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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직업물

현재 작품 속에서 직업은 어떨게 표현되는지 알아봅시다

2024-11-07 이용건

유능한 직업물

1. 직업

  '직업' 시대에 개인이 사회에 얼마나 적응했는지 측정하는 도로 사용된다. 이제 유능함이란 직업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는지 여부로 결정되기 보다는, 수행하는 업무가 얼마나 전문적인지, 희귀한지, 그래서 돈을 많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특정한 직업들 자체에 이미 유능함을 귀속시킨다. 이른바비판의 세례 받은 세대라면, 이것을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가 개인의 자체를 상품화한 결과로 이해할 것이다. 또한 비판의 세례를 받은 세대로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위와 같이 생각해왔다. 문제는 개인이 삶을 영위하는 직업 선택 과정 자체가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그것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좌파적) 부채감과 그것이 영원히 이루어질 없을 것이라는 우울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 우리는 문제 많은 현재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현재에서 벗어날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자유주의를 탈피할 없다는 불가능성 자체에만 주목하는 우울감으로, 웬디 브라운이 지적한'좌파 멜랑콜리' 부를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삶의 안정적 영위에 필수적인 직업 선택이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울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직 그것만이 직업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직업 자체에 유능함을 귀속시켰다는 (나를 비롯한 좌파들의) 주장은 시장 논리를 비판하기 보다는, 시장 논리의 위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웹툰 작품 속에서 직업에 관한 표현이 적절히 이루어져있는지에 관한 칼럼을 기고해달라는 청탁 메일에서, 시대에서 직업이란 무엇인지에 생각하는 것은 주제를 벗어나도 너무 많이 벗어난, 최악의 글쓴이만 짓이지만 아마... 다음 글에서도 반복될 같다.

△ 네이버 웹툰 중 <운명을 보는 회사원> (출처 : 네이버 웹툰)

  굳이 직업 자체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 까닭은, 최근 유행하는 직업물, 또는 회사원 회귀물의 직업 표현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회사원 회귀물 웹툰은 대부분 미래를 알고 있거나, 재벌 회장 또는 노련한 회사원의 영혼이 젊은 신입사원의 몸으로'다시 태어나는' 설정으로 웹툰을 전개한다. 핵심은'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주인공은 정신적, 신체적 한계 그러니까 모든 무능함을 다시 태어남으로써 제거한 뒤에, 유능함으로 모든 위기를 해결하는 영웅이 된다. 그런데 영웅은 이상 세계를 구하지 않는다. 영웅은 오직 자신만을 구한다. 그렇기에 회사원 회귀물 웹툰 속에 등장하는 직업의 표현은 직업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능함을 표현한다. 기업의 인수 과정, 프로젝트 진행 과정이 상세하게 표현되지만, 그러한 상세한 표현은 유능함의 물화된 형태이다.

  굳이 글을 어렵게 필요는 없으니, 쯤에서 간단하게 말할 있을 같다. 시점에서 회사원 회귀물은 대리 만족을 위한 것이다. 방금 나는 대리 만족에 불과하다.’ 작성한 것을 지우고, 대리 만족을 위한 것이다.’ 수정했다. 개인이 보유한 능력의 정도와, 개인에게 분배되는 재화가 완벽히 일치하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라는 능력주의적 세계관을 답습해야 하는 독자들이 유능함을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마음을불과하다.’ 표현할 있는지 없어서였다. 웹툰에서 대리만족을 해서 안될 이유는 없다. 대리 만족이 가능하다는 것은, 적어도 독자가 웹툰에 완벽히 몰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주인공의 유능함에 만족할리가 없지 않은가. 

△ 웹툰 원작 <재벌집 막내아들>에 관한 비판. (출처 : 한겨레 21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009.html)

  그러나 동시에 유능함에 집착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를 답습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윤리적 고민 또한 유의미하다. 적어도 나는 대리 만족에서 오는 즉각적인 쾌락을 즐기는 동시에, 이와 같은 윤리적 고민을 가지고 있다. 직업물 웹툰을 4시간 내내 눈을 없을 정도로 즐긴 후에,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에 복무하는 웹툰을 즐겨버렸다는 점에서 찾아오는 좌파적 멜랑콜리(즐기면 그만일 것을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비판의 세례 받은 분들은 나에게 공감하실지도 모르겠다. 삐뚠 세계를 삐뚤게 보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올바른 세계 인식이라는 비판의 세례에 잠식되고 나면, 세계의 삐뚠 모습만을 찾게 된다. 삐뚠 세계를 삐뚤었다고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세계를 자신이 삐뚤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유일한 길은 세상의 불합리한 구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유 통해 우리를 구속하는 세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자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놀랍게도 모든 재미없는 생각은 네이버 웹툰<A.I. 닥터>를 4시간 동안 새벽동안 정주행 후에 떠올린 생각들이다.

1. AI닥터

△ 네이버 웹툰 <A.I. 닥터> (출처 : 네이버 웹툰)

  <A.I. 닥터> 문제적이다. 너무 재밌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세심하게 직업을 표현한 작품 중에서, 주인공이 비현실적인 유능함을 갖지는 않은 작품을 찾고 있었다. <순정 히포크라테스>, <무직백수 계백순>, <수희0> 정도가 후보였고, 나는 혹시 몰라 내가 모르는 직업물 웹툰이 있는지 잠깐만 찾아볼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웹툰 리뷰 블로거가 <A.I. 닥터>추천하는 직업물 웹툰중 하나로 뽑은 게시글을 보았다<A.I. 닥터>는 제목에서 부터 주인공이 A.I.를 빙자한 일종상태창 통해 모두를 놀라게 하면서 만인을 치료하는 과정이 예상되지 않은가? 실제로 <A.I. 닥터>A.I. 진단 기계가 주인공의 몸속에 불의의 사고로 인해 이식되어, 이를 통해 천재 의사로 성장하는 스토리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이 맞아 떨어지는 스토리를 열한시부터 새벽 세시까지 봤다. 그러니까.. 이런 재미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재밌는 웹툰이 능력주의적 대리 만족에불과하기에,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나를 윤리적이고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배신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비현실적으로 유능한 주인공이 모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거나 치워버리는 사이다 회귀물 웹툰을 재밌어한다..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유능함으로 치정하는 것에 희열도 느낀다. 나는 이걸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내가 할일은 이제 변명하는 것이다. 누구도 나의 웹툰 취향에 관해 비판하거나 판단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 변명을 주절거리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일 것이다. 사라 어메드의 말처럼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는 언제나 말하고 싶어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A.I. 닥터> 주인공의 입을 빌려 변명을 시작해보자면, 사람은 언제나돈을 많이 벌고 싶어 유능함을 가지길 원하는 동시에, 직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취가 존재한다. 사람을 많이 살리고 싶어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돈을 벌고도 싶어한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이 언제나 복잡한 존재라는 주장이라기 보다는, 상반되는 욕망이 언제나 연관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윤리적 고민은 즉각적인 쾌락 때문에 발생하고, 즉각적인 쾌락 때문에 윤리적 고민이 발생한다. 모든 장애물을 회귀, 상태창, A.I.  등으로 상쇄하여 서사를 가속시키는 현재의 웹툰이 비판 대상이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 재밌기 때문이다.

2. 킬링타임

   쯤에서 킬링 타임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할 같다. 어떠한 작품이킬링 타임용으로 보기 좋다.” 말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솔직하지 못한 표현이다. ‘킬링 타임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작품을 즐겼다는 표현이며, 작품에서 빠져나온 후에, 남들이 보기에 그렇게 대단한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하는 일종의 변명이다. ‘걸작은 아니라는 방패는 자신이 클리셰로 범벅된 웹툰을 즐겨 버리고 말았다는 죄책감 또는 수치심에서 기인한다. 이는 취향 존중 시대에서도 클리셰 웹툰을 즐기는 독자들이 자신이 즐기는 웹툰이 적어도 훌륭하거나, 걸작이라거나, 뜻깊은 작품은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회귀물과 같은 클리셰적인 웹툰을 즐기면서 수치스러워하고 그것을 말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은 아닐까 고민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에 관한 리뷰 또는 해설은 (지금 정확히 내가 쓰고 있는 글과 같이) 논리적인 글이라기보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구구절절한 변명의 형식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킬링 타임용 작품이라는 말을 몰입도가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대체해서 표현해도 좋을 같다. 그렇다면 <A.I. 닥터>킬링 타임용 작품 맞고, 작품이 우리의 시간을 빠르게 죽일 있었던 이유는 세밀한 직업 표현에서 비롯한다. 주인공이 말하는 의학 용어를 이해하지 못할수록, 주인공은 유능해지고, 주인공이 유능해질수록 우리는 작품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A.I. 닥터>  의학 용어가 유능함 위한 장치로서만 기능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르다<A.I. 닥터> 회사원 회귀물 웹툰보다 (적어도 나에게는) 재밌는 이유 하나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스토리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유능함으로 치장함으로써, 타인을 구한다. 웹툰에 등장하는 상세한 의학 용어들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인공이 사람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독자는 작품에 몰입할 있다. 작품 표현되는 직업의 직무를 세세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직무의 최종적 목표에 감응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세세한 고증보다는 주인공과 목적을 공유하길 원한다. , 주인공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인공의 유능함을 응원한다.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가 불평등한 재화 분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유능함 활용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를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유능함을 거부해야 한다는 당연해보이는 사실에서 한발자국 떨어져보자. 우리는 유능함을 거부하거나 전복하기 보다는, 그러한 유능함을 이용할 있다. 주인공의 목적을 응원하는 도구로서 말이다.

  우리는 모든 작품을 보며 윤리적 고민을 하면서 동시에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몰입감을 즐기면서 동시에, 그것을 빠져나왔을 재밌게 보지 않은 하면서 킬링 타임용에 불과하다는 표현으로 작품들을 깎아 내릴 필요도 없다. 작품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흔적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들이 재밌지 않았다면 흔적이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아주 다양한 직업을 자체로 다루는 웹툰이 많아지길 간절히 희망한다. 시대에서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설명될 없다. 적어도 하루에8시간 앉아있는 일에는 일에 관한 조금의 애정, 또는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직업에서 어떤 부분을 원동력으로 삼는 지를 살펴보는 일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든다. 유능하지 않아도 좋다. 손만 댔다 하면 사고를 치는 신입사원의 이야기라도 좋다. 나는 내가 대학생 까지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직업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고, 일에 애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종류만큼, 직업물이 다양해질 있지 않을까?

필진이미지

이용건

만화평론가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수상
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