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웹투니스타의 Deep Impact - 1st Impact> 흘러간 시간, 다가올 미래.

돌배 작가가 네이버에서 2018년 봄 완결한 <계룡선녀전>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2018-06-26 웹투니스타

돌배 작가가 네이버에서 2018년 봄 완결한 <계룡선녀전>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전작이자 데뷔작인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 샌프란시스코라는 지역이 가지는 특징을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이 갖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포용을 이야기 했다면,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 기반으로 한 현재의 - 또는 환상속의 - 대한민국과 한국의 무속신앙에 이야기의 뿌리를 두고 있어 전작이 담고있던 이야기보다 더 깊고 넓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이루어진 전래동화를 재해석한 작품들 중에서 이 작품을 특히 주목해야 하는 건, 오래된 이야기를 재해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별을 뒤집는다거나, 역할의 역전이나 시점의 전환으로 단순히 익숙한 이야기를 낯설게 본 작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한, 돌배 작가는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이런 내용들을 너무 어렵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신화적으로도 풀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담론의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내용은 앞서 말했다시피 이 웹툰의 모티브가 <선녀와 나무꾼>에서 차용되었다는 점이다.
이 웹툰에서 날개옷을 빼앗긴 선녀(탐랑성 선옥남)는 인간계에서 남편을 잃고, 거대한 알로 환생한 아들 점돌과 호랑이로 환생한 딸 점순이와 함께 그가 환생하길 벌써 699년째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대학에서 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재직중인 정이현과 그의 제자 김금이 추석을 맞아 함께 김금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계룡산 근처에 있는 김금의 고향집에 가던 중, 카페인을 급하게 찾는 정이현을 위해 계룡산에 있는 ‘선녀다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는 할머니의 모습을 한 바리스타 선옥남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다방을 떠난 정이현과 김금은 마치 봄이 온 것처럼 따뜻하고 아름다고 신비로운 계곡 아래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탐랑성 선옥남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선옥남은 드디어 남편을 만났다는 확신을 하게 되고, 한양, 즉 서울로 정이현과 김금을 따라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일하는 대학의 미니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들 둘의 주변에 머무르게 된다.


이런 전개 때문에 처음에는 이 웹툰이 가벼운 유머를 섞은 가벼운 웹툰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교수와 김금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와 선옥남의 정체, 그리고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주제부로 파고들며 무거운 이야기를 내놓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선옥남은 선인이다. 그것도 북두칠성의 첫번째 별 탐랑성을 관장하는 선녀였다. 그녀가 ‘남편이다’라는 직감을 한 정교수와 그 제자인 김금도 전생에는 모두 선인으로 북두칠성의 거문성 이지와 북두칠성의 마지막별 파군성을 담당하는 바우새 였다. 이들은 벌을 받아 인간계로 내려왔고, 한명은 사냥꾼에게 쫓기다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훔치라고 말하는 사슴으로 그리고 한명은 그 나무꾼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선옥남은 그 날개옷을 도둑맞은 선녀였다.
하지만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이야기의 흐름을 독자들이 매끄럽게 이해하도록 돕는 장치였을 뿐, 그 너머에 작가가 창조해낸 이야기가 진면목을 드러낸다. 바우새와 이지는 선인이 되기 전, 원래는 인간이었고, 모든 이야기는 그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천년묵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기근이 든 마을에서 버림받아 죽어가던 이지는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 직전, 북극성을 관장하는 북두성군은 그에게 이지라는 이름을 주고 선인으로 임명한다.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작품은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설화를 웹툰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지만, 작품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소재들 때문에 특별하다. 이 웹툰을 관통하는 내용 중에 가장 흥미로운 지점을 먼저 꼽자면 선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인간본위의 세상을 논한다는 점이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아마도 니체의 풀 네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보다 더 유명한 이 말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신에게서 찾던 중세를 지나 마침내 인간 본위의 세상이 열렸다는 일종의 선언 - 사실, 그 이전에도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내 존재의 이유에 신이 끼어들지 않음을 선언하는 신호들이 있었지만 - 이다. 신과 인간을 분리하는 근대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탐랑성 선옥남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선인인 자신의 입으로 ‘신들이 사모하는 대상은 신들을 만든 인간’이라는 말을 한다. 뿐만 아니라 선인은 인간의 믿음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전통적 관점에서의 선인은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이며, 인간은 물론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다. 창조자로서의 신과 그가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그의 창조물인 인간계의 중간인 선계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고 거꾸로 인간과 신을 잇는 존재로서의 신선을 이야기한다. 전통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동시에 고정관념을 완전히 해체한 시도가 참신하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작품의 후반부로 가면, 100년 동안 알로 살고 있던 선옥남의 아들(의 환생)인 점돌이가 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마치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점돌이 부화하고 남은 알 속에는 우주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점돌은 말 그대로 한 세계를 파괴하고 뛰쳐나왔다. 그렇다면 점돌은 성스러운 것과 악마적인 것이 결합한 존재일까? 점돌은 태어나길 청룡으로 태어났다. 말하자면, 자연의 모습이다. 번개를 관장하고 비를 내리며 구름을 움직이는 청룡인 점돌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세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지 않을까.

다중우주론

점돌이 깨고 나온 알은 우리의 우주이며 동시에 우리의 우주가 아니다. 최신 과학이론 중 요즘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개념 이 바로 다중우주론이다. 우주가 여러 조건에 의해 갈래가 나뉘고, 다중의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점돌의 알이 담고 있는 우주를 보면, 이 작품에서는 다중우주론, 또는 거품우주론을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중으로 분화하는 우주 중 하나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점돌이 깨고 나온 알이다. 앞서 말한 대로 모든 비극의 시작점에 있던 이면의 이야기를 분노에 찬 이지에게 보여주고, 그를 설득시키는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준비해온 선인들의 모습은, 마치 입자 몇 개를 광속에 가깝게 가속해 서로 충돌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이 기적과도 같은 일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작가는 45화의 자료화면 이미지를 유럽 입자물리학 연구소, CERN에서 직접 관측해 공개한 이미지를 차용했다. 선인과 전래동화의 이야기를 통해 최신 과학이론을 다루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고정관념 비틀기

지금까지 근대의 시작부터 최신의 과학이론을 다루었다는걸 받아들이기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면, 작가는 이 다음 이야기를 준비해 놓으니 따라가 보자. 독자들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다중우주론 이야기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감탄하고 있던 자신들에게 작가는 우리에게 더 가깝지만 더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를 것들을 풀어놓기 때문이다.

작가는 <계룡선녀전> 전체를 통해 신선 - 선녀에 덧씌워진 고정관념마저 정면으로 비틀어버린다. 작품 후반부 에피소드인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사슴’ 에피소드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작가의 각색을 더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 작품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가진 이성애 기반 애정관계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신선이라면, 또는 선녀라면 당연히 이성애를 기반으로 애정관계를 형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고정관념은, 파군성 바우새와 탐랑성 선옥남, 그리고 거문성 이지의 관계를 통해 산산조각난다.


신선 바우새와 선녀 선옥남을 질투한 선녀 이지’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잘 정리해두자. 이지는 누구를 왜 질투했을까? 아마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선녀 이지는 바우새를 사랑했고, 때문에 선옥남을 미워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여성형으로 표현된 이지의 질투는, 당연히 바우새에 대한 연정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지점을 이지의 현신의 대사를 통해 부숴버린다. 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거문성은… 이지는 탐랑성을 마음 아프게 사모해 왔답니다.”

이지의 질투는, 바우새에 대한 연정이 아니라 탐랑성을 마음 아프게 사모했기 때문에 바우새에게 느끼는 질투의 감정이었다. 이지는 선계에서 벌을 받아 인간계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지가 벌을 받은 이유는 인간계에 직접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개입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지, 같은 선녀인 선옥남을 사모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폴리아모리

심지어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선옥남은 현생에서 처음으로 남편의 환생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대상은 나무꾼이었던 바우새의 환생인 김금이 아니라 정교수의 환생인 이지였다. 여기까지는 이성연애 위주의 세계관을 비틀었다면, 당연히 동성연애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상상했던 사람들에게 성별을 바꾸어 환생한 이지의 모습을 보며 시대를 건너뛴 애절한 사랑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는 ‘폴리아모리’ 개념을 엿볼 수 있다. 다자연애를 뜻하는 폴리아모리는 연애 당사자간의 합의를 기반으로 문자 그대로 다자간의 연애를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700년을 살아온 선옥남은 바우새와 이지 모두를 끌어안지만, 이지의 환생인 정교수는 ‘김금이 괴롭히면 나에게 오라’는 말로 모노가미(1:1의 연애, 또는 독점연애를 뜻하는 말)를 보여준다. 당사자 간의 합의에 기반에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돌배 작가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 예를 들면 전래동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이니 당연히 두 사람간의 이성애를 중심으로 다루지 않을까 - 했던 지점을 완벽하게 비틀어버린다.

앞서 말한대로 전작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배경 지역의 위치적 특성을 활용해 이민자와 해외 거주 노동자를 중심인물로 배치했다. 때문에 전작에서는 다양성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였지만, <계룡선녀전>은 오히려 전래동화 기반에 토속신앙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작가가 꾸준히 해왔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은 반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작품이 가장 놀라운 지점은 다양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전통적인 미덕인 정직, 협동, 배려, 소통과 같은 가치들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잊고 사는 값어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전통적인 신선의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부를 다룰 때에는 과감하게 전통적인 관점을 비틀지만, 그것이 어색하지 않다.


때문에 돌배 작가가 작품을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는 소중하다. 거문성 이지의 과거처럼 혐오와 분노가 가득한 시대에 따뜻한 시선으로 메시지를 명징하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계룡산 주변 시골마을에 살지만 아일랜드산 싱글몰트 위스키를 좋아하는 김금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처럼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돌배 작가는 흘러간 시간들에 남은 이야기를 통해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최신 과학, 그리고 철학적인 담론까지 담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정신적 포만감을 주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날 이 작품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