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시작된 무역 분쟁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여름이었다. 아베 신조 총리와 집권 자민당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과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나 우익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역사의 가해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와 그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것. 2차 대전 때 군국주의 일본이 자행한 온갖 전쟁 범죄 중에서도 특히 위안부와 강제 징용은 일본 우익이 가장 먼저 지우고 싶어 하는 진실이다.
8월에는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표현의 부자유’ 전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중지하는 일이 일어났다. 법의 문제에 정치를, 정치 문제에 경제를 개입시키다 급기야 예술에까지 정치가 관여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전시회의 주제가 무색해진 결과, 일본은 현재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임을 스스로 인증한 꼴이 되었다. 그간 온갖 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았던 일본은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나라였다. 그 자유란 섹스와 폭력 표현에만 국한된 것이었던가? 여기에 SNS를 통하여 예상치 못한 몇몇 작가들의 편향된 사고와 가치관의 커밍아웃까지 더해졌다.
작가들의 문제는 후술하겠지만 우선 필자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건 일본 정부가 세계인의 축제가 되어야 할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이러고 있다는 점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등 문화 강국으로서 전 세계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본이다. 세계 경제와 문화가 밀접하게 교류하며 국가와 이념의 경계는 점점 더 유명무실해지는 시대에 일본의 자국중심주의는 퇴행이다. 겉으로 ‘쿨 재팬’을 표방하고, 2016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슈퍼마리오로 깜짝 분장했던 총리의 모습 뒤에는 이미 부활하는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나보다.
지금 일본의 모습은 공교롭게도, 37년 전에 이미 자국에서 또 올림픽이 열리리라 예언했던 오토모 가쓰히로의 만화 <아키라>(1982) 속 도쿄를 연상시킨다. 또 본토에 핵을 맞고 3차 대전의 개막을 알렸던 도쿄는 ‘네오 도쿄’로 재건하여 내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었으나 실상은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는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NHK가 올림픽을 맞아 현대 배경 위에 <아키라>를 CG로 구현한 ‘Tokyo Reborn’ 영상에서 카네다의 붉은 바이크가 재개발 중인 도쿄 거리를 달리는 모습은 어쩐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새로운 도쿄는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 가야 한다.” 오토모 감독은 영상에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통제하는 도시에 반항하여 폭주하는 청춘들이 내달렸던 전설이 이제 자국 프로파간다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관료와 엘리트 중심의 일본 사회는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속에 변화 불가능한 시스템으로 굳어진 것 같다. 2000년대 들어 일본 만화에서 전일본적 재앙이 갑자기 발생하고, 시스템 자체가 무력화되는 플롯을 자주 발견하는 건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사회 기반이 무너지자 무력 앞에서 공평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지만, 결국 이런 신세계조차 약육강식의 구도로 시스템을 되돌려, 끝에 가선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귀결되고 만다.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시스템은 불변이다. 젊은이들은 싸울 의지보다 먼저 한계를 체감한다. 우리도 크게 다른 사정은 아닐진대, 일본은 이러한 절망에 가장 앞서 도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일본 자국의 문제는 뒤로 하고, 한국의 일본 애니메이션 애호가들은 어느 날 느닷없이 모욕감을 느꼈다. 사랑이 뜻밖의 혐오로 돌아왔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디자이너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SNS 상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모욕하고,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캐릭터 디자이너 유키 노부테루마저 이 발언에 동조한 것이다. 이들이 참여한 작품들이 특히 90년대에 틴에이저였던 팬들에게 준 영향과 가치를 생각하면, 정말 참담한 심정이다. 작가의 오만함은 도를 넘어 이후의 작품을 안 보고는 못 배길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의 도발로까지 이어졌고, 곧 유튜브 리뷰어와 연예인 등 애호가들의 보이콧 선언으로 이어졌다.
사랑했던 이와 헤어지면 영원히 안 보는 관계가 되듯, 작가(아티스트)와 작품에 대한 팬의 헤어짐은 절교와 같다. 누구나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고 어느 정도 내셔널리즘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견해와 망언은 구분되며 일방적 혐오는 이해의 한계를 넘는다. 역사왜곡과 인식부재보다 먼저 황당한 건 작가가 팬을 인식하는 범위다. 외국 팬에게 볼 테면 보라는 식의 도발은, 여전히 작품의 수요를 내수 위주로 판단하는 안일함에서 온 것이다. 비록 사다모토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시리즈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고 있긴 하나, 할리우드 같으면 제작사 명의의 ‘선긋기’용 사과 성명이 나왔을만한 일이다. 일본 문화의 갈라파고스화는 시장과 업계는 물론 작가 인식의 한계에서부터 온다는 증명이다. 이제 내/외수 구분은 무의미한데도, 전 세계에 내보일 작품이자 상품을 자국 오타쿠용 서브컬처 수준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이제 고민은 팬의 몫이다. ‘인생작(품)’ 또는 ‘인생캐(릭터)’와 어떻게 헤어질 것인가?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이 집단 창작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의 경우, 우선 작품에 기여한 대표 작가의 창작적 지분을 따져야 할 것이다. IP나 저작권이 주로 제작/배급사에 귀속됨에도 결과물로서 영화에 책임을 지는 자는 감독으로 보듯이, 오리지널 애니메이션도 비슷할 것 같다. 팬은 또한 자신이 그 작품에 대해 갖는 관심도의 범위를 헤아려야 한다. 필자의 경우 ‘에바’를 책임져야 할 주인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다. 애증의 작품인 에반게리온에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안노의 혁신적인 스토리와 파격의 연출이지 이미 상투적이었던 캐릭터 디자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신 에바의 완결까지 보고 나면, 이후의 취급은 한 시대의 텍스트로만 남게 될 것 같다.
작품이 훌륭하니 작가까지 인간적으로 훌륭할 확률은 매우 낮은 편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과거에 작가란 미지의 인물이고 팬이 그의 심중이나 사상을 헤아리는 것은 작품을 통해서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나마 글로 쓴 작품이 그렇고, 그림이나 음악 작품만으로는 그 창작가의 사상까지 알기는 힘들었다. 작품으로 전하지 않은 작가의 생각이나 일상을 팬이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팬이 스토킹을 하거나 작가가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는 이상, 서로 간에는 팬레터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SNS 시대에 팬과 작가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가깝다. 작가가 SNS에 올린 말과 행동은 팬들에게 즉시 퍼지고, 작품의 매출에까지 영향을 준다. 영업을 병행해야 하는 작가 입장에서 SNS는 안 하기도 곤란하다. 팬덤에게 SNS는 아티스트의 정보를 공유하며 동지들을 만나는 천국이다. 지금처럼 ‘덕질’하기 좋은 시대는 없다고 할 정도다.
필자 생각에 팬은 작가에 대해선 모르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팬을 너무 의식해서 좋을 게 없다. 일례로, 자신의 만화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을 모조리 읽고 있을 웹툰 작가들을 생각하면 문득 안쓰러워 질 때가 있다. 웹툰 댓글 란은 전문가 뺨치는 비평과 호불호의 격전장이다. 작가와 작품이 즉각적 판단에 좌우되는 조회 수의 노예가 되면 진정한 평가는 요원해진다. 작가는 작품이 성공한 것이지 자신이 성공한 게 아님에도, 팬들의 관심을 확인하고픈 욕망으로 사생활을 노출하고 스스로 유명인의 자리에 오르는 패착을 저지른다. 그러면 팬들은 한낱 작가일 뿐 실은 대단치 않은 인간에게 높은 수준의 인성이나 도덕성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작품 외적인 호감도 기대했던 팬과, 유명해지고 싶을 뿐 ‘공인’이 되는 부담은 원하지 않았던 작가는 민낯이 보이고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 서로에게 실망하기 쉽다.
지금 작가와 팬 사이 거리두기를 아쉬워하는 것은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고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온갖 작품의 팬인 우리가 겪는, 작가 또는 아티스트라 불리는 한낱 타인에 대한 실망을 조금이나마 추스르고 다독이고 싶다. 어쩌면 필자는 낡은 사고로 오늘날의 작가와 팬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지 모른다. 현대의 아티스트, 작가란 작품으로만 말하기보다 스스로의 발언과 행동으로 대중에 영향력을 끼치는 ‘인플루언서(influencer)’에 가깝고, 팬 역시 팔로워(follower)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뭔가를 주장하고 여론을 만들어 영향력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만으로 자분이 창출된다. 작가나 아티스트가 작품을 차곡차곡 쌓아 발전하여 거장이나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던 시대는 이미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짜 영향력은 언제나 팬에게 있고, 만남과 사랑과 절교는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