인간의 무력감일 것이다.

  또한 그의 전쟁 만화에서 나는 역사와 개인의 긴장을 본다. <일본현대사>의 원제는 우리말로 <나의 쇼와사>. 제목에서부터 개인과 역사가 맞닥뜨린다.

  그러면서도 미즈키 시게루는 역사와 전쟁을 개인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놀라운 재주다. 그래서 우리는 한 세대밖에 되지 않은 실제 전쟁을 만화로 보면서도,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 역시 마찬가지다. 2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다루면서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려는 아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이들의 전쟁 만화는 재미있다. 지식 교양 만화로서 한 세대 전 전쟁에 대한 정보를 주고, 그 전쟁을 어떻게 바라볼지 세계관을 주며, 또한 젊은 만화가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재미로 준다.

  이렇게 하여 2천 년 전 호라티우스의 조언대로, ‘유용함과 재미를 모두 잡는 작품을 그렸다. 우리 역시 이 방법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필진이미지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불편한 미술관』,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피렌체 편』,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코인묵시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