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에 따른 스포츠 만화의 변화
이 글은 <한국 스포츠만화의 서사구조 연구: 80년대와 9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와 <불타는 그라운드 서사 특성 연구>의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한국 스포츠 만화의 시작
한국 스포츠 만화는 1960년대 클로버문고 3박이었던 박기준의 <올림픽 소년>(1963), 박기정의 <도전자>(1964), <치마 부대>, <황금의 팔>(1964)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프로레슬링을 소재로 한 박기정의 <레슬러>(1966), 권투를 소재로 한 <도전자>(1964)도 큰 인기를 얻었다. 스포츠 만화에 관한 관심은 1970년대에도 계속된다. 《새소년》,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아동 청소년 잡지를 중심으로 스포츠 만화가 연재되었고, 1970년대 초에는 일본 스포츠 만화도 인기를 얻었다. 표절이나 불법도용의 논란이 있지만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 <거인의 별>, <타이거 마스크>, 치바 테츠야(千葉徹彌) <내일의 죠(허리케인 죠)>, 가이즈카 히로시(貝塚ひろし) <태양을 쳐라> 등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종목은 단연 야구였다. 특히 고교야구가 많은 인기를 끌었다. 같은 시기 축구도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다만 축구는 야구와는 달리 국내 경기보다는 국가 대항전이 인기가 높았다. 1971년 대한민국이 개최한 <대통령 배 국제 축구대회>를 기점으로 축구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를 반영하듯 이현수의 <버어마의 축구장군>(1971), 계월희 <한국소년축구단>(1972), 이원복 <불타는 그라운드>(1973), 김철호 <축구황제의 하루>(1975), <나의 축구>(1975), 조치원 <축구돌이>(1975), 이상무 <울지 않는 소년>(1978)과 같은 축구 소재 만화들이 다수 등장한다.
한국 스포츠 만화의 시대별 특징
한국 스포츠 만화의 시작은 전술한 바와 같이 1960년대에서 비롯한다. 대체로 박기정 작가를 스포츠 만화의 개척자로, 그의 작품을 한국 스포츠 만화의 효시로 꼽는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도전자>는 재일교포 권투 선수 훈의 이야기를 통해 항일과 극일의 정서를 다루고 있다. <황금의 팔>은 현재 작품 전체를 구할 수 없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동네 야구로 시작해서 실력이 늘어 일본 원정 경기도 가는 내용이라고 한다. <레슬러>는 금메달을 획득해서 양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아마추어 레슬러 훈이가 가정 형편으로 인해 프로레슬러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박기준 작가의 <올림픽 소년>은 중학교 축구, 권투 선수의 전국대회 출전이나 국가대표 선발과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체로 1960년대 스포츠 만화는 주인공의 개인사 및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이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스포츠를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스포츠는 레저나 엔터테인먼트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체육’이나 ‘운동’의 느낌이 강했고, 경기 규칙이나 전술·전략에 관한 인식도 높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포츠 만화는 해당 종목에 관한 기본적인 규칙 정도만 소개할 뿐 종목 특성과 관련한 세부적이고 세밀한 부분까지 다루지는 못했다.
한국의 스포츠 만화에 관한 시대별 특징을 살펴봄에 있어 스포츠 만화가 큰 인기를 얻었던 198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1980년대는 한국 스포츠 만화의 전성기이면서 동시에 이를 기점으로 스포츠 만화 서사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1980년대 스포츠 만화 서사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국의 스포츠 만화 서사의 전체적 조명이 쉬울 것 같다.
1980년대 - 주인공 중심의 울분과 한의 표출
1980년대는 3S의 일환으로 정부 주도하에 스포츠가 대중문화 일부로 성장하면서 더불어 스포츠 만화도 성장한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 스포츠 만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울분과 한을 그 원동력으로 삼았고,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처절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속 주인공 오혜성은 학대받고 따돌림당하던 유년 시절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상처를 야구로 풀어내려 했고 이를 이루기 위한 혹독한 훈련은 부상이라는 좌절로 다가온다. 절망에 빠진 그를 다시 야구로 돌아오게 한 것도 세상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 원동력이었다. 오혜성은 무인도에서 썩은 해파리를 먹고, 발에 차꼬를 차고 모래밭을 달리며,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등의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된다. 허영만의 <무당거미>에서 이강토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산으로 들어가 곰과 대결하는 등의 고행을 통해 25kg을 감량한다. 그리고 그 복수심을 발판 삼아 이강토는 세계 챔피언이 된다.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도 늘 감량의 고통과 패배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복수심과 자학에 가까운 절제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1980년대 스포츠 만화 속 주인공은 고통을 감내하고 인내하며 극기하는 자기 학대적 모습을 보인다. 일본 만화에서는 이를 ‘스포콘’(스포츠+곤조의 축약어, 근성과 오기로 고난과 좌절을 극복해 성공하는 일본 스포츠 만화 서사의 한 갈래)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 스포콘은 일본 스포츠 만화의 영향을 받은 1980년대 한국 스포츠 만화의 표상이었다.
이러한 1980년대 스포츠 만화는 주인공의 서사가 곧 작품의 서사였다. 그리고 주인공 위주의 서사 중심이었던 만큼 주인공 1인의 능력에 따라 경기 승패가 좌우되었다. 그랬기에 만화적 상상력을 극대화한 주인공의 초인적 능력이나 마구와 같은 묘기가 자주 등장하게 된다. 또한, 1980년대 스포츠 만화 속 서사의 주요 주제는 ‘가족’의 문제였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가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가족의 복수로 통칭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극기하고, 결말을 가족애로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80년대 스포츠 만화는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반항아가 등장했으며, 196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가족의 문제’가 여전히 서사의 중심에 있었다.
‘나’의 서사가 중심이 되는 1990년대
1990년대 들어서면서 X세대, Y세대로 지칭되는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세대가 등장한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자유를 지향하는 세대였다. X, Y세대가 주요 소비층으로 성장하면서 90년대 대중문화는 크게 변화한다. 그 변화에 발맞춰 스포츠 만화의 서사도 80년대와 비교해 큰 변화를 보여준다. 1990년대 스포츠 만화는 1980년대와는 다르게 가족의 문제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대를 반영한 변화로 1990년대 가족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된 스포츠 만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즐겁게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스포츠에 참여한다. 물론 라이벌과의 경쟁·대결과 같은 구도는 여전하지만, 복수심에 불타 신체를 훼손하면서까지 훈련하는 처절한 모습은 사라진다. 등장인물의 원동력이 복수심에서 성공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스포콘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과 전술 전략을 활용한 지적 유희의 성격도 지니게 된다. 1990년대의 대표 스포츠 만화인 <슬램덩크>(1992)가 이러한 90년대 스포츠 만화 서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강백호는 특출난 운동신경을 지니고 있지만 <슬램덩크>는 강백호의 능력에만 기대지 않는다. 강백호가 농구를 선택한 이유는 가족과는 무관하며, 복수와도 거리가 멀다. 농구부 주장 채치수의 동생 채소연의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대사로 인해 강백호는 농구를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고 인간적인 성장을 이룬다. 전세훈의 <슈팅>(1996)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구성원 각각의 사연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 나동태만의 이야기가 아닌 팀원 모두가 개인과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작품 전체의 서사를 구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슬램덩크>도 <슈팅>도 주인공과 그 가족의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는 가족과 연결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양하고 개성 강한 인물군을 창조하고 각각의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풍성한 서사를 완성했다.
90년대 한국 스포츠 만화 서사의 또 다른 특징은 ‘복수’의 화소가 ‘경쟁’을 통한 ‘동반성장’이라는 측면으로 변화한 점이다. 90년대 스포츠 만화의 등장인물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종목을 선택하고, 복수의 대상과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닌 경쟁자로서 대결을 펼쳐 승패와 상관없이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대결을 통해 성장한다. 이러한 다양하고 풍성한 서사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큰 성공을 거둔다.
1970년대 스포츠 만화
1970년대는 1960년대, 1980년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작품의 중심 서사는 1960년대와 1980년대처럼 주인공 중심이었다. 주인공 위주의 서사 전개는 주인공의 능력에 기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일본 스포츠 만화의 영향으로 인해 스포콘의 양상도 보여준다. 일례로 1970년대 스포츠 만화 대표 캐릭터인 독고탁은 마운드에서 작은 체구를 던져 마구를 구사했고, <야망의 그라운드>에서 주인공은 스프링 킥이라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필살기를 구사한다.
또한, 1970년대 스포츠 만화 역시 ‘가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상무의 <울지 않는 소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고 이를 차지한 형을 미워한다. 축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만화지만 축구 경기 못지않게 중요한 서사는 주인공과 그 가족의 이야기이다. <울지 않는 소년>은 가족의 문제는 진지함으로 풀어가고, 축구는 웃음으로 표현한다. 가족의 복수나 갈등을 가볍게 그려낼 수는 없다 보니 스포츠 경기에서 유쾌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포츠는 이러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1970년대와 1980년대 스포츠 만화는 전문 지식이나 정보를 활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가족의 문제로 인해 심각하고 진지해진 분위기를 완화하는 역할로 스포츠는 그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대체로 70년대와 80년대 스포츠 만화는 진지한 가족 문제와 유쾌한 경기라는 서사 유형을 보여준다. 묘기에 가까운 장면이나 마구와 같은 특이점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과학적이고 가학적인 훈련 방법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심각한 가족의 문제와 상반되게 유쾌한 스포츠 경기를 전개해야 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스포츠 만화는 종목 자체의 실제적인 측면을 반영할 필요가 없었다.
2000년 이후 스포츠 만화: 종목의 다양화
2000년 이후 프로 스포츠, 관람하는 스포츠에서 스포테인먼트로 변화함에 따라 즐기는 ‘레포츠’의 개념이 자리한다. PC통신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동호회 활동은 즐기는 스포츠가 자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동호회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취미로서의 생활 스포츠가 정착한다. 프라이드, UFC 등 이종격투기를 넘어 종합격투기가 새롭게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관련 작품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존에는 권투, 킥복싱 정도였던 격투기 관련 만화는 종합격투기나 주짓수와 같은 새로운 장르를 소재의 영역으로 포함했다. 기존 스포츠 만화는 전문 선수의 영역에서 펼치는 서사가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2000년 이후 스포츠 만화는 전문 선수 영역이 아닌 취미로 ‘즐기는’ 동호인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90년대까지 특정 종목 선수로써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과 부담을 짊어져야 했던 주인공은 성공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즐기는 문화생활의 영역에서 서사를 전개할 수 있게 된다. 또, 2000년대 스포츠 만화는 종목이 다양화되었다는 특징도 포함한다. 물론 80년대에도 씨름, 싸이클, 마라톤,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종목을 다루는 작품이 있었지만, 차별점이라면 즐기는 스포츠이면서 개인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과학적 훈련법이나 전략 전술의 소개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웹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웹툰과 웹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인기 소재인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요소를 포함한 스포츠 만화 서사의 등장도 2000년대 스포츠 만화의 특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