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이젠 너무나 익숙해진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은 마치 원래 우리말이었던 것처럼 쓰이곤 한다. ‘빵’은 포르투갈어가 일본으로, 또 일본어가 우리에게 들어오면서 굳어져 ‘빵’이 되었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들은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반면 일상의 말처럼 쓰이지만 묘하게 생소한 단어가 있다. ‘마녀’는 그런 단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영어 ‘Witch’의 번역어인 ‘마녀’는 ‘마녀사냥’ 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인지 비슷한 단어인 ‘마법사’와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
시뉴라 작가가 연재 한 <마녀 어머니와 좀비 아들>속의 마녀는 ‘마녀사냥’이라는 단어속의 ‘마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성격파탄자 마녀가 겉보기엔 멀끔하게 생긴 좀비를 만들어 시종으로 부리면서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 이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을 읽을수록, 이 작품은 보다 깊이 마녀라는 존재와 그가 마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깊게 다루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마녀는 왜 마녀가 되었을까? 또, 그 아들을 왜 만들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이 작품을 보는 중요한 이유들로 작동한다.
<마녀 어머니와 좀비 아들>의 등장인물은 크게 다섯 명이지만, 현재에 존재하는 건 마녀 히료와 기억이 지워진 채로 좀비가 된 아들 비제 이렇게 두 명뿐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절반 가까이를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용한다.
비제는 점점 약해지며 부서져 가는 몸으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고작해야 꿰맨 다음 방부제를 녹인 물에 몸을 푹 담그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비제는 자신의 존재에서 행복과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머니인 히료는 아들을 해치려는 사람을 단숨에 살해해 버리는 악랄한 마녀일지라도.
이 작품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굉장히 긴 부분을 주인공 히료가 왜 지금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마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잔혹한 마녀가 있기까지의 맥락을 설명해줌으로써, ‘마녀’ 자체보다 그녀를 마녀로 만든 맥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작품 속 과거에서 히료는 모두를 돕고 싶어 했던, 신비한 힘을 가진 순진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어쩌다 힘을 가지게 됐는지, 또 왜 하필이면 이 산골짜기 마을에 왔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히료의 존재가 신의 역사함인지, 아니면 악의 현신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셈이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두 가지 존재가 중첩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선과 악은, 마치 다면체처럼 겪고 나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어머니 신이라는 존재가 재앙을 예언하고, 그 예언을 들으러 찾아온 마을의 사제에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살해당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살인자는 마을에 나타난 기묘한 아이라고 말을 하게 된다. 사제는 이 예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기묘한 아이를 잡아 가두고 죽이지만, 기묘한 아이 - 즉 마녀 - 는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살아났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30일 동안 아이를 돌아가면서 매일 갈갈이 찢어 죽인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정말로 마녀였을까? 빵을 만들어내는 마법, 절단 마법, 환상 마법과 순간이동 마법만 쓸 줄 알았던 히료는 재앙이 닥칠 마을에 빵을 만들어 모두를 행복하게 할 방법을 고민한다. 절단 마법으로 우물을 새로 파고, 빵으로 곤궁한 시기를 버틸 수 있겠다는 고민이었다. 말하자면, ‘예언’이라는 관측이 일어나기 전까지 모두를 구원할 무궁한 가능성으로 가득 찼던 히료는 예언이라는 관측이 일어난 후 그를 변화시킬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세상에 굴복하게 된다.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이 쓰이는 용법 이상으로 다면적이다. 무고한 피해자는 생각보다 적고, 악랄한 가해자도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때문에 오히려 명확한 상황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치 마녀를 기둥에 묶어 두 번의 보름동안 살해했던 사람들처럼 극악한 가해자 - 가해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 를 만들고, 그가 극악하다는, 또는 극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려고 한다. 때문에 누군가가 절실한 목소리로 소리치는걸 보고 흔히 우리는 “곱게 말하지 않는다.”고 쉽게 비판한다. 우리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언어의 단절은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말이 통하는’ 존재들의 단결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곱게 말하지 않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곱게 말해온 시간들은 너무나 쉽게 지워지고, 그가 거칠게 항의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그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굶주리는 친구들에게 빵을 만들어 보이며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거야”라고 말하던 히료가 ‘마을을 멸절시키리라’는 예언대로 모두를 살해하게 되기까지, 두번의 보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사람들은 그를 공포의 대상으로, ‘마을을 전멸시킨 마녀’라고 부르고 있다.
이쯤 되면 예언은 타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예언이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일 신비한 아이’라는 예언이 없었다면 히료는 사람들에게 빵을 만들어주며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모두 배제하고 히료가 사람을 죽이도록 종용한 것은 결국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사제의 예언이었다. 이 또한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작품에서 사제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희한하게도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사제의 말을 들은 다음에는 영혼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신의 권위는 그를 마비시켰고, 마침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권위는 가능성을 지운다. 그의 말이 곧 정답이고, 정답이 아닌 이들을 정답으로 인도할 말씀이므로 가능성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치 히료처럼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다가 결국 포기하게 되기까지 긴 시간을 버티고 견뎌낸다. 누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그동안 있었던 과거는 지워지고 현재의 상태가 모든 것을 덮는다.
이 지점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보통’의 세상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과격하다며 손가락질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과연 이전까지 그들이 계속해서 말해왔던 부조리와 부당함은 과연 제대로 받아들여졌는가 하는 의문이 들렸다. 물론 그들이 두 번의 보름동안 그들을 살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저들은 나쁘다’는 말만큼이나 보편적인 언어로 말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마치 히료처럼 결과를 놓고 무작정 가해자라고 낙인찍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언이 갖는 권위는 예언이 실행되어야만 갖춰질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작품 속에서는 30일 동안 히료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예언이 이루어져 ‘신의 말씀’이 권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면, 현실에서는 아직까지 그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예언의 권위에 자신을 내려놓을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자기위안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예언은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언을 경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짐 또한 남는다.
<마녀 어머니와 좀비 아들>의 시뉴라 작가는 후기에서 ‘다 같이 불쌍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가 몇 년 전 읽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은수연, 도서출판 이매진, 2012)를 읽고 책을 읽고 엔딩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최초로 출간된 성폭력 생존자의 수기다. 책을 통해 저자는 미디어에서는 성폭력 생존자가 ‘인생이 끝난 사람’이나, ‘고통에 미쳐버린 사람’처럼 묘사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며,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사랑을 하면서 평범하게 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저자의 선언을 통해 시뉴라 작가는 히료의 이야기 역시 불행으로만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인간의 삶과 인간이 모여 만들어내는 사회는 다면적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 피해자도 인간이며, 인간다운 삶을 당연히 누릴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작가는 꼬집고 있다. 히료는 행복하게 살고자 했으나 끝없는 좌절 때문에 문을 닫아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불행을 마주보게 되면서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작품 속 시간으로 16년간 상처를 마주보고, 마침내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치유의 과정은 이름처럼 평온한 과정은 아니다. 감정을 마주하고, 쏟아지는 분노와 슬픔이 잠잠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히료는 잘못을 저질렀고, 잘못 때문에 무저갱과 같은 절망에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이 모든 과정 역시 치유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런 작품들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종의 대리체험을 통해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는 세계에서 조금 더 쉽게 치유의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살아있는 것, 변화하는 것, 그리고 부패하는 것. 살아있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히료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변화하는 것은 히료의 과거와 현재, 부패하는 것은 히료의 아들과 모든 죽어버린 것들이다. 부패하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세계에 영향을 주고, 죽음의 세계로 되돌아가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16년 전 히료의 시간과는 달리, 여기엔 권위와 예언,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악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히료와 히료가 만들어낸 것들이 오롯이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시간인 셈이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히료는 영혼을 붙잡아 물건들에 가두었다. 죽은 것들이 완전히 죽지 못하게 만들고, 흘러가 과거가 되어야 할 것들을 현재에 붙잡아 두었다. 살아있는 히료는 변화해야 하지만, 변화를 거부했다. 두 번의 보름동안 히료를 살해한 서른 명이 죄책감을 나누어 가지는 동안, 히료는 30명의 목숨만큼의 죄책감을 홀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간에 자신을 가둠으로써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을 그 시간에 가두는 히료만의 속죄 방식이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피해자는 죄책감을 더 깊게 지고, 가해자들은 쉽게 말을 뱉는다.
현상은 선형으로 지나는 시간 안의 현상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맥락속의 점으로서 존재한다. 맥락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맥락 속에 살기 때문이다. 현상만 본다면 당연히 서른 명을 살해한 마녀 히료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그러나 히료를 벌하게 되면 히료가 당한 서른 번의 죽음은 해결할 수 없다. 히료의 속죄는, 그 시간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복수를 통해 저지른 죄악의 순간에서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자신은 미래를 맞이할 자격이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나 히료의 과거를 알게 된 후에 그의 아들 비제는 과거의 자신의 영혼이 겪었던 일을 보고도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순간, 영원히 어머니의 곁을 떠날지도 모르는 순간 어머니의 행복과 변화를 빈다.
마녀 히료는 과연 멈춰버린 시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녀 어머니와 좀비 아들>은 비극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긴 시간동안 혼자라고 느꼈던 마녀 히료는 과연 혼자였을까? 작가는 비극적인 작품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우리는, 반짝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