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자매의 비밀>은 아마추어 연재 10년차인 작은숲(네이버 도전만화 필명 : plmyfa)의 신작이다.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로서 그는 경비원, 호텔 청소원, 백수 생활을 전전하는 60대 남성이다. 그는 ‘만화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 말 그대로 피똥을 싸면서 네이버 도전만화, 디시인사이드, 루리웹 등에 만화를 그려 올린다.
그의 작품은 여러 방면으로 유명하지만, 작은숲만의 어색하고도 정직한 순정만화 스타일의 그림체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특이한 대사들(‘요 베라쳐먹을’, ‘오호호깔깔깔’, ‘왜 꼽니 꼬와?’ 등)은 그의 작품에 서명을 새기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작은숲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개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치 결승점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레이스처럼 작은숲은 어쨌든 ‘그려나갈 뿐’이므로, 제목도 주인공도 독자에겐 그리 믿을만한 동반자는 못된다.
신작인 <두 자매의 비밀>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현재 17화까지 연재가 진행된 상태지만 도저히 뭐가 자매고 뭐가 비밀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1화의 ‘인물소개’ 에서 이미 16화 분량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내용이 누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런 것쯤은 반전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이다.
더 밝혀질 만한 두 자매의 ‘비밀’ 이라는 게 이 판국에 있을 수나 있는지, 독자들은 그저 애간장이 탈 뿐이지만 작은숲은 이제 두 자매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 같다. 그리기 시작했으니 끝을 보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면 작은숲의 작품은 병원 잡역부로 일하면서 퇴근 후에는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다는 헨리 다거(Henry Joseph Darger)의 그것처럼, 망상적이고 자폐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적 소외 계층의 ‘증상’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작품에서 독해해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증상을 가리키는 몸짓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가 창조해낸 모든 작품은 오직 하나의 원형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헨리 다거가 그랬듯이.
만약 그렇다면 작은숲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촌스러운 말장난과 시대착오적인 그림체를 구경하는 것 외에 작은숲의 작품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나 있을까? 만약 그의 작품이 단지 자폐적 성향을 지닌 60대 노인의 정신건강을 진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작은숲의 작품을 ‘증상’으로 읽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한 독해는 현재로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숲이 그리는 것은 ‘아침드라마’다. 어쩌면 ‘종편드라마’에 가까울 수도 있다. 콘티는 그 때 그 때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거나, 당일 작은숲의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는 ‘엄마들이 보는 드라마’에서 흔히 연상할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인 출생의 비밀, 외도, 신분 상승, 살인과 복수 등을 작은숲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작은숲 특유의 전형적인 캐릭터들은 ‘막장드라마’의 대모인 임성한의 세계관을 보는 듯이 반복적으로 여러 작품에 걸쳐 등장한다. ‘김영주’와 ‘라맘’이 좋은 예다. 여성스러운 남성 캐릭터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김영주’는 <변신>, <비밀>과 <좀비학생의 복수>에서 똑같은 이유로 고통을 받는다. <변신>에서 헤론행성의 신으로 등장하는 ‘라맘’은 <비밀>에서 애완견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은 작은숲의 부주의가 아니라 명백히 의도된 장난이거나 팬서비스다. 왜냐하면 작은숲은 때때로 진행 중인 작품 내에서 이전 작품을 언급하며 자기 자신이 작품들 사이의 연속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밀>에서 ‘김영주’가 충분히 남자답지 못하다며 그를 ‘헤론 행성’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하는 패거리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헤론 행성을) 그냥 인터넷 만화에서 봤는데 거기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얘랑 이름도 똑같은데 하는 행동도 계집애같이 똑같아.” 헤론 행성은 작은숲의 또 다른 작품인 <변신>에 나오는 행성이다. 여기서 언급된 인터넷 만화란 뻔뻔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오래된 방식으로, 작은숲 본인의 만화를 지시한다.
작은숲은 실제로 많은 드라마를 본다. 그의 블로그에는 자신의 만화만큼이나 많은 양의 드라마 리뷰가 넘쳐난다. 이것은 실제 그의 처지-독거 노인으로서 TV를 제외하고 즐길만한 취미생활이 없음-을 반영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의 만화가 왜 그렇게 ‘아침드라마’ 같은 특징을 띠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중문화에서 드라마는 오랫동안 가족 중심주의적, 이성애 중심주의적,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공모해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주요 시청자인 대중-여성을 향한 비판이기도 한 이러한 일차원적인 이데올로기 비평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한다는 리얼리즘적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정치적 무의식>에서 지적했듯이, 역사란 ‘텍스트적 형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선행된 (재)텍스트화에 의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술은 일정한 진리의 담지체가 아니라, 재해석 되어야 할 ‘현실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재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를 제임슨은 ‘서사(Narrative)’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역사적 장면이 서로 충돌하는 생산양식 간의 혼합체로서 이해되어야 하듯, 서사양식 역시 이데올로기와 욕망, 무의식이 층층이 쌓인 채 텍스트에 각인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임슨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에 따라 더욱 ‘순수’해진 후기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현실을 파악, 지배하려는 욕망 자체가 포기된 단계이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제 노동자와 자본가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에 상응하는 서사양식은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반영물이 아니라 충돌하는 이데올로기와 모순되는 욕망이 공존하는 ‘이데올로기적 절합’이라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이데올로기적 절합’에서 드러나는 것은 ‘현재’라는 역사적 국면의 이데올로기적 단면과 ‘미래’를 향한 유토피아적 충동이 혼합된 흔적들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흔적들을 ‘이율배반(antinomy)’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텍스트 내에서 종국에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언정 ‘현실적 모순들’은 여전히 텍스트 내에서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유토피아적 충동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실적 모순들’은 후기 자본주의 논리를 가시화할 뿐만 아니라 이미 봉쇄된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적 충동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 예술이 스스로를 극복하게 하는 비평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작은숲의 작품은 대부분 (애매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60대 독거노인인 본인과는 다르게 주로 고등학생들을 그리는 그는 앞서 설명했듯 신분 상승, 정상 가정, 원한, 복수라는 테마에 집중한다.
신작 <두 자매의 비밀>만 해도 그렇다. 주인공인 ‘김혜자’는 엄마가 죽기 전 자신이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 모 대기업 사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등장인물 소개에 이미 나오는 내용이니, 내용누설과 전혀 관계없음.
중장편인 <좀비학생의 복수> 역시 주인공 ‘김영주’는 두 차례에 걸친 신분 상승을 겪는다. (이 역시 비록 좀비의 몸으로 겪은 일이긴 하나 별 상관은 없음.)
그런 의미에서 작은숲의 작품은 (비)가시적으로 계급의식의 차원을 건드리고 있다. 작은숲의 작품 중에서 ‘비극적’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BL물이라 불러야 할지 게이물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두 남자>뿐인데, 사실 작은숲이 게이 캐릭터를 비극적으로 만든 것이 이 작품이 처음도 아닌데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게이 캐릭터를 비극적으로 소비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으므로 딱히 특별한 엔딩은 아닌 셈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계급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이 작품을 ‘게이혐오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다.
따지고 보자면 ‘여성스러운 남성’으로 놀림받는 ‘김영주’라는 캐릭터의 계속되는 등장에 대해서도 ‘게이혐오적’이다, ‘여성혐오적’이다, 등등의 뻔한 비난을 가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나는 차라리 강박적일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대사인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혹은 히스테리적인 집단적 경련에 가까운 ‘오호호깔깔깔’의 비현실적인 섬뜩함에 대해 묻고 싶다.

또한 지루할 정도의 도덕적 연설들-‘우리나라에 노처녀가 너무 많아.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래.’, ‘정말 심각하네요. 저도 빨리 아줌마 국수 잡숫게 해드려야겠어요.’<두 자매의 비밀, 6화>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여자의 행복과 운명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확 달라지죠.’<비밀, 9화> ‘남자가 고게 뭐냐? 힘없는 친구나 괴롭히고. (...) 남자가 정의로워야 매력 있지, 안 그러냐 요색히들아!’, ‘야 니 말을 듣고 보니 우리가 정말 잘못 했구나.’, ‘크게 반성한다.’<비밀, 32화>-에서 느껴지는 무기력과 냉소에 대해 묻고 싶다.
작은숲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본인과는 가장 거리가 먼 집단일 가능성이 큰 ‘정상 가족’이자 ‘중산층’을 재현하기 위해 각종 상상력을 동원하는데 이러한 도덕적인 연설들도 그 중 하나다. 작은숲 특유의 말장난(‘나도’,‘나도’.‘전라도!’)등을 제외하더라도 이들의 대화와 감정의 흐름은 지나치게 교과서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그러한 점들이 작은숲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의 과장된 낙관주의와 도덕주의로 인해 그렇지 못한-동성애자, 경비원, 뚱녀, 식모, 점쟁이, 귀신-자들은 새로운 차원의 계급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오히려 이들만이 감정을 가진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이름도 없고 집도 없으며 늘상 혼자서 주인공 주변을 배회하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주인공들‘처럼’ 도덕적으로 굴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비극적인 사연이 있고 원한이 있으며 소망이 있다. 결국 이들은 주인공들보다 더욱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작은숲의 작품에서 비현실적이고 모순적인 부분들은 오히려 작은숲의 작품을 전회하여 독해할 수 있게 만든다.
<좀비학생의 복수> 113화는 그 좋은 예다. ‘오호호깔깔깔’로 대표되는 특유의 히스테릭한 낙관주의는 오간데 없이, 113화에서는 경비원 ‘심씨’가 겪는 심적 고통이 긴장감있고도 현실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심씨! 어디가서 말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다가 맞아 죽어 말 조심해 심씨!’<좀비학생의 복수, 113화>, ‘절룸발이, 병신같은 새끼! 죽여버리겠어!’<좀비학생의 복수, 115화> 이러한 대사에서 느껴지는 원한과 긴장감은 마치 다른 만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마찬가지로 <두 남자>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호모들이 까다로워 얼마나 사람을 가리는지 아마 사장님은 모를거예요. 그래도 예전엔 나도 대기업 전자공장에 기술직으로 다녔는데 그땐 잘나갔죠. (...) 그러나 갑자기 회사가 인원감축을 하는 바람에도 저도 짤리고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말았죠. 으흐흑. 새 일자릴 찾아 방황했으나 이미 나이 마흔이 넘은 내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대부분 건물 경비나 주차장의 주차 안내 같은 일뿐이었어요. 월급도 얼마 안되는 용역 회사의... 다행히 그때 내게 운전기술이 있음을 깨닫고...’<두 남자, 13화>

대기업 사장의 숨겨진 딸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대사들에 비해 얼마나 구구절절하며 또 솔직한가?
다음 예를 보자. ‘그래서 이건 제 생각인데 인터넷에 무료로 보는 만화를 없애야 한다고 감히 생각해요. 오호호 깔깔깔.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그렇담 용서해주세요. 그러나 아무리 봐도 무료로 볼 수 있는 만화가 네이버나 다음에 너무 많은 것 같아,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삼촌, 고모, 이모에게 만화 좀 사서 보라고 권장해주세요. 부탁해요. 이상 아파트 여자 경비원이 시건방지게 말씀 드렸어요.’ <아파트 여자 경비원 5화> 여기서는 아예 작은숲 본인이 여자 경비원으로 등장해 아마추어 만화가로서 만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들의 공통점은 적대화 할 수 있는 계급의 존재다.
작은숲의 작품에서 언제나 흥미로운 사실은,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 크게 드러나는 만큼 계급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선명하게 집단화된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작은숲의 작품에 매료되는 지점도 어쩌면 단순히 ‘오호호깔깔깔’이나 ‘베라처먹을’과 같은 단순한 유행어 때문이 아닐 것이다. 유치한 아침드라마에 열광하는 일이 오늘 내일 일이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