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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원종우, <우주소년 아톰 (데츠카 오사무 작)>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인 70년대 후반,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인지도 모르겠다. 부산 장전동 우리 동네의 뒷골목에는 별서점이라는 눈꼽만한 만화방이 있었다. 삭아가는 나무 창살에 간유리가 붙은 미닫이문, 어린 팔로 낑낑 열고 들어가면 훅 끼쳐오는 종이 곰팡이 냄새. 그 냄새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콧가를 간지럽힐 정도로 생생한 40년 가까운 기억이다.

2017-08-19 원종우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인 70년대 후반,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인지도 모르겠다. 부산 장전동 우리 동네의 뒷골목에는 별서점이라는 눈꼽만한 만화방이 있었다. 삭아가는 나무 창살에 간유리가 붙은 미닫이문, 어린 팔로 낑낑 열고 들어가면 훅 끼쳐오는 종이 곰팡이 냄새. 그 냄새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콧가를 간지럽힐 정도로 생생한 40년 가까운 기억이다.
어린 나는 엄마의 묵인과 방조 하에 그 곳에서 실로 많은 만화를 접했다. 당시에도 옛날 만화로 간주되던 임창의 ‘땡이’ 시리즈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김삼의 ‘소년 007’과 ‘강가딘’, 고유성의 ‘로보트 킹’ 같은 당시의 최신 만화들이 내가 즐겨보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중에 내 인생을 거의 결정짓다시피 한 두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화성 특공대’라는 번안 일본만화다. 별서점에서의 제목은 확실히 그것이었지만 해적판임이 분명하기에 원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어떤 검색 방법으로도 찾을 수 없고 내로라하는 만화계 덕후들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한 마디로 아무런 존재의 증거도 없는 만화가 되어 있다는 것은 섭섭하다 못해 잔인하다.
하지만 분명히 그 만화를 보았을 뿐 아니라 내게는 너무 큰 영향을 준 만화라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딴지일보에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화성 관련 이야기를 연재하고 그걸 ‘태양계 연대기’라는 책으로 발간하고 결국 과학 커뮤니케이터이자 만화 팬으로 알려져 지금 이 글을 쓰게까지 만든 일등 공신이 바로 그 작품이기 때문에.

기억나는 스토리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평범한 소년인 주인공은 어느 날 밤 난데없이 고대 화성으로부터 찾아온 전령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멸망한 화성의 운명을 바꿔놓을 사람은 소년과 그 가족밖에 없다는 뜻 모를 말과 함께 그들을 수만 년 전의 화성으로 데려간다. 화성은 문명의 사활을 건 전쟁 중이었고 - 누구랑 싸우고 있었더라? 지구였던가 아니면 내전이었던가? - 이미 전세가 기울어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게 될 마지막 전투를 통한 대역전에 남은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소년과 가족이 가진 어떤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비장하고도 영웅적인 한판 승부가 벌어지게 되지만 역부족이다. 그런 중에 소년의 어머니가 희생되고 결국 화성은 생명이 살 수 없는 행성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리는 말 그대로의 절멸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소년과 가족은 멸망 직전에 다시 현재의 지구로 돌려 보내지고, 그들은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방에서 자다가 일어난다. 하지만 이미 죽은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만화가 가진 시간여행의 흥미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는 운명론적 서사구조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것이 긴 꿈처럼 지워지고 현실로 되돌아 온 가운데 유일하게 부재하는 엄마를 찾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울려 퍼지던 마지막신은 어린 내게는 강한 감정적 충격이었다.


이렇듯 SF에 대한 나의 오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시간의 구조, 무엇보다도 화성에 대한 평생의 호기심을 심어 준 만화인 만큼 내 인생의 첫 만화로 소개함이 마땅한데, 그것이 존재했다는 자료가 아무 데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1993년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마더, 최후의 소녀 이브’ 라는 작품이 1996년 KBS가 ‘화성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수만년 전 화성이라는 배경, 그리고 엄마.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대했건만 같은 작품이 아니었다.

이러다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 만화는 혹시 내 자신이 꾼 꿈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어떤 계기로 그런 스토리를 생각하고는 어린 시절에 본 만화로 스스로 기억을 조작한 것일까? 혹은 그저, 너무 마이너한 작품이라 단순히 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 걸까. 이들 중 무엇이라도 좋다. 적어도 나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의미 있는 첫 만화로 각인되고 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접한 만화가 바로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이다. 애니메이션으로 널리 알려졌고 대부분 그 형태로 접했겠지만, 70년대 부산 장전동 별서점에는 분명히 철완 아톰, 혹은 우주소년 아톰의 종이 만화책이 있었다. 내게 아톰이 그 어떤 다른 만화보다 기억에 남는 이유에는 아톰의 삶과 그 이야기가 보여준 감성 때문이었다. 어쩌면 너무 조숙한 아이였던 걸까? 그 나이에 알맞은 언어를 찾을 순 없었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화성 특공대나 아톰에 빠져들며 느꼈던 주된 정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아톰은 태생부터 기구하다. 텐마 박사가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을 되살리기 위해 가장 인간에 가깝게 만들었던 기계 대용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아톰이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진짜 아들,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점점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급기야는 아톰을 때리고 학대하다가 서커스단에 팔아 버린다.


이후 아톰은 우리나라에서는 코주부 박사로 명명되었던 오챠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해져 함께 지내게 되는데, 그러면서 몰려오는 다양한 적 로봇들과 싸우는 것이 아톰 이야기의 주된 스토리다. 아직도 어릴 때 읽은 그대로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복잡 미묘한 서사 구조를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고, 심지어 나중에 본 애니메이션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그걸 굳이 나눠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진 않을 것 같다.
다만 그 시절 흔하던 로봇물과 아톰의 정서적인 차이가 있다면, 아톰의 경우 적 로봇들이 단순한 악당으로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아톰이 상대하는 로봇들은 인간과 비슷한 감정이 있거나 싸울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록 적이긴 하지만, 그 로봇들을 파괴하는 아톰에게는 조금씩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상처가 쌓여 간다.
한편으로는 인간과 로봇이라는 종 간의 관계 속에서도 나름의 긴장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 전체에 걸쳐서 때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불분명하다. 특히 최강의 적인 거대한 플루토와의 이야기들에서 그런 면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작품은 로봇 액션 전투 만화의 외형 속에서 왜 싸우고 왜 죽이는가, 또 나는 왜 살아가는가의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이건 바로 우리 인간들의 피묻은 현실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들의 은유다.
물론, 어린 마음에 그 모든 것을 저렇듯 정연히 알았을 리 없다. 하지만 어린 만큼 충격적이었던 그 느낌들이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내 정서와 문제의식의 근간으로 작용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 내게 아톰 시리즈 중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마지막 편인지 페러랠 월드인지 외전인지 모를 한 에피소드다. 아톰은 공격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거의 회복 불능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그랬던 그 앞에 포털이나 웜홀, 즉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고 아톰은 그 속으로 뛰어든다. 돌아온 곳은 다름아닌 오래 전 자신의 집. 멀리서 ‘아빠’ 텐마 박사를 발견한 아톰은 소생의 희망을 갖고 부서진 몸을 추스르며 그에게 다가가다가, 상황을 눈치채고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다.
그 때는 바로 텐마 박사가 아톰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실험실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 것이던 자신의 몸이 누워 있고 전극과 각종 장치가 부착되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는데도 어린 자신은 깨어나지 않는다. 아톰에 흔히 나오는 표현대로라면 ‘에네르기’가 부족하다.
명민한 아톰은 곧 깨닫는다. 저기 누운 스스로를 깨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그래서 그는 다치고 망가진 팔다리를 이끌고 새로 태어날 아톰과 연결된 고압 전기장치를 향해 걸어가고, 마지막 힘을 내어 그 속으로 뛰어든다. 그와 함께 갓난 아톰이 눈을 뜬다.


이것은 끝일까 시작일까? 글쎄, 자기가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될 때 그것을 끝이나 시작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의 나는 하인라인의 “All You Zombies” 처럼 그런 상황의 극단을 다루는 이야기에도 익숙하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에는 존재의 타임루프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기막힌 상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한편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쌓고 쌓다가 그것을 저런 형태로 벗어던지게 되는 아톰의 운명을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톰은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텐마 박사의 사랑과 학대, 서커스단, 수많은 로봇들과의 전투, 플루토, 그리고 자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 일들은 무한히 반복되며 영원히 아톰의 존재를 옥죌 것이다. 마치 해탈 없는 윤회처럼.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이런 것들을 느껴 버린 게 ‘건강한’ 건지는 모르겠다. 물론 요철 발명왕, 로봇찌빠, 로보트 킹, 신판 보물섬, 주먹대장, 도깨비 감투, 꺼벙이 등 내 또래가 좋아하던 모든 만화들도 좋아했다. 그 작품들이 주는 즐거움, 모험, 해학을 사랑했다. 그것도 분명히 어린 나의 한 모습이다.
하지만 내게 무게 있게 남은 작품이라면 역시 미지의 작품 화성 특공대와 우주소년 아톰 이 두 만화다. 청소년기에는 청소년기 대로,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가 들어서 대로 계속 내게 돌아온다. 어찌 보면 일생의 화두들이 이 두 작품에 다 담겨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라는.

나는 직업적으로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철학을 공부했고 음악에 청춘을 바치기도 했었다. 그래서 만화계와 본격적으로 가까이 있을 기회는 한 두해 전 까지는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를 사랑하고 또 만화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에는 이런 작품들의 힘이 실려 있다.
어릴 때 접한 첫 만화들, 거기에서 받은 영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중학교 때 읽은 소설, 고등학교 때 듣던 노래들이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하지만 한없이 날카로웠던 첫사랑의 기억이 평생을 내 일부로 함께 하는 것처럼.

생각해 보면 적어도 나의 세대라면, 아니 그 한참 후까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만화야말로 첫사랑일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과 신비로운 이야기들, 나의 세계와 닮아 있지만 무척 다르기도 한,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스토리. 우리 인생의 첫 만화는 물론, 만화는 언제나 그런 것 아니었던가.

필진이미지

원종우

과학기술 커뮤니케이터, 음악인, 기타리스트, 문화운동가, SF작가

* 과학 전문 팟캐스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
* 저서
-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유럽편> 역사의 아침, 2012
- <태양계연대기> 유리창, 2014
-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생각비행, 2014
- <과학하고 앉아있네 1,2,3,4,5,6,7,8,9,10> 동아시아, 2015~2017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아토포스, 2019 등

* 경력
20대 부터 음악과 대중문화, 과학, 역사 등 다방면에 걸친 많은 글을 썼고, 2008년 SBS창사특집 다큐 <코난의시대>작가로 SBS하반기 특별상과 환경연합 특별상, 휴스턴 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2012년부터 과학 커뮤니케이터 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고, 2013년 과학 대중화를 위한 ㈜과학과사람들을 창업하고 <과학하고 앉아있네>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토크콘서트, 전시 등 다양한 과학 이벤트를 만들며 한겨레, 사이언스올, 허핑턴포스트, 샘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지질자원연구원 등에 정기 기고하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경희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과 삼성물산, 애경그룹, 신용보증기금, 네이버, 과학기술연구회, 비즈워치, 하림, 한국선단 등 많은 기업과 관공서, 언론사에서 과학 및 4차산업혁명, 기후변화 강의를 해 왔다. 2016년 9월부터 2020년 5월까지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고정 출연했고, 2017년부터 국방TV <본게임>에 고정 출연 중이며 2023년 현재 110만 구독자의 <겸손은 힘들다 김어준의 뉴스공장> 과학 코너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