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원피스를 '만화 추천' 1순위로? 세대별 '명작'의 기준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대, 웹툰과 만화 속에서 드러나는 민주적 문화 가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2025-08-18 한창희

원피스를 '만화 추천' 1순위로세대별 '명작'의 기준

세대별 텍스트 위계와 문화적 정전의 재편

내가 몰랐던 명작들

3월의 따뜻한 봄볕이 만화웹툰학과 강의실 창문으로 스며들던 그 오후, 나는 나의 모든 문화적 전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만화사와 이론' 2학년 첫 수업에서 던진 평범한 질문이 예상치 못한 인식의 지각변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만화 명작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자유롭게 추천작을 말해보세요."

강의실 분위기를 파악하고 학생들의 관심사를 알아보기 위한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화이트보드에 '명작의 조건'이라고 적어 두고 학생들의 반응을 기다리며 나는 이미 예상되는 답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 혹은 윤태호의 미생정도가 나올 것이라는 안일한 예측이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손을 든 학생이 주저 없이 내뱉은 작품명은 내가 속한 문화적 좌표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원피스!"

순간 강의실이 조용해졌고, 나는 화이트보드에 마커펜으로 글을 쓰던 손을 멈췄다. 1997년부터 27년 넘게 연재되고 있는 장편 일본 소년 만화를, 그것도 상업적 성격이 강한 주간 연재물을 대학생이 첫 번째 명작으로 추천한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 학생은 잠시 위축된 듯했지만, 곧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왜 안 되나요? 교수님도 읽어보셨잖아요?"

그 순간 나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야 했다. 나는 원피스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일본 소년 만화의 대표작이라는 피상적 정보만 알고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나 작품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학생 앞에서 그런 무지를 시인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우회적인 질문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 물론 알고 있죠. 그런데 왜 그 작품이 명작이라고 생각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해볼 수 있을까요?"

학생의 대답은 충격적일 정도로 정교했다. "우선 27년 넘게 연재되고 있는데도 스토리가 전혀 늘어지지 않아요. 매화마다 새로운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서사의 일관성을 잃지 않습니다.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을 다 해놓고 시작한 게 분명해요." 장편 서사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주간 연재라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27년간 그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성취였다.

"그리고 단순한 모험 만화가 아니라 동료애, 꿈에 대한 의지,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용기까지 다뤄요. 루피가 '해적왕이 되겠다'라고 말할 때, 그건 단순히 힘이나 명예를 원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각 동료가 가진 꿈과 상처, 성장 과정이 정말 깊이 있게 그려져 있어요."

학생은 구체적인 예시를 들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론 파크 에피소드에서의 나미의 과거와 해방, 알라바스타에서의 비비 공주와 국가에 대한 책임감, 엔니에스 로비에서의 로빈의 구원과 동료애의 진정한 의미를 언급했다.

"어떤 철학서보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줬어요. 친구란 무엇인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진정한 강함이란 무엇인지.... 이런 걸 원피스를 보면서 배웠거든요."

나는 점점 더 당황스러워졌다. 학생의 분석은 단순한 팬심을 넘어 상당히 깊이 있는 작품 읽기에 기반하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오다 에이치로 / 슈에이샤. 한국어판 발행: 대원씨아이.

"맞아요. 원피스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에요." 다른 학생이 거들었다. "저도 중학교 때부터 계속 보고 있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게 돼요.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어서 봤는데, 나이가 들면서 보니까 진짜 깊은 메시지들이 많더라고요."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명작'이라고 여겨온 작품들과 학생들이 생각하는 '명작'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에게 원피스는 단순히 '장기 연재 상업 만화'였지만, 학생들에게는 '인생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제시한 작품들은 더 충격적이었다. "저는 헬싱을 추천하고 싶어요." 히라노 코우타의 다크 판타지 만화에 대해 나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학생은 "표면적으로는 뱀파이어 액션물이지만, 실제로는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은 탐구"라며 철학적 깊이를 설명했다.

"저는 전자오락수호대!" 가스파드 작가의 웹툰에 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순간 강의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만화를 가르치는 교수가 학생들이 추천하는 작품을 모른다니.

".... 제목은 들어봤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한 번 더 자세히 설명해 볼래요?"

학생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주인공이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을 도와주는 요원으로 일하는 이야기인데요, 단순히 게임이 재미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민을 깊이 있게 다뤄요."

버닝 이펙트, 별이삼샵까지 이어진 추천 목록에서 나는 대부분의 작품을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 학생의 "당연히 아시죠?"라는 질문에서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말속에는 '만화를 가르치는 교수라면 당연히 알 것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난 후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깊은 자성에 빠졌다. 만화학과 교수로서 10년 넘게 강의를 해왔지만, 정작 현재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무지했다니. 마치 서로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는 듯한 격리감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던 것일까?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이두호의 객주, 허영만의 식객과 같은 '검증된' 작품들만 다루며 스스로 만화 전문가라고 자부해왔던 것은 아닐까? 학술논문과 연구서, 공식적인 비평서들만 읽으며 현장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특히 학생이 던진 "당연히 아시죠?"라는 질문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 속에는 비난의 의도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뼈아팠다. 순수한 기대와 신뢰가 담긴 질문이었기에 더욱 부끄러웠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무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소통 구조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는 단순한 취향의 차이를 넘어서 완전히 다른 문화적 언어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학생들이 추천한 작품들을 직접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교육자로서 책임감에서였다. 학생들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그들이 열광하는 작품들을 이해해야 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먼저 전자오락수호대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첫 화부터 읽어 나가면서 나는 점점 이 작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주인공 패치는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이 원활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전자오락수호대의 요원이다. 뻔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화를 읽어 나가면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게임은 재미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뇌를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일하는 주인공들조차 자신들의 존재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 가스파드 / 네이버웹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게임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었다. 게임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현실이며,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를 맺고 성장해 간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작품의 연출 방식도 웹툰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나는 컴퓨터를 껐다. 예상보다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이었다. 학생이 왜 이 작품을 명작으로 추천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서 읽은 버닝 이펙트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디스토피아적 배경 설정이 단순히 스펙터클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고 있었다. 작품 속 도시에서는 어떤 범죄든 사형으로 처벌한다는 극단적인 법이 시행되는데, 이런 설정을 통해 작가는 법과 정의, 권력과 저항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별이삼샵은 또 다른 깊이를 보여주었다. 2000년대 중반이라는 특정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현재 20~30대들의 청춘을 재현하면서, 그 속에 담긴 순수함과 서투름, 그리고 성장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발신자 제한 번호 서비스인 '*23#'을 통해 마음을 전하는 설정은 단순한 로맨스 장치가 아니라 소통의 어려움과 용기, 그리고 진정성에 대한 은유였다. 학생들이 추천한 웹툰들을 어느 정도 섭렵한 후, 나는 마침내 원피스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109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망설여지긴 했지만, 학생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추천한 작품을 모른 채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클리셰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10, 20권을 넘어가면서 나는 점점 이 작품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학생이 말했던 것처럼, 작가는 정말로 전체적인 구상을 치밀하게 해 놓고 연재를 시작한 것 같았다. 초반에 등장했던 사소한 설정들이 수십 권 후에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리고 에피소드마다 다뤄지는 주제들의 무게감도 상당했다. 나미의 과거를 다룬 아론 파크 편에서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가, 로빈의 과거를 다룬 엔니에스 로비 편에서는 권력과 지식, 그리고 진실의 문제가 깊이 있게 탐구되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가의 세계관이었다. 원피스의 세계는 단순한 선악 구도로 나뉘지 않았다. 해군은 정의를 추구하지만 때로는 부패하고 독선적이며, 해적들은 무법자지만 때로는 더 인간적이고 도덕적이다. 이런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관은 현실 세계의 복잡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복잡한 주제들과 철학적 성찰들이 결코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유머와 액션, 감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한 달 넘게 틈틈이 읽어서 겨우 50권 정도를 읽었을 때, 나는 학생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명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패러다임의 충돌: 명작 기준의 근본적 전환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세대별 명작 기준의 근본적 차이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문화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 자체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기성세대에게 명작은 무엇보다 '역사적 가치'의 산물이다. 만화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작품, 후대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작품, 비평가들과 학계에서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은 작품들이 명작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가 명작인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탐구를 담고 있고, 만화라는 매체의 서사적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확장했으며, 수많은 후대 작가의 창작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판단할 때 원피스나 최근의 웹툰들은 아무리 재미있고 대중적 인기가 높아도 진정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명작의 핵심 기준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삶과 얼마나 의미 있게 소통하는가'였다. 원피스가 그들에게 명작인 이유는 작품이 현재 진행형으로 자신들의 고민과 열망을 생생하게 대변하고 있고,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살아있는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살아있는 문화'를 중시한다는 점이었다. 매주 새로운 에피소드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다음 전개를 예측하며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문화적 경험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이는 완결된 작품을 혼자 읽고 개인적으로 감상하던 기성세대의 문화 소비 패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었다.

이런 차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수업에서 학생들과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지난번 여러분이 추천해 주신 작품들을 읽어보았습니다. 특히 전자오락수호대는 처음에는 게임을 소재로 한 단순한 작품인 줄 알았는데, 읽어 보니 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정체성 문제를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학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교수가 자신들의 추천작을 직접 읽어보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반응 자체가 세대 간 문화적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불새아키라같은 작품들은 추천하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훌륭한 작품들인데 말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가 먼저 대답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다가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좀 어려워요. 물론 대단한 작품이라는 건 알겠는데,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도 좀 애매해요."

ⓒ 데즈카 오사무 / 고단샤. 한국어판 발행: 학산문화사.

다른 학생이 이 말에 용기를 얻어 거들었다. "불새같은 작품은 정말 철학적이고 심오한 건 맞는데, 읽고 나서 ', 재미있었다' 이런 느낌보다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라는 느낌이 더 커요. 반면 원피스는 바로 이해되고, 감동도 직접적으로 오고, 친구들과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도 연재되고 있으니까 매주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걸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재미가 있어요."

또 다른 학생이 덧붙였다. "불새를 읽으면 '공부하는 기분'이 들어요. 물론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숙제하는 것 같은 느낌? 반면 원피스를 읽으면 정말 즐겁고, 캐릭터들과 함께 모험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루피가 동료들을 구하러 갈 때의 감동이나, 각 캐릭터의 꿈과 성장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민과 직접적으로 연결돼요."

이 대화를 통해 나는 젊은 세대의 문화 소비 패턴에서 '접근성''공유 가능성', 그리고 '현재성'이 작품 가치를 판단하는 핵심 요소임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작품이 얼마나 쉽게 이해되고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자연스러운 친구들과의 대화 소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 진행형으로 자신들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지가 명작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웹툰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만들어낸 문화적 변화도 이런 패러다임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해진 요일에 업데이트되는 실시간성,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접근성, 댓글과 평점을 통해 다른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참여성은 전통적인 출판 만화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매체의 기술적 진화를 넘어서 명작의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시간의 검증'이라는 기준에서 '현재적 의미''사회적 공감'이라는 새로운 기준으로의 이동이었다.

 

문화적 위계의 해체와 새로운 가치 체계

이런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의 문화적 위계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순수 예술''대중 예술', '고급문화''저급 문화'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다. 만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가주의적 작품''상업적 작품', '예술만화''오락 만화'라는 구분이 마치 자명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런 위계 구조에서 비평가와 학자들이 인정하는 작품만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고,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이런 위계적 구분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들이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는가', '얼마나 현재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얼마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가'가 그들의 핵심 판단 기준이었다. 작품이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문학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보다 지금 여기서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가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세대 특성을 넘어 문화적 권력 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 소수의 전문가와 엘리트가 결정하던 문화적 가치가 이제는 대중이 직접 참여하고 선택하는 문화적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웹툰 플랫폼에서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과 평점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입소문이 작품의 문화적 영향력을 결정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런 변화가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즉각적 만족과 감정적 반응만을 중시하는 문화 소비 패턴은 분명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깊이 있는 사고나 비판적 성찰의 기회가 줄어들고,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중요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리즘에 의해 개인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추천받는 '필터 버블' 현상으로 인해 문화적 다양성이 오히려 축소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의 대중화와 민주화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기성세대가 이런 변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와 새로운 문화적 감수성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핵심 과제가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교육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고 복잡해진다.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정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전통적 명작들이 가진 깊이와 완성도를 인정하면서도, 현재적 작품들이 보여주는 생동감과 현재성의 가치를 함께 탐구할 때, 비로소 문화의 지속과 혁신이 진정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문화적 가치의 재편은 예술계에서도 흥미로운 현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최근 벨기에의 개념미술가 일란 마누아흐가 원피스의 모든 디지털판을 인쇄해 21450페이지짜리 단일권으로 제작, 263만 원에 판매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물리적으로 읽을 수 없는 '조각품'으로 분류되며, 마누아흐는 이를 통해 디지털 시대 만화의 물질성과 소유 개념을 문제화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직면한 문화적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화는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소유되고 전시되기 위해 존재하는가? 마누아흐의 작업이 만화를 "독자를 위한 사용 가치와 수집가를 위한 교환 가치를 품은 듀얼 오브젝트’"로 규정한 것처럼, 원피스는 이미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서 문화적 상징이자 경제적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 실제로 이 읽을 수 없는 책이 50권이나 판매된 사실은 문화 콘텐츠의 가치가 더 이상 내용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불거진 저작권 논란이다. 슈에이샤 측은 "공식적이지 않다"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JBE 출판사는 "물리적으로 읽을 수 없어서 저작권 침해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DC 코믹스의 패널을 그대로 복사해 수천만 달러에 팔았던 사례를 연상시킨다. 결국 만화라는 매체는 창작물인 동시에 전유와 재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 과정에서 그 가치와 의미가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원피스를 명작 1순위로 추천한 학생의 목소리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표명을 넘어선 시대정신의 발현으로 읽힐 수 있다. 2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속된 서사적 일관성, 전 지구적 규모의 문화적 파급력,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세대들이 보여주는 깊은 몰입과 애정이 증명하듯, 새로운 시대의 명작은 과거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도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명작이란 과거의 권위와 현재의 생명력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의 탄생이다. 강의실에서 일어난 이 작은 '문화적 지진'이 던진 질문은 우리 시대 문화 담론의 핵심을 관통한다. 과연 우리는 문화를 소유하는가, 아니면 문화가 우리를 선택하는가? 마누아흐의 읽을 수 없는 원피스263만 원에 팔리고, 내 학생들이 그 같은 작품에서 인생의 교훈을 찾는 현실이 이미 답을 제시한다. 문화는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살아있는 현재다. 명작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독자들과 만나며 의미를 재발명하는 역동적 존재다. 결국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창조할 것인가?

필진이미지

한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