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의 아버지 김우영(1939.10.24.-2026.9.24.)
- 향기로운 꽃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
피난길에서 피어난 만화가의 꿈
1939년 10월 24일생인 김우영 작가는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혜경.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삽화가 우경희의 ‘우’와 최영 장군의 ‘영’을 따서 ‘김우영’을 아호로 삼았다. 초창기에는 ‘김혜경’으로도 출간했는데, 이름만 보고 여자 작가로 오해한 군인들로부터 연애편지를 받게 되자 ‘김우영’이라는 필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김우영은 해방 직전인 여섯 살 무렵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목회 활동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조만식 선생이 창단한 조선민주당의 선천지부 당수였던 아버지마저 공산당의 추적을 받게 되면서 가족의 삶은 급격한 전환을 맞았다. 결국 온 가족은 숙청의 위협을 피해 월남길에 올랐고, 얼마 후 해산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머니와 갓난아기였던 막내 동생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강원도 탄광촌인 도계읍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곳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서울 수복이 발발하자 강원도를 떠나 부산 피난민 마을에 정착해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김우영이 빈 공책을 얻어 만화를 그리면 학급 친구들이 돌려보곤 했을 정도로 만화를 곧잘 그렸다. 특히 곤궁한 피난살이에 돈은 없어도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은 빌려 볼 정도로 만화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만화책을 다 보는 게 아쉬워 조금씩 아껴 읽을 정도였다. 고단한 피난길에서 접했던 만화책들은 소년 김우영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박광현, 김용환, 김성환, 김윤항의 만화를 빌려볼 때면 설레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환쟁이’라며 싫어하셨던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우영은 피난민 마을에서 만난 스승 김윤명 선생의 문하생 생활을 시작으로, 1956년 단행본 <물레방아>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서름길 구만리>(1957), <산송장>, <철쭉꽃 피는 고향>(1958), <울어라 조국>, <아랑각의 비밀>, <의리>(1959), <또또바바의 요술장화>, <도토리 엠피>(1966), <황금마패>(1969), <태권소년 태풍>(1977), <꼬마장사 담보>(1981), <달리의 방학기행>(1990), <전우치와 깜도치>(1996), <뚱딴지> 시리즈 등 다수의 단행본과 신문·잡지 만화를 연재했다. 또한 1967년 동양방송(TBC) 동화부 7기로 입사해 TV애니메이션 <황금박쥐>, <요괴인간>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긴 창작의 여정을 거쳐 <뚱딴지>에 이르기까지
김우영의 만화 인생은 <뚱딴지>를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김우영 작가는 많은 이들에게 <뚱딴지>의 작가로 기억되지만, 그의 만화가 인생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열일곱 살에 등단한 이후 30년 넘게 쉼 없이 작업했지만, 큰 인기를 끈 작품은 없었다. 작가는 그 여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이 시기에는 시대극, 스포츠만화, SF와 같은 극화체 만화부터 명랑만화, 학습만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했다.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유명세를 떨칠 만큼의 작품은 없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은 끊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만화 출판사의 횡포가 심했고, 만화가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였던 만큼 유명 작가가 아닌 작가의 생활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김우영은 이 시기를 “삼류작가”, “비주류작가”, “나같이 인기 없는 작가”로 회고했을 만큼 혹독한 시절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생계의 압박, 만화에 대한 열정으로, 한마디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울어라 조국>(1959) [필자 제공]](https://www.kmas.or.kr/img/archive/webzine/bbs/images/000086/20261019080211941_O8KTDBG3.png)
김우영은 이 시기를 “버티던 시절”이라 말했지만, 열일곱 살에 만화계에 입문한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이 시기의 창작 여정은 단일한 작품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과 경험을 담고 있다. 일례로 <산 넘고 바다 건너>, <울어라 조국>의 캐릭터에 드러난 조형성은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미를 특징으로 한다. 얼굴형과 눈, 귀의 형태에서 나타나는 곡선미는 캐릭터 전체에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조형성은 명랑만화인 <신기한 마노의 돋보기>를 거쳐 비로소 <뚱딴지>만의 캐릭터로 빛날 수 있었다.
김우영은 이 시기의 자신을 “B급 내지는 C급 작가”로 낮춰 평가하는 겸손을 보였지만, 이때 축적한 그의 실력과 인내는 훗날 <뚱딴지>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뚱딴지>가 약 30년간 8556회까지 연재될 수 있었던 것도 이전 시기의 다양한 만화장르를 두루 경험하며 창작 역량을 쌓았기에 가능했다. <뚱딴지>의 성공 이전과 이후를 아우르는 그의 창작 여정은 한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해 온 인내와 지속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산 넘고 바다 건너>(1959) [필자 제공]](https://www.kmas.or.kr/img/archive/webzine/bbs/images/000086/20261019080353305_FGZWHA6Z.png)
<뚱딴지>의 아버지 ‘김우영’
김우영은 ‘뚱딴지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에게 <뚱딴지>는 오늘날의 김우영을 있게 한 작품이자, 작가 스스로 자신의 전성기라고 꼽은 작품이기도 하다. <뚱딴지>는 1990년 3월 1일부터 2019년 4월 1일까지 《소년조선일보》에 약 30년에 걸쳐 연재되었다. 만화가 신문수의 소개로 <뚱딴지>의 연재를 시작한 김우영은 신문수를 “평생의 은인”이라고 회고했다. 그 인연은 김우영의 만화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뚱딴지>는 이후 그의 만화 인생에 한 획을 긋는 대표작이 되었다.
<뚱딴지>의 인기는 아동 학습만화 출간으로도 이어졌다. 여러 작가가 참여한 <만화일기> 시리즈 가운데 <뚱딴지 만화일기>는 38만권이 판매되어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이후 <뚱딴지>의 인기에 힘입어 <뚱딴지 만화편지>, <뚱딴지 만화교실>, <뚱딴지 수호지>, <뚱딴지 초한지>, <뚱딴지 만화삼국지>, <뚱딴지 독도탐방> 등 일련의 <뚱딴지> 시리즈가 출간되어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1990년대 접어들어 아동만화, 학습만화 시장이 확대되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뚱딴지> 역시 여러 시리즈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뚱딴지>는 시장의 성장에 편승한 작품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뚱딴지>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으로서 아동만화 출판시장의 상승세가 지속될 수 있도록 견인한 작품이다.
![<뚱딴지> 원고 [필자 제공]](https://www.kmas.or.kr/img/archive/webzine/bbs/images/000086/20261019080433655_XJ1E0QPY.png)
처음부터 <뚱딴지>가 장기 연재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이 시작한 탓에 작가는 신문사에서 연재 중단 통보가 오지 않을까 한동안은 늘 불안해했다. 연재가 시작된 지 1년쯤 지났을 때, 한 기자가 연재만화 가운데 <뚱딴지>가 톱이라는 소식을 전해주기 전까지는 늘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냈다. 작가는 그제야 비로소 <뚱딴지> 작가로서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마침내 <뚱딴지>에 이르러 오랜 세월 인내하며 버텨 온 김우영의 노고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연재는 30년 가까이 이어졌고, 마침내 8556회에 이른다. 휴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뚱딴지> 연재를 이어간 셈이다. 그러니 장기 연재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아이디어가 고갈되기도 했다. 출근 때부터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까지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맴돌 땐 낙담하기 일쑤였다. 광화문 화실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이디어를 궁리하다 내릴 곳을 지나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심지어 자면서 꿈을 꾸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메모를 해놓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만화가의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화들이다.
그럼에도 김우영에게 <뚱딴지>는 1만 회까지 연재하고 싶을 만큼 욕심이 가는 작품이기도 했다. 훗날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매우 아쉽게 생각할 만큼 깊은 애정을 지닌 작품이었다. <뚱딴지>는 그에게 단순히 오랫동안 연재한 인기작이 아니었다. 불안 속에서 시작해 수많은 아이디어를 짜내며 한 회 한 회 쌓아 올린 작품이자, 오랜 세월 자신의 만화 인생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김우영을 ‘뚱딴지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뚱딴지를 창조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뚱딴지>는 오늘의 김우영을 있게 한 작품이자, 그가 오랜 시간 애정을 쏟아 함께 성장해 온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뚱딴지>에 담긴 온기 : “엉뚱해도 교육적이어야 해”
뚱딴지는 주근깨가 난 볼과 더벅머리, 그 사이로 삐죽 솟아난 세 가닥의 머리카락이 특징인 개구쟁이다. 잦은 지각으로 선생님 뵐 낯이 없어 얼굴에 봉투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거나, 만우절에 선생님 흉내를 내다 혼이 나기도 한다. 자신의 잘못을 주변 친구나 강아지에게 돌리고, 낮은 성적을 받아 와서는 특별 바겐세일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방학을 좋아하고 학원 가기를 싫어하는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아이의 모습은 독자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거나 해봤을 법한 행동을 뚱딴지를 통해 대신 경험하면서 동질감과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뚱딴지의 매력은 장난기와 말썽에만 있지 않다. 그는 말썽을 일으키면서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고, 아이다운 순수함과 선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순국선열을 생각하며 소변을 참는 엉뚱함과 진지함이 있는가 하면, 들판의 허수아비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따뜻한 마음도 지녔다. 꿈에서 본 변신로봇을 사기 위해 돈을 손에 쥔 채 잠에 드는 모습에서는 영락없이 아이의 순수함도 드러난다. <뚱딴지>는 천진난만한 장난과 익살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그 안에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이 독자에게 웃음 이상의 정서적 친밀감을 선사했다.
이처럼 <뚱딴지>는 김우영의 작가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단순히 장기간 연재된 대표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우영은 “만화는 기본적으로 재미있어야 하지만, 아동만화는 교훈적이고 유익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뚱딴지>를 연재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유익한 내용을 전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작품을 창작할 때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려 많은 노력을 들였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라도 그것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해당 에피소드를 과감히 폐기했다고 말할 만큼, 아동만화 창작에 따르는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작가의식은 <뚱딴지>를 연재하기 이전의 선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우영은 성인만화가 성행하던 시기에 성인만화 제작 의뢰를 거절했던 일을 회고하며, <뚱딴지>를 연재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만화가로 남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아동만화가로서 아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은 작품을 그려왔다는 자부심이자, 자신의 창작활동에 떳떳하고자 했던 작가의 신념을 보여준다. 김우영에게 아동만화는 단순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오락물이 아니었다. 재미와 유익함을 함께 추구해야 하는 장르였으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 웃음이 아이들에게 미칠 교육적·정서적 영향까지 헤아리는 작업이었다. 바로 여기에 <뚱딴지>를 관통하는 김우영의 작가정신이 자리한다.
이러한 작가정신은 캐릭터의 성격뿐 아니라 그림체에도 반영되었다. 김우영은 재미를 위해 캐릭터를 과장하거나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을 한층 순화해 그렸다. 심술궂은 표정을 그려도 그다지 심술궂게 느껴지지 않고 착해 보인다는 반응이 돌아왔을 정도로 순화시켰다. 인물의 익살은 살리면서도 악의적이거나 거친 인상은 덜어낸 것이다. 이는 김우영이 아동만화와 <뚱딴지>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창작했는지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만화일기>를 출간한 대교출판사의 직원들이 김우영 만화가 인기 있는 이유를 분석했을 때도 한결같이 꼽은 것은 “따뜻함”이었다.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은 엉뚱한 행동이나 기발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골탕 먹이며 독자에게 웃음을 주곤 한다. 그러나 <뚱딴지>는 그러한 익살을 지니면서도 다른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에 비해 유독 선하고 따뜻한 면모를 지닌 캐릭터였다. 장난과 말썽으로 웃음을 유발하되 엉뚱한 행동 속에서도 타인을 향한 온기 역시 잃지 않았다. 김우영은 <뚱딴지>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랐으며, 그 온기가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원했다. <뚱딴지>가 오랜 기간 아동만화이자 학습만화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처럼 웃음과 유익함을 넘어서는 따뜻한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뚱딴지> 마지막 회차 [인터넷 갈무리]](https://www.kmas.or.kr/img/archive/webzine/bbs/images/000086/20261019080518262_Z86880DG.png)
<뚱딴지>의 마지막 회차는 김우영의 세계관이 응축된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2019년 4월 1일자로 연재된 8556회차에서 뚱딴지는 독자들에게 이별의 선물로 꽃을 건넸다. 김우영은 2019년 구술채록 당시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좋은 향기를 지닌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향기로운 꽃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뚱딴지의 말은 독자들에게 건네는 작가의 진심이기도 했다. 꽃의 향기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은 <뚱딴지>가 지닌 선함과 작품 전반에 흐르는 온기를 마지막까지 관통한다. 김우영의 긴 만화 창작 여정은 막을 내렸지만, 그가 바랐던 대로 <뚱딴지>를 읽은 독자들에게 따뜻한 향기가 오래도록 남았다면, 작가의 말처럼 “그걸로 됐다”.
에필로그 : 나는 거북이 같은 사람이오
![고 김우영 화백 2019년 12월, 작가의 저택에서 [필자 제공]](https://www.kmas.or.kr/img/archive/webzine/bbs/images/000086/20261019080617496_8HH7IFB0.png)
김우영 작가는 ‘거북이’라는 당신의 별명을 종종 언급했다. 군 복무 시절 방영되던 라디오 연속극 주인공의 별명이 거북이였는데, 한 동료가 주인공이 꼭 너와 닮았다며 붙여준 별명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거북이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여겼던 걸까. 필명으로 거북이를 쓰기도 하고, 이름 앞에 거북이를 그려 넣기도 했다. <거북이>라는 네 칸 만화를 연재한 적도 있다. 작가의 노트에는 거북이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빵모자를 쓰고 익살스럽게 웃는 작가의 얼굴에 거북이 몸통을 붙여 놓은 캐리커처다. 그가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
김우영은 당신의 행동이 굼뜨고 빠르지를 못해 거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누군가 한 말을 한참 생각한 뒤에야 그 뜻을 이해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거북이를 닮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거북이에 비유하는 까닭은 단지 그의 행동이 굼뜨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우영이 거북이인 것은 한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만화가의 길을 일구어냈기 때문이다. 그에게 느린 걸음은 더디기만 한 걸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바라는 일을 끝까지 붙들고, 마침내 자신만의 길로 일구어낸 거북이의 뚝심이었다.
김우영은 “느리지만 언제나 아이들 곁에서 동행하는 <뚱딴지> 만화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이 말은 단순한 바람에 그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아이들의 곁에서 만화를 그리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작가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익살스럽지만 따뜻한 만화로 아이들과 함께 걸어온 김우영. 그는 자신만의 걸음으로 한국 아동만화사의 한 길을 일구어낸 작가다.
[참고문헌]
김우영, 서은영, 『한국만화사 구술채록연구⓴ 김우영』,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19.12
오누리, 최지은, 이슬기 기자, 「굿바이 뚱딴지」, 《어린이조선일보》, 20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