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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투니스타의 Deep Impact - 3rd Impact>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이잖아요

국제보건기구(WHO)에서는 2020년 인류가 가장 흔하게 앓게 될 질병으로 우울증을 꼽았다. 2017년 WHO의 보고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전 세계 약 3억 2천 2백만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는 인류 100명중 4명꼴인 동시에 10년 전에 비해 약 18%가 증가했다. 인류가 우울증 때문에 지출하는 비용은 약 1천조원에 육박한다.

2018-08-09 웹투니스타

국제보건기구(WHO)에서는 2020년 인류가 가장 흔하게 앓게 될 질병으로 우울증을 꼽았다. 2017년 WHO의 보고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전 세계 약 3억 2천 2백만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는 인류 100명중 4명꼴인 동시에 10년 전에 비해 약 18%가 증가했다. 인류가 우울증 때문에 지출하는 비용은 약 1천조원에 육박1)한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별명처럼 우리에겐 흔한 질병이 됐다. 특별한 누군가가 앓는 질병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와 관심이 필요한 ‘생활질병’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웹툰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작품들은 대부분 병을 꿰뚫어보고 치료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타자화 된 시선으로 비춰지는 ‘환자’들은 치료의 대상이자 ‘특수한 상황’에 놓인 인물로 다루어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 마대 작가와 매봉 작가가 저스툰에서 연재중인 <식탁 아래 Blue>는 우울증을 겪는 당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신선하다. 제목인 <식탁 아래 Blue>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주요 소재는 요리와 우울증이다. ‘Blue’라는 파란색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울함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주인공 은예는 원룸에 살면서 직접 요리를 하고, 친구 맑음이와 함께 캔 맥주에 함께 매주 주말 밥을 함께 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다. 밥을 먹는 식탁은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요리만화라기엔 레시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거나, 매 회마다 새로운 요리를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화려한 요리를 한다기보다 매 끼니를 겨우 때우다가 일주일에 한번 특식을 먹는 자취생의 식단에 가깝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작품은 음식이 오르는 식탁 아래에 숨겨진 우울감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은예는 지금은 카페 ‘선샤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원래 인턴으로 일을 했지만 정규직 계약에 실패하고 한동안 번아웃 증후군으로 인한 무기력함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도시락을 사기 위해 겨우 나온 집 앞에서, 자신의 집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맑음을 만나 일에 지쳐 퇴근을 하던 대학 동기 맑음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은예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어딘가 상태가 심각해 보였지만, 맑음 또한 일에 지쳐서 은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우 말을 걸게 된 순간이 이들이 주말마다 함께 밥을 먹게 된 계기였다.

여유가 없었던 맑음과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은예는 서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맑음은 은예에게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는 제안을 한다. 대학 동기들끼리 만나 술도 한잔 하고, 맛있는 밥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흔한 제안이 이 작품에서 은예에게는 큰 사건이 된다. 미리 나가지 못할 핑계거리를 준비하고 있던 은예에게 맑음은 “집에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 알바는 미리 안 된다고 얘기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은예가 친구들을 피할 구멍을 미리 막아버린 것이다.


내 주변의 인물은 그럴 리 없다는 잘못된 확신

맑음이 나쁜 사람이라서 은예를 골려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맑음이는 자신의 주변 인물, 그것도 매주 자신과 함께 밥을 먹는 친한 친구인 은예가 우울증을 앓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원래 조금 소심해서, 사람들과 만나는 걸 힘들어해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어색할까봐 걱정하는 성격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서운해 하고 있었다. 또는 단순히 맑음에게 은예의 상태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거나, 그런 사람은 알아볼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도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타인을 겉으로 파악한 모습으로만 판단하는가 하면 ‘일반적’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가진다. 우울증 환자가 내 주변에 없으리라는 판단은 주변에 실재하는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은예는 친구들이 우울증 자가진단이라며 인터넷에서 본 글을 읽으면서 ‘너무 극단적이다’, ‘너무 우울하다’는 평가에 자신에게 해당하는 문항들이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웃으면서 넘기고 만다.

심지어 그 때문에 은예도 자신이 우울증인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은예 자신조차 자신이 우울증인지 몰랐다는 지점은 우리 모두가 우울증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울증의 최대 장벽, 인정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은예의 우울증이 생기게 된 뿌리 깊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파고든다는데 있다. 우울증은 어느 날 찾아오는 갑작스런 사고가 아니다. 은예의 삶 속에 오래도록 숨어있었던 우울감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우울증을 만들어냈고, 은예가 그것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주변 사람들도 느끼게 되었다는 걸 공들여서 보여준다.


우울증을 인정하는 건 힘든 과정이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자주 무기력해지고 우울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는 사실,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통해 이 고통을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걸 인정하는 건 자신의 존재가 아주 약하고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드러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걸 죄악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때문에, 우울증의 최대 장벽 중에 하나는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울증은 곧 인류가 가장 흔하게 앓게 될 질병이다. 이런 통계가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 주위에 우울증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건 우리의 정신이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신호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한다. 우울증의 최대 장벽은 그걸 앓고 있는 본인이 우울증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식탁 아래 Blue>는 은예가 자신의 우울감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인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절망의 나락에서 만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은예가 자신의 우울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맑음이 또 다른 친구 미라에게 은예의 상황을 털어놓은 다음이었다. 친구들과 만나기 싫어하는 은예와 말다툼을 벌인 맑음은 미라에게 연락해 은예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미라는 아마 은예가 우울증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맑음이 떠난 하루 동안, 은예는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댄다.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예는 다른 집중할 일을 찾는다. 은예에게 그 일이란 요리였다. 일단 장을 보고, 양파를 채칼에 손질하며 잡념을 떨치려고 하던 은예는 순간 채칼에 손을 벤다. 그리고 양파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은예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한 내가 마지막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파괴하는 일이라는 묘한 해방감. 은예는 밤을 새워 인터넷 포털에 ‘자살’을 검색한다.

그 밤 동안, 미라는 맑음에게 “그래선 안됐다”고 말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묻는 맑음에게, 미라는 자신도 우울증을 앓았었다고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미라는 예쁜 외모 탓에 대학 시절부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미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혼자서 연애의 만리장성을 쌓고, 미라가 거절하자 자신을 버렸다며 험담하는 남자들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겨우 들어간 인턴 자리에서도, 미라는 똑 같은 일을 겪는다. 때문에 일을 그만둔 미라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1년간 일을 쉬며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맑음과 미라는 은예를 찾아간다. 집을 비운 은예가 다녀온 곳은 다행히도 상담소였다. 은예를 만난 미라가 처음으로 건넨 인사는, “힘들었다며” 이었다. 따뜻한 포옹과 함께 건네는 인사에 두 사람은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미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은예에게 건넨다. 말하자면 미라는 끝없이 추락하던 은예에게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존재였다.

당연히, 너의 잘못이 아니야.

우울감이 과연 개인의 책임일까? 우리는 흔히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한다. 모든 문제를 아주 잘게 쪼개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면 사회에는 별 문제가 없는데 개인에게 문제가 있어서 이런 ‘문제’ 들이 생겨났다며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난의 대상이 명확해지고, 때문에 그 사람이 입을 다물고 드러나지 않도록 만들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은예는 정규직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죄책감에 더불어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자책을 한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었고, 그 다음 계속된 취업난에 일을 구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또 다시 실망한다. 그러다 보니 온 세상이 자신을 욕한다고 느끼게 되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묻는다.

그건 미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외모를 보고 접근한 남자들이 혼자서 쌓아올린 서사에서 미라는 빠져있었음에도, 미라는 그들의 순정을 거절한 매몰찬 여자가 된다. 사람과 사람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서, 업무와 사적 감정을 구분할 줄 모르는 미성숙한 남성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일을 그만두고, 1년간 치료를 하는 등 미라에게 온전히 넘겨졌다. 자신의 커리어를 망가뜨리면서까지 우울증에 걸린 것이 본인의 책임이라면 어딘가 이상하다.


이 웹툰은 “너의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아주 세련되게 풀어내고 있다. 쉽게 뱉는 위로의 말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은예와 미라의 삶이 겹쳐지는 부분을 보여주고 그들이 공감하는 시간을 통해 본인의 탓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삶으로 증거해내는 여성의 이야기

이 웹툰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은예, 미라, 맑음, 카페 ‘선샤인’의 사장까지. 이 여성들은 의기투합해 도원결의를 맺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거나, 꼬치꼬치 캐묻고 거기에 답하는 취조의 방식을 빌려서 이해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여성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함께 증거하는 여성의 삶을 공유하고, 그를 통해 보여주는 연대가 있을 뿐이다.

은예, 미라와 맑음 세 사람은 모두 죽을힘을 다해서 힘껏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유지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다. 세 사람이 가진 공통점은 20대 중반의 여성이라는 점이다. 동년배 여성들이 죽을힘을 다해 지켜내고 있는 자신의 삶은, 그 자체로 연대의 이유가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은예와 미라는 정규직 채용에서 밀려났다. 은예는 언니와 자신을 비교하며 언니를 깎아내리는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언니 본인도 은예와 멀어졌고, 은예 또한 언니에게 먼저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도망치듯 입학한 대학과 겨우 찾은 서울의 일자리에서도 성추행과 성희롱은 일상이었다. 미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맑음은 자신이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거래처 사람이 자신을 ‘사무보조’라고 부르는데도 거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사 때문에 정식 직함이 있음에도 ‘사무보조’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미라는 집에서 유일하게 정직원으로 일을 하는 자신에게 금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렇게 ‘사소한’ 차별은 이들의 자존감을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낮아진 자존감은 자신을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만든다.

폭풍이 치는 길을 홀로 걷지 않도록

“폭풍이 치는 길을 걷더라도 고개를 들고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영국의 축구팀 리버풀의 응원가는 “You Will Never Walk Alone”의 가사 중 일부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연대는, 가장 어두운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우리가 서로의 용기와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별명이 있지만, 감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에 걸린다거나 ‘나약한’ 사람들이 걸린다는 선입견 때문에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잘 드러내지 못하는 병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우울증에 가져야 할 자세를 세심하게 배려해서 전달하고 있다. 개인의 문제로, 개인의 유약함으로 문제를 치환하기보다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텅 빈 위로보단 함께 먹을 밥을 차려보는 것. 내일을 살아갈 즐거움과 에너지를 얻는 것이 식탁 위의 일이라면, 이 작품은 식탁 아래에 숨겨진 우울함을 이겨나갈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차별과 혐오가 콘크리트처럼 덮인 세상에서 민들레처럼 꽃을 피우고야 마는 사람들이 가진 힘. 서로의 용기가 되고, 서로가 살아갈 내일에 대한 기대가 되어주는 것. 이 작품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간 오늘과, 다가올 내일은 인류가 처음으로 맞는 시간이다. 이번 생은 모두 처음 살아보는 삶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내일이보이지않는컴컴한터널과같은절망속에갇힌누군가에게절망에서헤쳐나올용기가되는작품, <식탁 아래 Blue>가 소중한 이유다.

1) 한국일보, “전 세계 3억 2,200만명이 우울증”, 2017. 7. 24. (http://hankookilbo.com/v/8d261cb847a34c0fb34622e577ce08c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