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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마블은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할 것이다

2008년의 어느 날, 나는 꽤 흥분했다. <아이언맨>을 영화관에서 처음 본 날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영웅 서사에 기대한 바를 거의 완벽히 충족시켰다. 빛나는 두뇌를 가진 과학천재이자 엔지니어인 군수업체 사장이 테러집단에 납치되지만, 스스로 창조한 슈트를 착용해 탈출하고, 과거를 반성한 뒤 결자해지 하고자 재능 발휘하며 벌어지는 모험과 성장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2019-05-28 최서윤



뒤늦은 ‘입덕’
2008년의 어느 날, 나는 꽤 흥분했다. <아이언맨>을 영화관에서 처음 본 날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영웅 서사에 기대한 바를 거의 완벽히 충족시켰다. 빛나는 두뇌를 가진 과학천재이자 엔지니어인 군수업체 사장이 테러집단에 납치되지만, 스스로 창조한 슈트를 착용해 탈출하고, 과거를 반성한 뒤 결자해지 하고자 재능 발휘하며 벌어지는 모험과 성장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매력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롭고 능글맞은 태도와, 넘치는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재력과 지능 같은 장점이 스크린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 물론 단점도 뚜렷했다. 그와 같이 이기적이며 즉흥적이고, 시도 때도 없이 빈정대며 농담을 던지는 인물을 가까이 두면 멱살 잡고 싶어질 때가 여러 번일 것 같다. 하지만 멀리서 구경하기에는 재밌는걸. 그가 ‘관종’ 기질을 누르지 못하고 “내가 아이언맨”이라고 외치는 마지막은 백미였다. 아이언맨이 21세기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로 부상한 때이기도 하다.

그 뒤 나를 비롯한 한국의 관객들은 아이언맨이 사고치고, 수습하고, 성장하고, 다시 사고치는 걸 구경하며 11년을 보냈다(<아이언맨3>의 국내 관객수는 무려 900만 명에 달했다). 마블 스튜디오가 만든 세계와 그 세계의 다른 인물들에게도 정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블의 세계관과 캐릭터에 매료된 이들은 영화에 대해 열기 어린 대화를 나눌 때 일종의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의 추측 어린 기대와, 마침내 뚜껑을 연 뒤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뜨겁게 나누는 일은 축제와도 같았다.

그 과정에서 마블 코믹스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러니까, 마블 영화가 내게는 먼저였던 셈이다. 마블 영화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떠드는 시간을 가지며 코믹스의 설정을 시나브로 접했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언맨3>의 빌런 만다린에 흥미를 느꼈는데, 여기서의 묘사는 코믹스와는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만다린은 코믹스에서는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악당이었다고. 영화에서는 경망스러운 성격의 허수아비일 뿐이었는데. ‘악의 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중동의 테러리스트 만다린 뒤에 흑막이 있었고, 그는 토니 스타크와 같은 미국인이었으며, ‘만다린’이라는 상징을 이용해 이익을 챙겨왔다는 사실이 영화의 반전이었다.

시대상을 반영한 마블의 창작 활동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마블 코믹스에서 만다린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9년. <아이언맨3>의 제작년도는 2013년이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국제 사회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국 대량살상무기는 없는 것으로 판명난 뒤의 당혹감과 허탈함이 미국에 감돌던 그 시기다.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아이언맨3>의 만다린이 빚어진 것이다.


올해 개봉한 <캡틴 마블>에 등장하는 스크럴 종족 역시 코믹스와 다르게 묘사된다. 코믹스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으로 묘사됐으나, 영화 <캡틴마블>에서 스크럴 종족은 크리 종족에 의해 삶의 터전이 파괴당한 난민들로 그려진다. 현재 전 지구적 난민 사태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자성적 태도를 가지고 녹여낸 설정은 아니었을까.

당대의 사회적 화두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창작 활동은 일찍이 코믹스에서도 있었다. 예를 들어 <판타스틱4> 시리즈에 등장한 블랙팬서는 고조된 흑인 인권 운동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 뒤 미국에 찾아온 70년대는 베트남전쟁, 마약, 반전 운동으로 얼룩졌고, 마블 코믹스에도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베트남전쟁 퇴역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처우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바탕에 둔 캐릭터, 퍼니셔의 탄생이 일례다. 히어로의 인종 다양성에 대한 의식도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첨단에 있던 관점도 오랜 시간 지난 뒤 다시 보면 낡아 보일 수 있다. 이점에서는 최근 제작되는 마블 영화가 유리할 수밖에. 마블 스튜디오의 총괄 책임자 케빈 파이기는 “코믹스의 내용과 정신에 충실한 것과 코믹스를 각색하고 진화시키고 변화시키는 것 사이의 균형”을 강조한다. 즉 코믹스의 설정을 빌려오되 재해석하며 관점을 좀 더 진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70년대 아시아인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어진 캐릭터 상치 역시 영화에서는 좀 더 아시아인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려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마블의 ‘생명 연장의 꿈’
사회적 화두를 적극 반영하는 것은 콘텐츠의 수명을 연장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짧지 않은 미국의 히어로 코믹스 역사에서 마블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했다. 평행 우주 설정으로 끝없이 늘려가는 세계선, 인종 다양성을 기반에 둔 기존 캐릭터의 재해석 모두 ‘생명 연장의 꿈’의 일환이다.

가장 성공적인 것은 영화화 프로젝트였다. 2010년대에 마블 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는 만화에도 기회가 됐다. 영화를 통해 마블 만화의 세계에 신규 진입한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마블 영화 프랜차이즈의 대성공 이후, 한국에서 마블코믹스가 대량으로 정식 발간됐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특히 <아이언맨>의 경우,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캐릭터였으나 영화 제작 후 그 위상이 달라졌다. 게다가 <엔드게임>에서의 영웅적인 퇴장은 아이언맨의 신화를 완성하기 충분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분했던 아이언맨에 대한 향수는 한동안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고, 향수를 지닌 이들을 코믹스로 끌어당기는 것 역시 마블의 전략 아닐까. 한 가지 캐릭터로 고정되고 싶지 않은 배우의 고민과 노화 문제, 출연료에 대한 부담 등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은 코믹스에는 반영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2008년 이후 만화의 토니 스타크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점점 닮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히어로 장르는 결국 캐릭터 상품 팔아먹는 게 목적이라는 자조가 있을 정도로, ‘입덕’을 유발하고 작품의 세계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 캐릭터의 힘이 크다. 그간 마블은 코믹스에서 인기가 없던 캐릭터를 발굴해내 영화의 세계관에 안착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그 결과 많은 캐릭터 상품을 팔아먹을 수 있었다.

인종 다양성에 기반을 둔 캐릭터의 재해석 역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향뿐만 아니라 상업적 고려가 들어간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타국적 배우 캐스팅이 해당 국가에서 화제를 모으며 영화 흥행으로 이어지고, 그 뒤 원작 만화에 관심을 두며 ‘입덕’하는 새로운 팬층이 생기는 선순환을 노리는 것이다. 나부터도 ‘마블리(a.k.a 마동석) in 마블’ 기대하고 있다.

아직 편입시킬 국적의 히어로들은 넉넉히 남아있으니, 적어도 몇 년간 마블의 프랜차이즈는 계속 흥행가도를 질주하지 않을까? 그밖에도 다양한 정체성의 집단들을 유혹하기 위해, 마블은 앞으로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