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도 이제 막바지로 향해 가고 있다. 날이 추워져 코끝이 시려지는 계절이 왔다. 연말은 가장 많은 ‘나’를 만날 수 있는 때다. 삶을 지나오며 만났던 사람들과 송년회를 참석하다 보면 그때그때 다른 나를 꺼내는 나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친구, 직장 동료들을 만날 때의 내가 다르고, 또 가족과 있을 때의 내가 다르다. 이쯤 되면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 가사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건 흔히 말하는 ‘가면’과는 다르다. 그들과 어울리는 내가 다른 사람인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된다. ‘나’는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라는 말이다.
소설가 이영도의 대표작 <드래곤 라자>의 방랑 왕자 길시언 바이서스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떠돌이로서의 나, 동생에게 왕좌를 넘겨주기로 마음먹은 자신, 마법검의 주인인 나 모두가 자신이라는 의미다. 그 모든 것을 ‘나’로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즉 자기객관화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제3자의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어야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제대로 평가할수 없다. 내가 만점짜리 ‘나’는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시작이다.
난다 작가가 다음에서 연재중인 <어쿠스틱 라이프>는 이런 모습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는 웹툰이다. 2010년부터 8년째, 12시즌동안 연재를 마친 이 작품의 장르는 ‘생활툰’이다. 긴 시간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생활툰인 이 작품은 2018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동안 후보에 수없이 올랐던 작품이지만 선정되지는 못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생활툰은 작가 본인이 겪은 일상을 공유하는 장르다. 웹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주목받았던 것은 자기고백적 서사를 통해 동시대 독자들에게 공감을 받은 생활툰이었다. <낢이 사는 이야기>, <나이스진타임>등의 작품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인기를 얻은 대표적 생활툰이다. 뿐만 아니라 웹툰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마음의소리> 역시 생활툰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생활툰의 역사는 웹툰의 역사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생활툰은 웹툰 플랫폼들이 폭넓은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정 장르의 예비 소비자들에게 모두 공감을 얻을만한 작품이 생활툰이라는 이야기다. 때문에 생활툰은 2010년대까지 소셜미디어(SNS)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전에 마치 소셜미디어 페이지처럼 소비되기도 했다. 본격적 서사물의 등용문이 공모전, 베스트도전, 웹툰리그 등이라면, 여전히 생활툰의 등용문 중 하나가 소셜미디어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플랫폼이 일정 궤도에 이르고 나면 생활툰 역시 하나의 장르로서 소비된다.
2010년대 초반이 되어 웹툰이 ‘시장’을 형성하자 생활툰도 변혁을 겪는다. <마음의 소리>나 <골방환상곡>같은 작품은 개그를 전면에 내세워 장르를 개그로 탈바꿈했고, 이 무렵 등장한 <선천적 얼간이들>은 그런 흐름의 완성형을 보여줬다. 개중에는 아예 생활의 일정한 테마를 잡고 그 주제만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문 생활툰의 영역을 개척했다. <결혼해도 똑같네>, <유부녀의 탄생>등은 만화가들의 결혼 이야기를 다루었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500만원으로 결혼하기>는 결혼식이라는 테마를 한정된 예산으로 해낸 경험을 그린 에세이-생활툰이다. 2010년대 중후반에는 <극한견주>, <아기낳는 만화>처럼 생활과 밀접하지만 다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을 집중 조명하는 작품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어쿠스틱 라이프>처럼 생활 전반을 이야기하면서 오래도록 연재중인 작품은 드물다. 작가 본인의 생활이 소재라는 점은 양날의 검으로 작동한다.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다수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소재인 동시에, 작가 본인이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쿠스틱 라이프>는 이 지점을 영리하게 커버한다. 작품 속에서 ‘현재’로 등장하는 것은 사실 작가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2년 전에 겪은 일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시점을 특정 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생활’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재의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가 자신의 사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공개하는 동시에, 삶에서 생기는 갈등을 감추지 않고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어쿠스틱 라이프>가 롱런 할 수 있는 비결 중에 하나로 보인다. 작품 속에서 난다 작가는 끊임없이 갈등하지만 자신이 내린 해답을 작품 속에서 항상 드러내기도 한다. 이전의 생활툰이 ‘함께 고민하는’것에서 공감을 일으켰다면, 난다 작가는 자신의 고민과 답이 정답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한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를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이 답은 나의 결정’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셈이다.
난다 작가가 작품에서 자주 하는 “애니웨이”라는 말은 작품뿐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와도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뜻의 ‘애니웨이’라기 보단 모두가 공존할 수 있다는 의미의 ‘애니웨이’에 가깝다. 언뜻 차갑게 들리는 ‘너는 너, 나는 나’라는 태도는 서로가 독립된 주체로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더 넓게는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작품 속에서 남편 한군과 난다 작가가 보여주는 모습은 ‘부부’라는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공간을 가지고 있는 본인들을 인정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남편’인 한군과 ‘게임 덕후’인 한군, 그리고 ‘쌀이 아빠’ 한군 모두를 인정하고, ‘아내’인 난다와 ‘만화가’ 난다, 그리고 ‘쌀이 엄마’로서의 자신 모두가 공존하는 셈이다.
흔히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뒤섞어 버리곤 한다. 그리고 많은 갈등이 이처럼 정체성을 하나로 섞어버리는 데서 온다. 커리어를 쌓는 직업인임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그것만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식으로 섞여버린 정체성은 흔히 드라마에서 ‘방황하는 중년’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어쿠스틱 라이프>에서는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애니웨이”의 힘이랄까.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몇배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산다. 언어는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우리를 제한하는 구속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감정과 심상을 언어로 잘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난다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탁월한 작가다. 본인이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있는 순간의 감정들을 잡아내 언어로 벼려내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언어의 세계 너머로 가서 닿기란 더 힘들다.
난다 작가는 그림과 글 모두에서 이를 훌륭하게 해낸다. 심지어 시즌이 갈수록 더 유려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 12, 260화에서 작업실에 들어가면서 ‘엄마도 아내도 아닌 곳, 물건과 소리가 적은 그 방’이라는 표현을 지나 ‘앞으로 그 누구도 이 방을 망가뜨릴 수 없다’는 말까지 읽은 독자들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이렇게 유려하게 전달하기까지 작가의 고민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당연하게도 이 작품은 ‘만화’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난다 작가의 그림은 전체적인 정서를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딸 쌀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올 때는 작가의 애정이 그림만 봐도 느껴진다. 작가의 시선이 그대로 작품에 묻어나는 것은 생활툰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다른 가상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에 실재하는 작가가 화자이기 때문이다. 난다 작가가 본인의 시선을 투영하고, 또 본인의 주관을 잘 벼려진 언어로 이야기하는 덕분에 독자들은 단순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자신을 대입하는 게 아니라 ‘난다’라는 현실의 화자를 관찰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생활툰이 많은 카툰화로 독자가 작가와 캐릭터를 잘 분리하지 못해 작가들이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과다.
작품을 유심히 보다보면 <어쿠스틱 라이프>의 각 회차별로 등장하는 난다 작가의 역할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화자라는 기본 전제는 거의 동일하지만, 한군의 아내이자 연인인 자신이나 만화가, 자연상태의 여성이자 인간인 자신 모두를 조금씩 드러낸다. 앞서 이야기한 작업실 에피소드는 만화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냈고, 251화, 252화 ‘평화를 원하거든’에서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폭력의 본질을 깨닫게 된 난다 작가가 자신을 폭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그린다. 뿐만 아니라 243화 ‘싸워야 할 때’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그러니까 여성으로서의 자신이 어떻게 교육받고 자랐는지를 되짚어본다.
이런 작가의 자각은 시즌 10부터 시작해 11, 12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구체화된다.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런 변화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이기도 하다. 작품의 초반 시즌을 보면 난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남편이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동경한다던지 하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시즌이 계속되면서 난다 작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스테레오타입에 먼저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해가는 난다 작가와 한군 부부의 모습은 경이롭다. 작가 본인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어쩌면 위험부담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다 작가는 자신의 변화를 뒷받침할 경험과 논리를 갖추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렇게 변화하는 자신까지도 수많은 ‘나’의 정체성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가장 놀랍고 부럽다.
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쌀이의 엄마로서 수많은 처음을 함께 하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자식 걱정에 잠이 들었다가 자꾸만 깨는 한군의 불안을 동료로서 이해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술을 즐겨 마시는 애주가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한군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하고, 쌀이가 커가면서 보여주는 쌀이의 세계를 엿보는 흐뭇함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난다 작가다. 한 사람의 결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다층적인 개인을 관찰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난다 작가는 만화를 통해 우리에게 2010년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쿠스틱 라이프>는 난다 작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도록 만든다. 다른 많은 미덕들이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리거나 치워버린, 또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여성의 삶과 커리어를 주목하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쿠스틱 라이프>는 2018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가 큰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