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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고구마 웹툰의 생존 비결은?…나, 그리고 내 삶을 닮았다

답답한 고구마 작품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2024-10-17 김희경

답답한 고구마 웹툰의 생존 비결은?…나, 그리고 내 삶을 닮았다

  도파민(Dopamine) 중독의 시대이다. 도파민은 뇌의 신경전달물질로, 큰 자극을 받으면 분비된다. 인간은 도파민이 자주 분비될수록 쾌락을 느끼게 되고, 이 쾌감에 중독될수록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은 각종 숏폼 콘텐츠 등에 시시각각 노출되면서, 도파민 중독에 점점 더 빠지고 있다.

  그럴수록 사람들이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있다. ‘사이다전개의 콘텐츠이다. 웹툰을 즐기는 독자들도 시원하고 강렬한 전개의 작품을 보며, 사이다를 마신 듯 짜릿하고 통쾌한 느낌을 받길 원한다. 그러다보니 웹툰 시장에선 사이다 전개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정반대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고구마라는 조롱 섞인 혹평을 받으며 외면당했던 웹툰을 찾아보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고구마 전개의 작품들은 이야기가 느리게 진행되고 반전이나 결론을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고구마를 여러 개 먹은 것처럼 답답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처럼 부정적 의미로만 여겨졌던 고구마 작품은 어떻게 살아남게 된걸까?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는 사이다 작품의 홍수 속에서.

현실은 더 고구마다

  고구마 전개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작가들은 어쩌면 다소 억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형적인 서사 방식을 채택했을 뿐인데 많은 비판을 받았으니 말이다. 특히 웹툰 작가들은 더욱 그럴 수 있다. 최근 웹툰 독자들 가운데선 1, 2회차에 사이다 전개가 나오지 않으면, 잘 견디지 못하고 그만 보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웹툰이 세로로 이어지다 보니 독자는 스크롤을 쭉 내리며 감상을 하다가 전개가 느려지는 순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이 멈춤이 몇 번 발생하면 지루하다고 느끼게 된다. 웹툰의 세로 스크롤 방식이 고구마와 사이다를 가르는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고구마 전개 작품이 주는 멈춤의 미학에 천착하는 독자들은 여전히 많다. 각 장르별로 고구마 전개의 양상은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구마 전개는 스토리노믹스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영웅신화의 전개 양상을 따른다. 영웅신화는 고난과 역경-모험-극복-성장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구조는 아주 오래 전 만들어진 그리스로마 신화부터 시작해 오늘날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수많은 콘텐츠에서 반복·재생산되고 있다. 그토록 긴 시간 이어져 오고 있지만, 인류가 매번 매료되고 선호하는 이야기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장점에도 고구마 전개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엔 이유가 있다. 고난과 역경과 마주했을 때, 문제를 말끔히 해소하고 통쾌하게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웹툰 시장을 중심으로 회·(회귀, 빙의, 환생) 소재가 빠르게 확산된 주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회귀, 빙의, 환생과 같은 초현실적인 설정이 있어야만 통쾌한 역전의 서사를 쉽게 풀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삶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 현실에선 고구마를 100개 먹은 느낌 이상으로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고, 이를 극복하는 것도 너무나 어렵다. 그렇기에 현실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은 현실에서 도무지 일어나기 힘든 사건들을 배치해 매회 사이다를 선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이다 작품은 초현실 설정 등을 통해 독자가 원하는 타이밍에 맞춰 매회 통쾌함을 안겨주긴 한다. 하지만 이 사이다에 중독되다 보면 웬만한 반전이 나와도 점차 무뎌지게 된다. 도파민 중독에 빠지면 갈수록 더욱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다 보면 사이다 전개로만 이어지는 작품에 독자들은 오히려 쉽게 질릴 수 있게 된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더 강력한 반전이 나오지 않으면 김이 빠진 사이다를 마시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마 작품은 사이다 작품과 정반대로 현실을 깊게 파고들고 생생하게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실에선 수많은 고구마를 먹고 또 먹어야만, 곧장 죽을 것만 같은 좌절과 괴로움을 겪어야만 비로소 시원하고 짜릿한 사이다를 맛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해당 작품들은 그 지난한 과정을 담아내는 것에 충실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구마 전개는 필연적으로 장시간 지속되게 된다.

  고구마 웹툰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큰 공감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 버둥대고 있는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갑갑한 현실에 함께 스스로를 내던진다. 주인공과 같이 버티고 인내하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찾아온 사이다 같은 역전과 반전에 벅찬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매회 사이다 전개가 나오는 작품에선 쉽게 맛볼 수 없는, 폭발적이고 커다란 환희에 해당한다.

  고구마 작품이 유독 현실 그대로를 복사하고 고증해 내는 듯한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웹툰 가운데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며느라기>는 며느리들이 겪는 고충과 설움을 그리며 고구마를 여러 개 먹은 듯한 느낌을 줬지만, 오히려 호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서울 소재 아파트를 갖고 있으며, 억대 연봉도 받고 있는 한 대기업 부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 부장은 남들 얘기는 무시해 버리던 꼰대였는데, 이는 현대인이 가진 허세와 허영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김 부장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상가 투자까지 실패해 퇴직금도 날린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김 부장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희망퇴직을 하게 된 중장년층의 막막하고 어려운 현실, 실제 현실의 부동산 시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폐해 등이 작품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재와 전개 모두 고구마임에도, 해당 작품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지나치게 좋은 인물이라 일부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어떤 고구마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는 건 나의 곁을 지켜주는 몇 명의 사람 덕분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조차 현실과 닮았는지 모른다.

  ‘개연성또한 고구마 전개를 통해 채워나갈 수 있다. 사이다 전개에선 빠른 속도, 통쾌한 반전을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개연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환 작품 중에선 사이다 전개로 사랑을 받았지만, 개연성 논란이 일었던 경우도 많다. 작품 속 주인공은 목표를 이루고 성장하기까지 수차례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부실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심지어 극단적 위기에 처했는데도 회귀, 빙의, 환생을 해버리면서 순식간에 위기에서 벗어나 버리는 경우도 있다. 작가 입장에선 손쉽고 빠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마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 되지만, 이런 설정이 지나치게 반복되면 독자들은 어느 순간 스토리에 더 이상 설득되지 못한다.

설렘부터 사랑까지섬세한 감정 묘사도 고구마가 제격

   고구마 작품의 또 다른 장점은 감정의 세분화이다. 전개가 느린 작품들 가운데는 캐릭터의 내면 심리 묘사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고구마 상황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개인의 불안과 두려움, 그럼에도 품게 되는 작은 희망과 의지를 담아낸다. 사이다 작품이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사건의 발생과 반전을 통한 빠른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고구마 작품은 사건 해결보다 각 인물의 감정 스펙트럼을 넓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전문가 리사 크론은 저서 <스토리만이 살길>에서 스토리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사건을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독자들이 주인공의 생각과 시선을 잘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감정의 양상과 흐름을 정교하게 표현할수록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실제 사람의 감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소소한 기분과 느낌이 차근차근 쌓이고, 그 쌓인 감정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며 변화를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과정이 대부분 생략되고 문제가 일시에 해소되는 사이다 전개 작품에선 통쾌함은 느낄 수 있을지언정, 깊은 내면의 공감을 느끼긴 어렵다. 나 자신은 답답한 현실을 살며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역경을 손쉽게 이겨내고 모든 것을 멋지게 해결하는 캐릭터를 보게 되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일도, 마음을 드러내는 일도, 마음을 얻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와 달리 세련되게 사랑을 쟁취하는 사이다 작품 주인공을 보면, 부럽긴 하지만 공감을 하긴 어렵다. 반면 고구마 전개는 나와 캐릭터의 닮은 면이 많기 때문에, 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감정을 동일시할 수 있다. 

  고구마 전개가 로맨스물에 제격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맨스물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 주인공들의 만남과 갈등, 극복을 나타내는 주요 사건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하더라도, 감정 표현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사건 못지않게 인물들의 시시각각 요동치는 감정을 정교하고 세심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에서 감정은 때로 큰 사건 없이 커지기도 한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 사이엔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순간에도, 감정이 싹트고 켜켜이 쌓이게 된다. 따라서 이 감정의 섬세한 흐름과 변화를 잘 포착해 내는 작품은 더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삼각관계, 사각관계를 중심축으로 한 웹툰에서도 감정 묘사가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타인의 개입으로 이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불안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그 안에선 인물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하고, 깊은 상처를 주고받게 되기도 한다. 사랑하지만 마음껏 사랑할 수 없고 엇갈림만 반복되는 이 흐름은 전형적인 고구마 전개에 해당한다. ‘사랑은 타이밍’ ‘시절인연과 같은 말처럼 실제 많은 작품들이 사랑 이야기를 할 때 시간적 요소를 활용해 의도적으로 엇갈림과 지연을 발생시키도 한다. 이에 따라 답답한 흐름이 이어지지만, 독자는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에 동화되어 마음을 더욱 애태우게 된다. 이 흐름 역시 현실과 닮았다. 현실에선 만화보다 사랑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이뤄지기 힘들 때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이자 묘미에 해당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로맨스물의 고구마 전개에도 인내하며 끝까지 스크롤을 내리게 된다.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마침내 사랑의 완성을 목도하며 달콤하고 벅찬 환희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매력에 빠진 독자들은 여전히 고구마 전개의 로맨스물을 꾸준히 찾아 나서고 있다. 

  이처럼 고구마라는 특정 단어의 틀에 갇혀 일괄적으로 매도당했던 작품들도 한편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이 탐닉하고 있다. 현실에선 내 답답한 마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웹툰 주인공은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아주니까. 비록 사이다는 늦게 마시게 되지만, 기다리다 보면 더 큰 통쾌함을 맛볼 수 있게 해주니까. 분 단위, 아니 초 단위로도 움직이는 내 설렘과 사랑을 정교하게 펼쳐 보여주니까. 그리하여 앞으로도 고구마 작품은 사이다 작품 홍수 속에서도 끝까지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현실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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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글쓴이 김희경은 문화콘텐츠학 박사로 현재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의 개념, 상상력과 문화콘텐츠,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대중문화의 이해, 미디어 스토리텔링, 영화보기 영화읽기 등을 강의하고 재미창작소에서 문화콘텐츠 관련 연구도 하고 있습니다. 또한 OTT 콘텐츠 관련, 칼럼도 매월 기고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모빌리티와 영화>, <콘텐츠 트렌드>, <트랜스미디어 콘텐츠의 세계>, <스낵컬처 콘텐츠>, <테마공간의 스토리텔링과 이미지텔링>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