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잡지시스템을 토양으로 발전하고 개발하여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장르적 규칙이 자리 잡힌 ‘소년만화’는 노력, 우정, 승리 같은 원초적 모티브를 지닌 캐릭터들이 자극적 요소를 담은 세계관에서 활약하는 장르다. 다만 점차 시간이 흘러 일본 현지에서도 시장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히트를 위해 안전한 공식만을 재생산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곤 한다. 강렬하고 처절한 세계관에서 삶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들의 처절함, 불리한 형국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 등이 어떤 클리셰 규칙으로만 남아 허망하게 소비되곤 하는 것이다.
마침 소년들이 왜 소년 만화에 열광했고, 지금은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던 터라 이 작품에 끌렸다. 치열하고 거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박력과 직선적 행보가 바로 작품 안에 녹아든 소년만화의 원천적 매력이니 이것을 살릴 수만 있다면 원점의 매력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 ‘아운’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은 갓 만든 원형의 밍숭밍숭한 상태가 아니라 복잡한 상황과 성정을 거치며 깎고 또 깎아내서 칼날처럼 벼려낸 정직하고 단단한 단순함이다. 적당히 인상적인 대사를 남기며 캐릭터의 인기를 만들려는 허세 없이 생존을 위한 처절함에 몸을 던진 ‘아운’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검과 창, 암기가 난무하는 무협의 세계 한가운데서 ‘아운’이 그들과 맞서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남성적인 전투인 주먹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내공과 강기가 충돌하는 무협의 화려한 액션과 몸과 몸이 부딪히는 날것의 주먹질을 함께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수많은 작품을 뒤지고 상사에게 읍소하며 인맥을 동원해 드디어 김대진 작가를 찾아냈다.
힘들게 어울리는 작가를 찾았지만 처음 김대진 작가의 반응이 그리 시원하지는 않았다. 원작이라는 발판은 한편으론 제약이기에 글과 그림을 함께 하고 싶은 만화가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첫 미팅 후 책을 건내며 일단 작품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권왕무적]을 맡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권왕무적]의 원초적인 재미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며,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고 했다. 캐릭터 시안을 만들고 작품의 프롤로그와 초반 콘티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만화 [권왕무적]은 순조롭게 제작되어갔다.
그러나 막상 초반 원고 제작이 완료되자마자 더 큰 난관을 마주했다. 원작자 초우 작가가 초반 만화 원고를 검토한 후 난색을 표한 것이다. 웹툰은 작품을 접하기 쉽다는 특성상 시작부터 독자를 잡아두기 위해 두괄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권왕무적] 원작 소설에서는 ‘아운’이 아버지와 말다툼 후 집을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컷 수가 제한된 웹툰에서 주인공의 사연을 하나하나 짚어주기에는 컷 수가 모자란다. 독자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빠르게 나와야지만 초반에 독자이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 ‘아운’이 무공을 익힌 후 액션이 시작하는 곳으로 작품 시작점을 잡았는데, 이 부분이 원작의 의도와 다르다는 지적이었다.
미팅이 줄줄이 이어졌다. 원작자 초우 작가와, 그리고 만화가 김대진 작가를 번갈아 만나며 합의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작품의 원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독자를 잡아둘 수 있는 시작점과 캐릭터 상을 논의했다. 몇 주가 지난 뒤, 작품의 새로운 방향을 잡았다. 원작도, 웹툰 시안의 시점이 아닌 새로운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에 따라 이미 작업한 원고는 모두 갈아엎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미 작업된 원고를 다시 작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보다도 심적 부담이 훨씬 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대진 작가는 이 짐을 기꺼이 지기로 결정해 주었다.
작품의 시점과 함께 키 비주얼도 변경되고 시안보다도 높은 퀄리티로 원고 작업이 재개되었다. 부분적으로 컬러를 사용하기로 했던 시안에서 컬러 작가를 영입하여 전면 풀컬러로 재작업이 들어갔다. 재작업을 진행하며 작업형식까지 전면 디지털로 전환한 김대진 작가는 초기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안정적인 데생과 액션을 구사해갔다. 손발을 맞추기 시작한 컬러 작가의 색감도 터치와 잘 어울려 수준급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난산을 거쳐 태어난 새로운 [권왕무적]은 원작자, 만화가, 편집부 모두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허나 자축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관문을 거쳐야 했다. 바로 독자의 기준에도 맞는 작품이냐는 것이다. 자사 플랫폼 <빅툰>에 연재를 개시하고 독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회차수가 쌓이기 전까지는 크게 기대를 않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다는 걸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으나 아는 것만으로는 진정할 수 없다는 것까지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초조하던 와중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낸 우수만화지원사업 공고를 접했다. <권왕무적<은 제작자나 독자가 아닌 전문 심사의원의 눈에도 만족스러울까? 서류를 준비해 사업이 지원하고 새로운 판촉 계획을 덧붙였다. 본사의 <아이큐점프>에도 [권왕무적]을 게재해 독자층을 넓히는 것. 잡지만화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으나 <아이큐점프>에는 아직 정통성 있는 만화를 원하는 독자가 남아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다행히 [권왕무적]은 지원사업에 최종 선정되어 새로운 판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본디 웹툰으로 기획되고 제작된 작품이라 매회 마감을 하며 지면용 잡지판형을 제작하기에는 다소 힘이 부치는 감이 있었으나 지원사업 덕에 많은 부담이 덜어졌다. 그렇게 [권왕무적]은 <아이큐점프>에 들어갔고, 잡지 표지를 장식하며 독자에게 선보일 길을 찾아 나아갔다.
그렇게 연재가 지속된 [권왕무적]은 원작을 접한 독자, 접하지 못한 독자, 높은 퀄리티의 남자만화를 원했던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어느덧 총 회차는 120화를 향해 다가가고 있고 잡지를 통해 꾸준히 구독중인 독자층도 늘어나는 중이다. 김대진 작가는 그 사이 득남하여 아들과 함께 [권왕무적]을 키우고 있으며 편집부에서는 남자만화의 가능성을 설명할 때 빼놓지 않는 작품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신작을 찾아다니다 어떤 만화에 꽂혔다. 남자 대학생들이 고깃집에서 밥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씬으로만 구성된 단편만화였다. 마우스로 그림판에 그린 듯 거칠고 단조로운 선으로 그려졌지만 내용과 구성에서 상당한 내공이 엿보였다. 캐릭터들의 대사는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정보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컷을 평범한 바스트 샷으로 구성했지만 화면구성에서 인물 구도와 말풍선의 위치, 여백을 남기는 감각 등이 탁월했다. 좋은 재능을 가진 작가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화를 발견한 곳이 디시인사이드의 카툰-연재 갤러리였던 탓에 작가의 연락처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게시판에는 많은 아마추어작가들이 정해진 필명을 사용하지 않고 작품을 올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만화의 작가인 너믿설 작가는 일관된 필명을 쓰고 있어 어렵지 않게 작가의 블로그를 찾을 수 있었고 무사히 연락이 닿아 미팅을 진행 할 수 있었다.
너믿설 작가는 예상처럼 시나리오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었으며 만화나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었다. 예상과 다른 점은 원숙한 연출력에 비해 젊었고, 조용한 말씨에선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심리 스릴러가 특기였다. 다만 자신도 상품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기에는 자신의 작화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설마 작품을 진행하자는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래도 역시, 그 만화에서 본 재미와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유행하는 흥행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바탕을 둔,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내놓는다면 평소에 만화를 보지 않는 독자들이 대거 유입된 지금은 먹혀들 요소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토리와 진행 구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너믿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몇몇 소재를 다듬어 장편연재물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여러 흥미로운 소재가 후보로 나왔고 많은 토의를 거친 결과 최종적으로 정해진 것은 살인자와 동거하는 기자의 이야기였다. 특종에 목마른 기자가 우연히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을 구해냈는데 그의 정체가 연쇄살인범이었고 그를 이용해 살인을 교사하여 특종을 써내지만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는 섬뜩한 소재였다. 논의를 거쳐 차별화를 위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살인마와 누구보다 사악한 기자의 협력이라는 컨셉을 이끌어냈다. 주인공이 악역인 피카레스크 구성으로 독자가 욕을 하면서 보는 작품이라는 기획을 잡아 제작에 들어갔다. 이 작품의 제목이 [기레기]로 정해진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내용을 정하고 원고 제작에 들어갔지만 완성도 높은 원고를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였다. 여기저기서 조언을 구하고 분위기를 뽑아내는 온갖 꼼수를 매 컷마다 지정해 설명하며 원고의 퀄리티를 높였다. 미흡해 보일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보기만 한다면 연이어서 보는 독자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연재가 시작되고 신인 작가의 작품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는데 제일 큰 것이라면 제목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이었다. 독자들이 ‘기레기’라는 단어에 기대하는 코드에는 ‘정치’ 분야에 대한 묘사가 예상외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에 달린 댓글을 보니 권력에 기생하는 옐로우 저널리즘을 기대하고 온 독자가 대부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독자를 유혹하는 수단의 정밀성을 위해선 보다 세밀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었고, 차기작은 가상의 정치 이야기를 다뤄보자는 결의를 다지는 성과를 또 하나 건졌다.
너믿설 작가는 [기레기]를 완결시킨 후 가진 미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막상 연재를 해 보고 나서야, 작품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작품만을 보게 되지만 그 최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정이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고, 작품의 뒤에서 일한다는 건 그렇게 외롭고 이해받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이해한 신인. 이제 막 소통을 이해하게 된 재능 있는 작가가 내놓을 차기작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