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는 꽤나 매력적인 소재다. 먼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서사의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에 창작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채워 넣을 공간이 많다. 돌배 작가의 <계룡선녀전>은 우리에게 익숙한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각색해 현대의 감각으로 되살려낸 작품이고, 이전에는 아예 동화처럼 익숙한 이야기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무적핑크 작가의 <실질객관동화>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낯설게 보기’가 아니라, 한 이야기의 테마를 살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대부분의 한국 전래동화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 맥락 밖에서 생각해 새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기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이후, 이런 재해석에 새로운 관점이 대중화됐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고전을 재해석하는 방식을 독자들이 흥미로워할 뿐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게르 브란텐베르그가 1977년에 발표한 <이갈리아의 딸들>(남성과 여성의 역할, 사회적 지위 등 모두가 전도된 사회를 그린 작품)과 같은 시도부터, 지금부터 소개할 <그녀의 심청>처럼 이야기에 빈 곳을 당사자의 관점에서 채워 넣는 시도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Seri, 비완 작가가 저스툰에서 연재중인 <그녀의 심청>은 우리에게 익숙한 심청전을 당대를 살았던 여성이자 청년인 심청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현대인에게도 의미 있는 작품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심청전은 조선 후기 한글로 쓰인 작자 미상, 연대 미상의 한글 소설이다. 다양한 판본으로 아직까지 전해지는 심청전의 줄거리는 심봉사가 젖동냥하며 키운 딸이 바르고 고운 아이로 자라 공양미 300석에 팔려가게 되자 공양미를 대신 내주겠다는 장승상부인의 말을 거절한 뒤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인당수 아래에서 용왕을 만나 다시 돌아와 황후가 되어 아버지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심청전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청이는 왜 공양미를 대신 내주겠다는 장승상부인의 말을 거절했을까? 거기에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품은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당연히 모두가 심청이라고 생각했을 주막에서 일하는 아이는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었고, 청이는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다. 엉킬 대로 엉켜 엉망진창인 산발머리, 구걸을 하러 다니느라 굽은 등과 거친 손가락.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엉망인 차림새. 제대로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한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변변한 집도 없어 강가에 움막을 만들어 살고 있는 청이의 모습이다. 청이가 어릴 때는 사정을 딱하게 여겨 도와주던 사람들도 시간이 가고, 청이가 자랄수록 점점 차가워져 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서 끼니를 겨우 때우는 청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녀의 심청>은 이런 당연한 일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출발한다. 도대체 어떻게 끼니조차 때우지 못해 구걸을 해야 했던 청이가 열여섯이 되면 알아서 몸가짐이 바르고 예의범절을 아는 효녀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녀의 심청>은 이런 궁금증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통한 해답을 내놓는다. 당연히 청이는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사느라 거친 아이가 되었고, 예의범절, 바른 몸가짐처럼 ‘살아남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담벼락 안쪽의 법도는 전혀 모르는 아이가 되었다. 대신 들키지 않고 소매치기를 하는 방법, 온 힘을 다해 싸워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선 아무런 해답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배운 청이는 누구도 믿지 않고, 마음속은 진흙탕처럼 질척거려 숨쉬기가 어렵게 만드는 삶을 살아온 아이였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공양을 드리는 절 몽은사에서는 멀끔하게 깨끗한 승복을 입은 화주승이 ‘여자라 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열심히 공양을 드리고 업을 쌓으면 남자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세상에서, 자꾸만 마음속에 차오르는 흙탕물이 견디기 어려웠던 청이는 집에서 ‘자신이 눈을 뜨면 과거에 급제해 다시 잘 살 수 있다’는 세상모르는 헛소리만 하는 아버지 때문에 또다시 흙탕물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바닥에 떨어져 더러워진 밥을 씻던 청이는 달을 바라보고 다른 무엇도 아닌 부디 ‘이 삶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아버지가 눈을 뜨는 것도,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아닌 그저 이 삶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론 내지 못하고 되뇌던 순간, 누군가가 같은 소원을 비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마치 연꽃이 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물속에서 기절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재취 감으로 장승상이 들였다는 어린 신부, 그러니까 심청전 속 장승상 부인이었다. 그리고 그를 구해준 덕에 초대받은 청이는 간만에 배 터지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부의 모습은 마치 꽃 같았다. 마을에 혼기가 찬 여성들이 모두 가서 머리에 꽃을 꽂아주는 동안에도, 그의 모습은 마치 꽃 같았다. 그리고 혼례가 있던 그날 밤 장승상이 갑자기 쓰러진다. 그 다음부터 인당수에 안개가 끼고, 배는 길을 잃고 길을 가지 못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불공을 드리러 온 장승상 부인에게 화주승은 ‘재물을 탐해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청이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전과는 다르다. 원래의 심청전이 집안을 말아먹은 능력 없는 아버지라도 할 수 있는 한 극진히 모시며, 황후가 되어서도 아버지를 잊지 않는 청이의 효심을 칭송하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인간 심청의 모습을 다룬다. 동시에 장승상부인과 뺑덕어멈 등 조연들을 재조명한다. <그녀의 심청>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 바로 캐릭터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많은 서사물들은 남성 캐릭터에게 ‘이해받아야 할 구실’을 많이 만들어줬다. 덕분에 남성 캐릭터는 입체적이고 구체적인 개연성이 부여된 캐릭터들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여성 캐릭터들은 배경 속에 묻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변화는 도드라지는 반면, 남성 캐릭터들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돋보이지 않는다. 뺑덕어멈은 중년에서 청이 또래로 각색된 승상부인과 더불어 <그녀의 심청>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캐릭터 중 하나다. 원작에서 악인으로 묘사되는 뺑덕어멈은 작품 속에서 ‘덕’이라는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 아이를 홀로 키우던 뺑덕어멈은 덕이를 데리고 다니면 ‘아비도 모르는 자식을 데리고 다닌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이를 집에 홀로 두고 일을 했고,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 아이가 온몸에 화상을 입자 ‘아이를 팽 하고 밖으로 나돌아 다닌’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원전에서 뺑덕어멈은 심봉사의 재물을 탐해 끝내는 모든 재물을 들고 다른 남자와 도망친 악인으로 묘사됐다.
<그녀의 심청>은 정반대로 캐릭터를 구축한다. 여성 캐릭터들에겐 반드시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지만, 남성 캐릭터들은 ‘원래 그런’ 캐릭터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이런 전형을 보여주는 등장인물이 승상부인의 오빠와 심봉사다. 과거의 모습이 나올 때에도 현재와 다르지 않은 행동을 보여주는 오빠와 심봉사는 일관성을 가진 캐릭터로 변화의 가능성이 소거된 캐릭터로 등장한다. 독자들은 이런 모습에 일종의 충격을 받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두텁게 작품을 보는 필터로 작용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갈등을 쌓고 해소하는 데에도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승상부인과 가깝게 지내게 된 청이가 겪는 갈등 또한 여성-여성의 갈등구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갈등의 원인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장승상부인과 며느리의 갈등이 일단락된 25화에서는 마지막 컷에서 ‘우리는 진짜 적에게 이긴 것일까?’라고 묻고, 26화에서는 ‘여자가 제일 무섭다’는 말에 청이가 ‘마님이 누굴 때리거나 죽이기라도 했어요? 따지고 보면 그날 칼부림을 한 아드님이 제일 무섭죠...’라고 대답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을 만드는 방법론일 뿐, 작품 속 인물들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작품 속에서 청이와 승상부인은 장승상댁에서 특별히 만들어 두었다는 여성들을 위한 사당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모셔진 위패들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한 줄도 없다는 걸 확인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개인이 아니라, 현숙한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 정절을 지킨 여인이었다는 따위의 말만이 그들을 기리는 전부였다는 것을 확인한 청이와 승상부인은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면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메인 테마는 ‘이름’이다. 지워진 이름들이 머무르는 사당이 청이와 승상부인이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여성들이 소비되는 방식은 끔찍하다. 작품 서두의 혼례 장면에서 나오는 ‘꽃’에 여성을 비유하는 장면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화주승은 청이를 두고 ‘꽃 중에 제일인 연꽃 같다’고 청이를 평하는데, 청이는 ‘그깟 발깔개’라며 분개한다. 부처를 그린 그림에서 연꽃은 부처가 밟고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결국 꽃 중에 최고라고 해 봐야 부처가 발깔개로 쓰는 꽃밖에 더 되냐는 청이의 분노는 비완 작가의 유려한 작화를 통해 절절하게 전해진다. 승상부인이 청이에게 ‘모두에게 사랑받도록 해 주겠다’며 몸가짐을 가르치고, 옷가지를 선물해주자 정말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것을 느낀다. 사람들을 청이를 ‘심청’이 아니라 ‘여자’로 대하기 시작한다. 늙은이들이 농담이라며 ‘첩으로 들어오면 어떠냐’고 묻는다거나,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성추행을 한다거나 하는 일을 겪으면서 청이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을 포기한다.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도화동에 사는 건달들의 태도다. 작품 초반에 등장한 건달들은 청이에게 주먹을 휘두르지만, 이때는 청이를 성희롱한다. 폭력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 폭력이라는 본질은 그대로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심청’이라는 이름이 있었을 때의 폭력과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었을 때의 반응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처럼 <그녀의 심청>은 서사 전체를 활용해 이 ‘잊혀져버린 이름’들을 이야기한다. 원전인 심청전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는다. 장승상 부인, 뺑덕어멈과 같은 이름은 그들의 이름이 아니다.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어머니라는 것이 이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청>은 집요하게 이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조명하면서,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 두 사람을 통해 ‘여성의 연대’를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2015년 페미니즘의 바람 이후 떠오른 슬로건 중 하나는 “우리는 서로의 용기”라는 말이다. 여성이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고, 서로를 위해 연대를 선언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겠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시대의 흐름을 여성의 이름을 지워버린 전래동화 심청전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름은 서사의 매개일 뿐 아니라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는 요소로도 사용되는데, 바로 승상부인의 이름이 그렇다. 용왕의 화를 풀도록 성대하게 연 축제에서 승상부인은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그리고 가면이 벗겨져 정체를 들키고 나서, 이름을 들려 달라는 청이에게 “내 이름은...!”이라고 말한 다음 말을 끝맺지 못한다. 이들이 과연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지를 지켜보는 것도 작품을 감상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여성간의 로맨스를 그린 장르를 넓게 GL(Girl’s Love), 또는 ‘백합’이라고 부른다. 세부적인 장르의 구분보다, 이 작품이 로맨스로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은 작품을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이 작품은 Seri 작가가 심청전 원전을 읽다가 승상부인이 공양미 300석을 대신 내준다는 이야기를 거절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뒤 청이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어 노래 부르고, 청이의 초상화를 걸어 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는 구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내가 너를 여자로 만들어 줄게”, “내가 너를 살찌우면 그만큼은 내 지분이 되는 건가?” 같은 대사, 31화의 자수를 가르쳐 주는 장면 등에서는 둘 사이에 묘한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로맨스를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두 사람간의 연대’보다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잠시 이야기했던 며느리와의 일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이와 승상부인이 한층 가까워지도록 하는 역할을 했지만, 그 승리가 둘의 로맨스를 완성시키지는 않는다. 마치 ‘썸 타는’ 관계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둘의 관계는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공양을 드리러 갔다가 가마가 부숴져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는 절 앞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청이의 모습이라던지, 그런 승상부인을 집까지 업고 가는 청이의 모습은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녀의 심청>은 고전 소설이나 전래동화를 각색하는 다양한 시도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다. 전통적 요소를 완전히 뒤집어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장면들은 눈에 익은 형태를 하고 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굉장히 신선하다. 이런 신선함을 가진 이야기를 비완 작가의 뛰어난 작화와 색 활용, 그리고 매끄러운 만화적 연출로 훌륭한 만화로 만들어냈다. 때문에 2018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되었다. 더군다나 모두에게 익숙한 ‘심청전’을 활용함으로써 주인공들의 특수한 경우가 아닌, 좀 더 폭넓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삼은 것이 이야기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지워져 버린 여성들의 이름을 되찾고자 하는 현대의 흐름을 짚어냈다.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심청전 안에서 설득력을 갖추는 모습이 인상깊다. 이 작품 자체가 2015년 이후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소위 ‘페미니즘 플로우’의 연장선에 있다. 작가는 그동안 남성 캐릭터에 수없이 핑계를 만들어주던 관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성 캐릭터를 같은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녀의 심청>이 보여주는 통쾌한 한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