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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 유튜브와 노스탤지어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 종일 넋을 놓고 유튜브만 파고 있었음을 깨닫고 흠칫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하게 판단해보니 나는 중증 유튜브 중독자였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자연스레 웹브라우저를 켜고 즐겨찾기의 중심에 걸어둔 유튜브부터 들어간다.

2018-10-01 박수민


 지금은 유튜브 시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 종일 넋을 놓고 유튜브만 파고 있었음을 깨닫고 흠칫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하게 판단해보니 나는 중증 유튜브 중독자였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자연스레 웹브라우저를 켜고 즐겨찾기의 중심에 걸어둔 유튜브부터 들어간다. 특별히 봐야할 영상이 있거나 구독하는 채널의 업데이트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뜬금없이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하고 결과가 꼬리를 문다. 이건 위키에 뭔가를 찾으러 들어갔다가 연관항목에서 길을 잃는 일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유튜브 중독은 애초에 앓고 있던 검색 중독이 전이된 것이다.


<대부>의 명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언젠가 누구나 쉽게 동영상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영화는 전문가주의가 사라지고 진정한 예술 형식(art form)이 될 거라며 유튜브의 등장을 간접적으로 예언한 적이 있다. 예술 형식은 모르겠지만, 동영상은 확실히 우리의 일상 형식이 되었다. 미취학 유아들이 부모의 스마트기기를 능숙하게 다루어 유튜브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찾아보는 모습이 이제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어린이 장난감 리뷰의 구독자들은 정말로 어린이들이다. 이제 사람들은 궁금한 키워드를 검색엔진의 창백한 창에 입력하는 대신 유튜브로 검색한다. 활자와 이미지의 정보보다 움직이는 동영상이 주는 정보가 더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백번 묻느니 불여일견(不如一見). 높은 해상도는 간접체험의 한계마저 허문다.


△ 신동우 <풍운아 홍길동>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한국만화걸작선20, 전6권)

유튜브를 보면 전문가주의 역시 사라졌다. 특히 리뷰에선 채널을 개설한 모두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썸네일에 얼마나 자극적인 문장의 타이틀을 달았는지가 클릭수를 좌우할 뿐, 실은 똑같은 출처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리뷰어들이 넘친다. 어떤 거대한(그리고 뻔뻔한) 아마추어리즘이 유튜브 시대의 디폴트 값이 되었다. 필요한 배경 지식은 (그 안의 정보가 정확한지는 차치하고) 위키를 검색하면 그만이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리뷰어가 스스로를 크리에이터라고 자처하는 모습은 조금 의아하다. 남의 창조물인 제품과 작품을 내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물론 일종의 재창조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그 창조자와 어깨를 나란히 해도 되는 걸까? 창작이란 내가 알기론 리뷰보다야 훨씬 골치 아프고 노력을 요하는 일인데 말이다.

소위 ‘작가’라고 불리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필자는 오히려 스스로를 작가, 예술가, 크리에이터라 명명하고 소개하고 불러주길 원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에 리뷰어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잘나가는 리뷰어가 ‘크리에이션’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자기가 생각한 것을 재미있게 잘 말하는 언변의 능력일 거다. 물론 이건 보통 능력이 아니고, 무엇보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리뷰만이 아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떠드는 걸 노출하는 일에 대중의 클릭이 모이면 자본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과학자나 대통령, 운동선수와 연예인을 지나 이제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유튜버가 되는 것이다. 작금의 문화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만으로 돈과 인지도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개인의 꿈과 이상은 특정 플랫폼에 갇혀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불멸의 플랫폼에 갇혀있지 않은가. 나는 틀림없는 꼰대지만 꿀 빠는 일까지 부정할 정도로 고고하지 못하다. 누구나 꿀은 빨고 싶다.

노스탤지어의 농간

아무튼 필자는 온갖 분야의 중독성에 대한 방어력 최약체로서 애써 유튜브를 멀리하려 노력해봤다. 컴퓨터에서 도망쳐! 그러나 주변에 인터넷 접속 가능한 거의 모든 전자기기는 반드시 유튜브 앱이 깔려있고 게임 콘솔을 통해 TV로 유튜브를 보는 맛도 쏠쏠하다. 유튜브를 끄고 뭔가 작업에 도움이 되는 걸 보려고 한들 넷플릭스를 켜니 거기서 거기다. 영상의 대폭발 시대. 오늘은 뭘 볼 것인가 궁리한 끝에 타이틀을 골라 플레이어에 집어넣고 리모컨을 들어 플레이를 누르는 의식이 필요한 물리 매체의 시간은 이제 구닥다리다. 우스운 건 넷플릭스의 경우 외국과 시간차가 없는 최신작을 보는 것보다 과거에 이미 본 작품을 둘러보며 좋아요를 누르고 내가 찜한 콘텐츠에 넣어두는 일이 더 많다는 것. 그렇다. 이 매체 중독자가 잘나가는 유튜버들이 고까운 대신 주로 검색한다는 게 바로 지난 기억 속의 라이브러리들이다.

과거에는 명절마다 특집 TV 프로그램의 방영시간을 미리 확인해두는 것이 의례적인 절차였다. 어릴 적 나는 신문의 공중파 시간표를 볼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꼼꼼하게 체크했다. 특히 비교적 최신 영화를 특선 대작이라는 이름으로 온 가족이 모인 저녁 프라임 타임에 방영하는 걸 놓쳐선 안 되었다. 명절 손님 성룡의 영화는 언제나 반갑고 무엇보다 휴일 오전에 해주는 해묵은 특선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좋았다. 지난 명절에도 틀어주었건만 <머털도사> 같은 명작은 이상하게 명절 오전에 또 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아직 친척과 사촌들이 시끌벅적 모여들기 전, 모처럼 빨간 날의 여유를 만끽하며 마루에 누워 뒹굴며 국산장편만화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90년대의 어느 날에 지나지 않는 유년기의 한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꼈다.

필자 같은 인간에게 최신 정보와 음악과 게임과 기타 온갖 리뷰와 퍼포먼스를 제외하고 유튜브의 보석이자 존재가치는 이런 과거의 영상들이다. 누군가 VHS 테이프에 녹화해놨던 그 시절 영화/드라마와 더빙 외화와 TV 프로그램과 광고 등을 보고 있으면 뭔가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뇌리 저편에 묻혀있던 뉴런을 툭툭 건드린다. 언제나 최신의 유행 문화를 갈구하며 살리라 믿었건만 30대 중반에 이미 복고를 좇는 과거 지향적인 인간이 되다니! 풀HD 60프레임이 기본인 플랫폼에서 화질이 좋아봤자 480p 정도인 흐린 영상에 빠져있는 인간을 보라.

△ <풍운아 홍길동> 복간 단행본 1권 속지그림 <홍길동>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그림이 실제로 움직이는 느낌.
다만 신동우 화백 스타일의 동그란 눈이 정겨운 길동의 모습은 애니메이션에선 날카롭게 그려진다.

인간은 자신의 10대 시절에 접한 문화 경험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는 것 같다. 그 감정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집단적이다. ‘세대’라는 개념을 함부로 쓰는 것을 경계해야겠지만, 같은 세대를 공유했다는 감정은 집단적 노스탤지어를 형성하고 유튜브 안에는 그런 게 가득하다. 작금의 현실로서 거쳐 온 과거는 노스탤지어 속에서 어느덧 낭만적인 과거로 탈바꿈한다. 옛날이 더 좋았다, 옛날 작품이 훨씬 진정성이 있었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게 되는 거다. 문제는 대중의 향수, 복고에 대한 욕망을 자본이 놓치지 않고 또한 부추긴다는 점이다. 2010년대 들어서 현대 엔터테인먼트가 노스탤지어에 과잉 의존하고 있다는 견해를 여럿 접하게 된다. 아티스트들이 과거의 히트곡을 다시 부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시즌의 노래가 유령처럼 되돌아온다. 그렇게 실패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리메이크가 먼저 고려되고, 프랜차이즈 영화는 끝없이 속편이 나오거나 리부트 된다. 비교적 젊은 매체인 게임마저 벌써 레트로의 영역에 들어서서 복각판 콘솔 발매와 리마스터링이 인기다. 유행에 있어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광고와 패션 분야에서조차 80년대와 90년대 감성이 가득하다.

노스탤지어가 꼭 나쁜 건 아니다. 개인에게 과거의 회고는 자아를 더욱 명확히 해준다. 산업에 있어 잘 만든 리메이크와 성공한 리부트는 그야말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사례다. 그러나 과거에만 사로잡히는 것은 결국 퇴행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우리에게는 미국과 일본처럼 자랑스레 부활시킬만한 콘텐츠가 부족하다. 그때 당시는 최신 유행이라서 돈이 되었던 사업이 이제 와서 다시 보면 낯 뜨거운, 그야말로 한 철 장사에 지나지 않았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한들, 외국 메카닉과 캐릭터를 대놓고 표절했던 애니메이션과 무판권 비디오용 영화와 김청기/심형래식 특촬물 등을 리메이크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독창성과 온전한 서사가 결여된 탓에 복기할 가치마저 상실한 까닭이다. 유튜브에서 한번 틀어보곤 “아이고... 옛날엔 이런 걸 봤었구나!”하고 덮어둬야 할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추억이다.

더 옛날에서 찾은 미래 - <홍길동>의 경우

지금의 유행이 가당찮고, 과거의 추억이 마땅찮을 때, 갈 곳 잃은 유튜브 중독자는 어디로 가야 할까? 넷플릭스? 트위치? 공중파? 필자가 권하는 곳은 자신의 추억보다 더 먼 옛날이다. 나의 노스탤지어가 존재하지 않는 더 먼 과거의 콘텐츠. 옛날 것이지만 내가 처음 접하는 것은 곧 새것이다. 바로 고전의 세계. 한국영상자료원이 제공하는 한국고전영화 채널은 유튜브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역 중 하나다. 왜냐면, 세상에서 제일보기 힘든 고전영화가 바로 한국의 고전영화이기 때문이다.

클래식과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는 물론 저예산 아트하우스와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까지도 필름이 잘 보전되어 2차 매체로 여러 차례 재생산하는 외국에 비해, 과거의 우리 영화는 당대의 흥행작마저 필름이 온전하게 보존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상영이 끝나면 필름을 폐기하거나 필름에서 나오는 화학 성분을 얻기 위해 싼 값에 공장으로 넘어가곤 했고, 영화를 만들거나 저작권을 소유한 주체가 모호해지면 영화사나 극장 창고에 방치되어있던 필름마저 행방을 감추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외국 작품의 저작권에 무지했던 만큼 자국 작품의 저작권에 무신경했던 것. 미래를 향한 자료 보관의 중요성이 지금의 금전 문제 앞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결과, 아직까지도 문헌상으로만 확인될 뿐 실제 원본 필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가 많다. 콜렉터스럽게 표현하자면, 옛날 한국영화는 레어도 이런 레어가 없다.

△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 (1967) 개봉 당시의 오리지널 포스터. 애니메이션 본편과 같은 그림체다.
“소년조선일보 연재장편만화 ‘풍운아 홍길동’ 드디어 영화화!”

‘한국 최초의 장편만화영화’이자 ‘최초의 연재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을 가진 1967년작 애니메이션 <홍길동> 역시 이만희의 <만추>(1966)나 나운규의 <아리랑>(1926)처럼 영화가 있었다는 증거는 있지만 정작 필름은 없는 전설의 작품으로 남을 뻔 했다. 당대 관객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작품을 되찾은 건 불과 10년 전, 2009년 일본 오사카의 어느 필름아카이브에서 일본에 수출된 16미리 프린트를 발견하여 한국에서 보관 중이던 오디오 필름을 덧입혀 복원에 성공한 것이다. 원래의 타이틀과 스태프 롤이 유실되고 ‘소년용자 길동(少年勇者 ギルドン)’이라는 일본 타이틀이 뜨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온전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복원이다. 수고롭게 되살려 블루레이로 발매했던 이 작품이 3주 전에 유튜브 한국고전영화 채널에 올라왔다. 지난 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편리하게 보는 셈이다.

필자는 처음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보았다. 내가 알던 원작자 신동우 화백의 만화란 어렸을 적 보물섬이나 소년중앙 같은 만화잡지 중간에 실리던 진주햄 소시지 광고와 금성출판사 칼라판 학습만화의 친숙한 그림체, 그리고 가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같은 TV 프로그램에 직접 게스트로 출연해 쓱쓱 그림을 그려보이던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몇 년 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복간한 한국만화걸작선 <풍운아 홍길동>을 구입해 읽었을 때도 필자는 책에서 홍길동이 아니라 혹시 같은 60년대의 일본작가 시라토 산페이(白土 三平)의 <닌자무예장>이나 <카무이전>같은 정서를 유사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어긋난 기대를 가졌다. 이미 정점에 오른 화백의 그림체는 나 같은 만년 중2병 리뷰어의 눈으로 보기에 독자보단 그리는 작가가 더 즐거운 그림으로 읽혔고, 김원빈의 <주먹대장>을 최고의 한국고전만화로 생각하는 내게 홍길동은 필수교양 정도의 위치에만 머물렀다. 그의 형 신동헌 감독에 대한 기억도 <아기공룡 둘리> TV 애니메이션 중 특히 배경 색채와 움직임이 도드라졌던 정글과 비누방울 시퀀스를 연출한,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원로라는 인식이 전부였다.

△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의 재개봉 포스터. 오리지널과 달리 포스터 그림이 본편과 많이 다르다.
‘쾌남’ 홍길동 버전의 포스터는 감독 이름이 ‘박삼천’(?!)으로 되어있는 버전도 존재한다.
세기상사가 대체 어떤 회사였는지 아주 미심쩍은 부분.

그러나 수십 년 뒤의 한낱 독자에게 그냥 옛날 만화 취급당했던 <풍운아 홍길동>은,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접하고 나자 내 안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작품은 내 선입견보다 훨씬 젊고 새로웠다. 정교하게 그러나 부드러운 선을 살려 그려진 그림과 색채는 유려하고, 24프레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리미티드 기법으로 쓱싹 움직이는 만화적 액션은 박진감이 넘친다. 좌우로 휙휙 휘두르는 길동과 차돌바위의 칼(도끼)놀림에 우르르 달려왔다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포졸들의 모습은 원작 만화의 완벽한 재현이다. 게다가 대사를 먼저 녹음한 프리레코딩 방식으로 캐릭터는 대사에 맞게 입을 움직인다. 플롯이 원작과 마찬가지로 쉽게 이어지는 편이긴 하나 서사에 큰 문제가 있다곤 할 수 없다. 미군이 쓰다 버린 필름을 씻어다 그 위에 덧대어 그렸다는 처절한 작업으로 만든 한국의 첫 장편만화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품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옛날 애니메이션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오리지널리티’에서 오는 강력한 ‘아우라’였다. 이건 ‘진짜’다!

<홍길동>은 정말이지 잃어버린 성배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이 홍길동으로 시작했음에도 왜 독창성을 잃어야만 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오리지널인 홍길동은 표절로 얼룩진 시절에서 노스탤지어를 찾아야 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다시 세운다. 한국만화사상 최고의 사이드킥이라 할 차돌바위(김순원 성우님의 그리운 목소리)가 홍길동 대신 호피, 곰쇠와 활약하는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이어서 보고나면 궁금증과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홍길동이 다시 등장하는 3편은 왜 없을까. 이 홍길동은 왜 트릴로지가, 시리즈가,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탄탄한 프랜차이즈가 되지 못했나. 그리고 도대체 <돌아온 영웅 홍길동>(1995)은 왜 그렇게 만들었나! 자본을 쥔 자들이 진정한 크리에이터의 독창성에 대한 합당한 대우와 보상을 해주는 대신에, 지금 이렇게 베끼면 쉽게 돈을 번다는 장사치의 논리로 몇십 년을 해먹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홍길동>에서 사악한 사또 엄가진과 부하들을 쓰러트린 직후의 장면. (유튜브 캡처)
차돌바위가 잠시 지은 허무하고 슬픈 표정에 시선이 머문다.

당장 지금의 부끄러운 추억

지금 당장 돈이 되니까, 어쩌다 잘되면 꿀을 빨 수 있기 때문에 너도나도 뛰어드는 유행을 경계하는 이유는 훗날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대중문화가 무서운 것은 어떻게든 잔상을 남긴다는 점이다. 작가는 죽어 사라지지만 작품은 남는다. 재미있고 클릭수가 높으면 그만인 플랫폼 시대일수록 창작자 스스로 콘텐츠에 내실을 기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낯 뜨거운 과거의 퍼포먼스나 돈만 벌고 끝난 한 철 장사로만 남게 될지 모른다. 특히 가볍게 소비되는 인터넷방송, 웹툰, 웹소설 등 웹 기반의 콘텐츠는 문자 그대로의 불쏘시개는 안 되는 대신 영원히 복사/공유되는 저주받은 파일의 운명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작가는 마땅히 자신보다 작품의 운명을 두려워해야 한다. 미래를 묻고자 할 때, 결국 고전 말고는 답이 없다. 어느 날 유튜브의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는다면, 자신의 노스탤지어를 우회하여 더 먼 옛날로 가시기 바란다.
필진이미지

박수민

만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탐독의 만화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