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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33 : 만화가 이상무의 문하생 시절과 데뷔

1962년 이상무는 김천 농고 졸업을 앞두고, 평소 작품을 통해 알게 된 만화가 박기준 작가에게 자신의 작품집과 편지를 보낸다. 기회를 준다면 성실히 일할 것을 다짐하는 작가 지망생의의 포부가 담긴 정성어린 장문의 글이었다. 편지의 답문을 안절부절 기다리던 어느 날 박기준 작가로부터 회신을 받은 이상무는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2017-08-10 박기준

필자가 이상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62년 겨울이었다. 김천 농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이상무가 평소 필자의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며 본인이 그린 만화 작품집과 편지를 보내왔다. ‘기회를 준다면 성실히 일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작가 지망생의 포부가 담긴 정성어린 장문의 글이었다. 그 때 이상무는 대구 계성고 출신으로 서라벌예술대학을 다니며 필자의 문하생으로 있었던 김희섭과 ‘크로바 동인회’의 같은 멤버였다. 김희섭이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던 이상무에게 필자를 소개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크로바 동인회’는 만화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곤충소년>의 김동화, <0심이>의 배금택 등 20여명이 ‘크로바 동인회’ 멤버였다.


필자는 이상무의 작품과 정성어린 편지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 이상무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필자의 회신을 안절부절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이상무에게 회신하였다.
필자는 마침 실력이 있는 참신한 문하생이 필요하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실력도 있다고 생각되어 이상무에게 회신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63년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이상무는 회기동 경희대학교 근처에 있었던 필자의 화실을 찾아 왔다. 그날이 필자와 이상무에게는 길고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필자의 집은 채소와 화초가 심어져 있는 마당이 딸려 있는 건평 50평의 1층 새집이었다. 마루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없었던 역사자료 사진집, 전쟁사 자료집, 외국의 만화 일러스트 자료집 등이 비치되어 있는 서가와 함께 다양한 작업 화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벽 한쪽에는 ‘금연’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었다. 필자가 담배를 싫어하여 문하생들에게도 담배를 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서울로 상경한 만화가 지망생에게는 만화작가 화실의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한 풍경이었던지 집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동안 이상무는 마루를 주시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필자는 당시 <올림픽 소년>시리즈를 인기리에 펴내고 있었다. 전국의 만화방에서 필자의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치던 때였다. 필자가 시나리오와 러프스케치를 완성하면 화실의 문하생들이 파트별를 나누어 나머지 작업을 하였다. 문하생 중 가장 경력이 많았던 김학무가 연필 스케치를 하였고 김희섭은 그 스케치 위에 펜 덧칠을 하였다. 그리고 가장 늦게 들어왔고 경험이 전무했던 이상무가 먹칠과 수정 그리고 지우개 작업을 하였다.

△ 문하생 시절의 이상무 
(앞 : 박기준(필자), 뒤좌 : 이상무, 서병간, 김학무, 1963. 9.)

△ 이상무는 박기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올림픽 소년의 작업을 하였다

필자의 집은 마당을 두고 가족이 생활하는 살림집과 문하생의 숙소와 작업실로 겸해서 사용하는 네칸짜리 화실로 구분되어 있었다. 화실은 문하생들만의 공간이었다. 문하생들은 일반 직장인처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작업을 하였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시간이어서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연습하거나, 독서를 하였으며 또는 외출하여 영화감상 등을 하였다. 그리고 보수는 업무의 난이도에 따라 월급으로 지급하였다. 당시 제일 위의 선배인 김학무의 경우 지금의 화폐가치로 매월 500만 원 정도 받았다. 일반 월급쟁이와 비교하면 높은 편이었다.

1963년 가을, 김학무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김희섭이 스케치를 담당하였으며 이상무가 펜터치를 담당하였다. 문하생들은 김학무의 입대를 섭섭해 하는 한편 일계급씩 승진(?)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이상무가 맡아하던 작업은 신입생 배금택이 하게 되었다.

지금의 만화출판시장도 그렇지만 만화는 계절과 유행 그리고 시대상황과 독자의 취향 등에 민감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1960년대는 <하이눈>, <역마차>, 그리고 <베라쿠르스> 등과 같은 미국의 서부영화가 최고의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이에 국내 영화계도 미국의 서부영화와 같이 배경을 중국 만주 벌판으로 하여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적용한 영화들이 유행하였다. 독립군과 일본군 그리고 만주의 마적단이 등장하여 마치 미국의 서부영화를 보는 듯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1963년 필자와 문하생들은 당시 유행하던 서부영화와 같은 새로운 신작 <풍운아>를 만들게 된다. 신작 <풍운아>를 만화로 연출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대의 만주 식 건물, 풍물, 복장, 장식, 무기 등을 그때의 것과 다름없이 묘사해야 하는 것은 문하생들에게도 과제였다. 그래서 필자는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실감나는 연출을 위하여 옛 자료를 스케치해오도록 문하생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에 이상무 등 문하생들은 자료수집을 위하여 당시 일본 서적을 많이 취급하고 있던 충무로를 누비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자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명보극장에서 김기영 감독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가 상영하고 있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라디오 인기 드라마로 오랫동안 방송되었던 이서구 작가의 <아로운>을 원작으로 한 반일영화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전쟁터로 끌려갔다가 만주로 탈출하는 어느 학도병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반일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 선전유인물(1961년 김기영 감독)

이상무를 비롯한 문하생들은 자료 스케치를 위해 스케치북과 연필로 무장하고 극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어서 입장이 불가였던 배금택에게는 개똥모자를 푹 눌러 씌어 까까머리를 숨기고 마치 007의 제임스 본드처럼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는 등 변장시켜 극장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배금택을 문하생들 한가운데 앉혀 경찰의 임검에 눈에 띄지 않도록 배려했다. 당시만 해도 군사정부시대여서 극장과 같은 대중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는 간첩이라든가 사회 불만인 사람 등을 색출한다거나 혹 모를 소요를 미리 막기 위하여 경찰들을 상주시켜 검문검색을 하였던 무시시한 시절이었다.
이상무를 비롯한 문하생들은 극장의 어둠 속에서 커닝을 하듯 화면에 필요한 건물 양식, 복장, 풍물, 장식 등을 열심히 스케치 하였고 특이 이상무는 중국 동북부 만주의 건물 양식 등 많은 자료를 스케치를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극본을 실감나게 그림으로 연출한 <풍운아>는 대박이 터졌고, 이후 중국 만주를 배경으로 한 활극 <풍운아> 시리즈는 <독립군 풍운아>, <돌아온 풍운아> 등으로 계속 발행하였다.

△ 당시 이상무가 작업에 들어간 ‘풍운아’ 표지

이런 <풍운아>의 성공은 이상무에게도 적지 않은 변화를 안겨다 주었다. 그림실력이 어느 누구보다 탁월했던 이상무에게 필자는 <풍운아> 시리즈의 표지도 맡겼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상무에게 필자의 작품 스케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당시 이상무는 필자의 <바가지> 1·2·3, <태극유니폼>, <검은꽃> 시리즈 등 많은 작품에 참여하였고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자 수유리에 단독 전세를 얻어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6년 필자는 이상무가 혼자서도 충분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 독립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틀어 ‘노미호와 주리혜’로 개명한 학원 명랑 만화 시나리오를 이상무에게 넘겨주며, 4쪽의 그림으로 연출하고 필명은 ‘이상무’로 할 것을 주문하였다. 사실 필명 ‘이상무’는 첫 제자였던 김학무에게 주려고 했던 이름이었다. 김학무가 군입대를 앞두고 있어 항상 긴장하고 이상없이 군생활을 마치라는 의미에서 군대용어였던 ‘이상무’를 필명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학무가 군에 입대하여 훈련 도중 열사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결국 ‘이상무’라는 필명은 박노철(이상무)에게 주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이상무의 <노미호와 주리혜>는 당시 필자가 발행하던 월간 종합학생잡지 《여학생》에 실리게 되었다. 이후 <노미호와 주리혜>는 1985년까지 약 20년간 연재하게 되었다. 필자의 제안에 이상무는 뛸 듯이 기뻐했다. 동료들에게 중국집에서 한턱을 내기도 하였다. 이상무의 데뷔에 모두 부러워했다. 특히 후배였던 배금택은 다음 승진차례가 오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이상무에게 군대 입영영장이 날아왔다. 하지만 이상무는 군대에 입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미호와 주리혜>의 연재를 한 회도 거르지 않았다. 이는 이상무가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운 좋게도 부대장의 관사에서 근무하게 되어 원고를 할 수 있는 틈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미호 와 주리혜>의 원고뿐만 아니라 단행본 스케치도 하여 보내왔었다.

△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군복무 중에도 ‘노미호와 주리혜’는 매달 완성해 보냈다 
(1967년 동료들과 함께, 좌 두 번째 이상무)

△ 첫 데뷔작 주니어 학원물 ‘노미호와 주리혜’ 
<여학생>지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다(박기준 원작, 이상무 그림연출, 1966년 5월호 게재)

△ 이상무 작가가 군 복무 중 필자에게 보낸 편지

<노미호와 주리혜>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이러한 <노미호와 주리혜>의 인기로 인하여 이상무에게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1972년 군에서 제대한 후 본격적인 창작생활에 들어가 ‘독고탁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상무의 인기는 순풍에 돛단 듯 올라갔고, 이상무를 모르는 독자가 없게 되었다.


△ 독고탁 시리즈 
스토리 극화 ‘주근깨’에서 독고탁이란 개릭터를 등장시키면서 단행본 만화 시작을 알리며 독자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1972년 합동문고 발행)

△ 독고탁은 애니메이션으로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다루었지만 작품속의 주요 테마는 가족과 휴머니즘이다. 
박동감있는 줄거리로 시청자를 불러 모았다. 애니메이션으로 가장 많이 제작된 작품으로 이상무의 독고탁을 꼽을 수 있다.




이상무 약력

1946년 김천 출생,(본명 박노철)<영남일보>어린이난에 4컷 만화를 연재 했을 만큼 학창시절부터 재능이 있었다.
김천 농고 졸업 후, 단행본 출판사 크로바 문고 박기준의 문화에 입문
1966년 <여학생>지에 ‘노미호와 주리혜’를 연재하며 데뷔
15년 대 장편의 연재 기록 세우며 출세작이 되다.
1972년 제대후 ‘독고탁 시리즈’단행본으로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오름.
캐릭터들의 특이한 이름과 리얼한 줄거리로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극복해나가 마침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을 지켜보며 독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의 작품속에 흠뻑 빠져들어 그 벅찬 감동을 함께 맛 보았다.
1975년<한국 만화가 협회>이사 역임.
1976년 민주화 운동이 만화계 판도가 크게 변화. 월간 <소년중앙>에 ‘우정의 마운드’ 연재.‘울지 않는 소년’,‘아홉개의 빨간모자’를 연재하며 바쁜날을 보냄.
1980년 ‘다시 찾은 마운드, 비둘기 합창’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대성공을 거둠.
1982년 ‘소년한국’에 다시 찾은 마운드로 최고 정상에 오름.
1986년 성인지 ‘만화광장’에 ‘포장마차’연재
1992년 ‘스포츠 조선’에 골프 극화‘싱글로 가는 길’연재
1994년 한국 도서잡지 윤리상 수상
2016년 심장마비로 아쉽게도 세상과 하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