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자율규제라는 책임
자율규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은 ‘검열’을 떠올린다. 실제로 검열은 ‘언론, 출판, 보도, 연극, 영화, 우편물 따위의 내용을 사전에 심사하여 그 발표를 통제하는 일’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 10월 영화 사전심의가 위헌결정을 받으며 사라졌지만, 자율규제는 여전히 검열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규제’라고 하면 타율적 제한에 무조건 따르는 수동적 행위를 전제하기 때문에, 자율규제도 ‘규제’에 초점을 맞춰 기존 심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율규제는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씌워지는 족쇄가 아니다. 오히려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세운 최소한의 약속, 즉 ‘책임 있는 자유’를 실현하는 장치다.
웹툰 자율규제 도입 배경
만화를 읽고 영향을 받은 기억이 있다면 모두 주지하듯, 만화는 동시대와 연관되어 존재하며 그래서 사회적 책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음란성, 폭력성은 만화의 부정적 시각을 부추길 때 자주 거론됐다. 2012년 3월 1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웹툰 심의를 반대한다는 만화가들의 릴레이 1인 시위도 이러한 시각에서 연유한다. 만화가들의 1인 시위는 2012년 1월, 학원 폭력 묘사 등을 표현한 웹툰의 유해성 논란이 일부 신문 보도를 통해 불거지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주요 포털사의 웹툰을 모니터링 후 23편의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하겠다는 의견을 제출하면서 촉발되었다. 국가 주도의 심의가 웹툰에 행해질 수 있단 우려로 인해 만화계는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사)한국만화가협회를 중심으로 꾸려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반대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는 릴레이 시위만이 아니라 ‘웹툰심의 문제해결과 만화계 자율심의 논의를 위한 공청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유해 매체 지정에 대한 공청회’까지 개최하며 정부 기관 주도의 심의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을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해 온 한국 만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만화가들이 직접 나서 창작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색했다. 정부 주도의 타율적 심의가 만화 문화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며 ‘노컷 운동’도 나타났다. 그 결과 그해 4월 9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사)한국만화가협회와 ‘웹툰 자율규제 협력’에 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웹툰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게 되었다.
만화계의 심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자율규제에 이르기까지 만화계가 적극적으로 노력한 데에는 심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큰 역할을 했다. 심의가 창작,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인식의 뿌리는 실제로 1960년대 문화계 전반에 행해진 사전심의에 있다. 심의 탓에 창작력을 제한당했다는 원로 만화가들의 증언은, 196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심의를 통과해야만 출판할 수 있던 실제 사례와 ‘만화는 불량하다’라는 오랜 편견에 의해 뒷받침된다. 어린이날마다 공터에서 만화책을 불태우는 행사나, 완성된 원고에 빨간 펜으로 표시된 수정 요구 흔적은 만화가들의 창작 의지를 꺾고 상상력을 저해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1997년 3월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자 음란만화 단속이라는 명목 하에 상고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 혐의는 항고 끝에 2003년 최종적으로 무죄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만화의 수식어 중에서 ‘불량’이란 단어를 삭제해 버릴 수 있었다. 그간의 일들을 모두 돌이켜봤을 때, 만화가들의 심의에 대한 감정을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율규제는 이러한 아픈 역사를 딛고 얻은 보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율규제마저도 창작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율규제에 대한 오해는 규제라는 단어가 가진 강제적이며 수동적인 뉘앙스에서 출발한다.
독자, 작가, 작품, 유통사까지 보호할 수 있는 자율적인 규제
규제가 창작의 자유를 옭아매는 족쇄란 인식을 버리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율적인 규제를 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2014년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시작한 김칸비, 황영찬 작가의 《후레자식》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아버지와 그와 함께 살며 어린 시절부터 간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해 온 아들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설계한 길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아들의 고뇌와 성장을 다룬 이 웹툰은 연재 과정에서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건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후레자식》이 연재되던 도중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네티즌의 청원 글이 올라왔다. 전체연령가로 서비스되는 이 웹툰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결국 《후레자식》은 19세 이용가(성인 등급)로 전환되었다. 《후레자식》이 19세 이용가로 전환된 이유는 당시 웹툰이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청소년 대상 유해성 여부를 심의해 온 출판만화와 동일한 체계로, 전체연령가와 19세 이용가로만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에도 지금처럼 전체연령가와 19세 이용가 사이에 연령등급이 있었다면, 독자에게는 가이드 역할을 했을 것이고 작가는 작품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웹툰은 전자정보망을 통해 서비스되므로 출판물과는 다른 규제 시스템이 필요하기도 했다.
자발적인 연령등급 도입과 한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사)한국만화가협회가 업무협약을 맺어 자율규제를 시행하면서 『디지털만화 심의제도 개선방안 연구』(2014)를 통해 자율규제의 체계가 제안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2017년 웹툰자율규제위원회 1기가 출범했는데, 위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웹툰 연령등급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연령등급을 세분화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면 독자와 작가, 작품, 유통사 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웹툰 자율규제 연령등급 기준에 관한 연구』(2018)가 수행됐다. 국내외 동종 및 타 분야 연령등급 기준을 토대로 문항을 마련하고, 설문조사와 자문위원의 검증을 통해 나타난 결과를 공청회를 통해 공개했다. 이 연구에서는 웹툰의 연령등급을 전체연령가, 12세 이용가, 15세 이용가, 18세 이용가로 제안했는데, 이미 「청소년보호법」에서 청소년유해매체물의 기준 연령을 19세로 규정하고 있어 성인 등급을 제외한 네 가지 등급을 제시한 것이다. 작가나 유통사가 연령등급을 스스로 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가 진단 템플릿도 마련해, 웹툰자율규제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을 준용하여 2019년부터 웹툰 플랫폼에서는 연재하는 웹툰에 연령등급을 섬네일이나 작품 소개 글 등에서 표시하고 있다.
연령등급은 자율규제의 유용한 도구이지만 만능은 아니다. 만화를 불량하다고 보는 시선이나 유해하다고 보는 시선에는 대개 선정성과 폭력성이 그 이유로 거론됐다. 선정성이나 폭력성은 표현 강도에 따라 연령대별로 대략적인 기준을 마련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배제하게 만드는 차별적인 표현들은 연령 고하를 막론하고 근절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또 차별 표현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어떤 표현이 차별적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연령등급 기준보다 안전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장(場)이 마련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연령등급은 자율규제의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자율적인 규제를 논의할 때 최소한의 기준은 될 수 있다.
자유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땅한 해결책이 부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난제를 일부라도 해결하려면 문제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미약하더라도 해결할 의지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웹툰에서 자율규제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자 스스로 제한을 정해야 하는 자율규제는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참여와 선의가 필요하다. 만일 몇 명의 친구가 게임을 만들어 실행할 때 게임의 재미와 영속성을 바란다면, 개인적인 욕망이나 이기심을 덜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준을 마련할 것이다. 선의에 의해 자발적인 참여로 만든 기준을 준용하려고 애쓸 것이며,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서 기준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와도 소통하며 해결하려 할 것이다.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도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건, 선의에 의한 자발성이 동기이며 그것이 우리가 만든 게임에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책임이기 때문이다. 웹툰 자율규제도 마찬가지다. 자율규제는 ‘탈규제(de-regulation)’나 ‘무규제(un-regulation)’가 아니라 창작자와 유통사가 직접 기준을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규제를 하되, 정부의 직·간접적 개입 없이 작품 생산에 관여하는 사업자나 작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웹툰 자율규제도 웹툰을 창작하고 유통하는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기준을 만들어 논의하고 이행하는 자발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율규제는 책임 있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선택
자율규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2017년부터 현재까지 웹툰자율규제위원회를 설치해 3년을 주기로 1기부터 3기까지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보호법」과 「출판문화산업진흥법」,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설치되었지만, 위원회의 논의 결과가 강제성을 갖거나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강제성도 없고 처벌도 할 수 없는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 대해서, 그것을 이유로 실효성을 따져 묻는 것은 자율규제를 타율적 제한의 관점으로 사전심의와 다르지 않게 이해하는 것이다. 자율규제는 업계 내 구성원들이 창작과 유통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거듭하여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만든 체계와 기준이라 할지라도 변화에 대응하여 소통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어떠한 책임을 어떠한 기준으로 져야 할지를 다 같이 고민해 나가는 것. 그래서 자율규제는 기준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구성원들의 이해와 공감, 지속적인 소통이 가장 중요하며, ‘자발적 선택’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