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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漫步만보_ 원로 만화가 순례 ⑬ 고유성

2020-03-09 조관제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 만화가 나고, 내가 만화이다! 





고유성 (본명 : 고재훈)

1948년 생. 서울특별시.
홍익대학교 상경학과 중퇴

작품 연보
1974년 <고박사의 탐정소동>(연작 공포의 유령산장 포함) 데뷔.
1977년 <로보트 킹> 월간 소년 잡지 ‘우등생’ 연재, 묶음판 3권 발표.
1978년 <우주에서 온 왕자> 소년신문 연재, 묶음판 2권 발표(이후 4판 발행)
1979년 <우주탐정 고박사> 단행본 발표, <남극 대모험>
1980년 <번개 기동대> 발표. 월간 소년잡지 ‘어깨동무’ 연재,
<혹성의 로봇 델타> 월간 ‘보물섬’ 연재, (83년까지)
1981년 <지구 특공대> 외 <해저마녀> <우주의 침입자> 외 다수 작품 발표.
1982년 <복제인간> 단행본 발표, 91년 리메이크 판 발표.
<혼>, <우주의 늑대 혼> 1982년 단행본 첫 발표.
1985년 <불사조> (소년경향)
1988년 <별소녀> (소년경향-2회연재후 잡지폐간으로 중단)
1989년 <강시권>
1990년 <무적 로봇 콩> (소년조선일보)
1991년 <마스크 맨> (소년중앙)
1993년 <파워게임> (보물섬)

2000년 홈페이지 신작 연재 시작.
<이방인 (82년)>. <불타는 별 (83년)>, <우주푼 (84년 학생과학)>
<전격 제로 작전 (85년 월간 새소년)> <전광 인간 (86년 소년경향)> 외 다수 작품 발표.

 만화가들이 기피 하는 장르가 SF 만화이다. 복잡한 기계와 우주를 그려야 하고, 방대한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크게 각광 받지 못하는 장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0~80년대는 지금처럼 흔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대였지만 그 시절 아이들도 우주를 여행하고, 사람과 친구처럼 지내는 로봇을 꿈꾸었던 시절에, 그 어린이들의 꿈을 만화로 이루어 준 SF 전문 만화가 중의 한 사람, 고유성을 만났다.


우주와 로봇을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꿈 심어준 SF 만화가.

 고유성은 만화가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단행본 만화시장의 전성기 시절에 만화에 발을 디뎠다.
만화는 인기도 있었지만, 반대로 아동 정서를 해친다는 반대의 여론도 거셌다. 대본소 만화가 사회적으로 6대 사회악 중의 하나로 취급당했고, 대본소 만화가 중에는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가기도 했던 대본소 만화의 ‘분서갱유’를 겪던 시대였다.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지만, 체력적인 한계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던 그는, 막연하게 돈벌이가 제일 쉬운 것 같아서 평소 관심을 가졌던 만화를 시작했단다.
평소 엉뚱한 생각이나,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던 고유성이었지만, 중학교 다닐 때까지 만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군 부대 쓰레기통에서 굴러다니는 만화책을 구해서 파는 가판대 만화를 보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당시 인기만화 뒤편에 실린 독자란 투고 그림을 통해 모인 ‘아마추어 만화가 클럽’ 멤버들은, 인기 만화가의 펜이랍시고 만화가 찾아다니기도 하고, 좋아하는 만화가의 주인공을 따라 그리며 실력을 뽐냈었다. 
‘아마추어 만화가 클럽’은 지방에서 올라온 만화가 지망생들이 모여 정보도 교환하고 일자리도 찾는 유용한 모임이었다.
고유성도 이 ‘아마추어 만화가 클럽’에 가입을 했다. 모임에서 지면을 통해 알게 된 마음이 맞는 김영하와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 편지로 왕래하면서 친해진다. 

 만화에 대한 인식이 낮아 서울 출신의 만화가 지망생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만화에 빠진 고유성을 보고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주라는 이유로 고유성의 부친은 6.25 전쟁 때 납북이 되셨지만, 농장 지주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식구를 위해 을지로에서 다방을 운영한 덕분에 집안 사정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집안 식구들은 고유성이 공부만 하기를 바랐었는데,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만화가를 지망하려는 고유성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심지어는 두들겨 맞기까지 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만화가가 되고자 한 그의 열정을 키울 기회가 왔다.
당시 ‘이겨라 벤’과 같은 동물만화로 인기 만화가로 명성을 날리던 이향원 화실에서 일 할 사람이 모자라 스탭을 구한다는 것이다.
절친 김영하의 친구로 김기백 화실에서 일을 도우던 김광환의 추천을 받아 이향원 화실에 들어가게 된다.




기본 없이 시작한 열악한 환경의 중노동 만화 작업.

 이향원의 화실에 스텝으로 입문은 했지만, 문하생에 대한 이향원의 교육방법은 방임 그 자체였다. 인기 만화가로서 작업에 쫓겨 바빴기도 했지만, 고유성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가르쳐주지도 않아 스스로 배우며 그렸다.
데뷔 때 만화 스토리를 써 본 경험이 있었던 고유성은, 스토리를 쓸 줄 안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문하생 중의 최고 대우를 받는 ‘데생 맨’으로 들어간다.
그 당시 문하생 친구들은 1세대 만화가들의 그림 영향 아래 있어서 ‘구닥다리’ 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풍 그림 비슷하게 묘사한 고유성의 그림이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화실의 작업 환경과 강도는 생각보다 열악했다. 일주일쯤 밤샘하는 건 보통이었는데, 많은 문하생을 두고 대량 작업을 한 어느 작가는 일 년 평균 200권을 그린 이도 있을 정도로 문하생들을 기계 부속처럼 부렸다.
상상하며 이야기 꾸미는 걸 좋아했던 고유성은 적성에 맞는 직업 같아서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문하생들의 내부 사정을 체험하고는 실망해서 만화가의 꿈을 몇 번이나 접으려 했다.
문하생들의 작업 패턴이 안정되면서 스토리와 캐릭터 이미지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즈음에는, 문하생들이 완성 시킨 작품을 들고 가면 ‘두목 작가’ - 만화가 선생을 문하생들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 는 내용이나 이미지 검토도 안 하고 출판사 넘겼다. 특정 작가 열댓 명이 출판계를 좌지우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은 원고의 질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받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화가의 작품 세계라든가 화풍 연구라는 그런 고상한 말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돈벌이만을 위해 그린 일본 해적판 만화들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수입 금지 품목이었던 일본 제품, 특히 문화 상품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 일부 장사꾼 만화가들은 명동 중국 대사관 근방에 있던 일본 만화잡지를 밀수한 곳을 찾았었다.
밀수입한 일본 주간지의 연재만화 중에 내용이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을 골라 문하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끼는 작업을 하게 했는데, 권수 제한으로 한 작가 이름으로 많은 작품을 낼 수 없을 때는 만화가 이름도 작명을 해 주기도 하고, 여럿이 모여 한 이름으로 작품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유명한 박*수라는 이는 일본 만화 복제로 유명했던 사이비 만화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난장판으로 만든, 걸러내야 할 ‘일본 복제 만화’는 보지 못하고 엉뚱한 기준으로 만화가들을 괴롭힌 심의실의 횡포로 고유성도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만화 속 주인공은 장발은 물론 금발이나, 꽃도 못 그리게 했는가 하면, 미니 부츠도 못 신게 해서 심의실에서 지적한 장면을 수정하기 위해 다시 그린 원고를 붙이는 원고지 땜질하느라 고생했다.
 특히 액션 만화에 대한 심의가 심했던 시절이었다. 고유성의 작품 중에 베트남 배경의 만화 속 여주인공이 미니 부츠를 신은 장발에 애꾸였는데, 심의실의 수정 요구에 충격받아 ‘만화를 때려치울까’하는 고민을 하며 한때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유성은 다른 만화가보다 삶의 질이 좀 나은 편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거지꼴을 하면서도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낭만은 무슨 낭만. 환경이 너무 거지 같았는데... 전쟁터에서 죽기 살기로 살아온 놈한테 무슨 낭만이냐? 지금은 생각도 하기 싫은 중노동이었으며 열악한 상황이었는 데...”
그 시절 고생도 나름 낭만적이지 않으냐는 감성적인 질문에, 타인의 고통을 모르고 감성팔이 하라고 하는가 하며 고유성은 목청을 높였다.




고유성을 단번에 인기작가로 발돋움하게 한 <로보트 킹>




 고유성은 틈나는 대로 다독(多讀), 속독(速讀)을 하는 ‘독서광’이다. 주로 SF 소설을 많이 읽는데, 속독을 하는 이유는 내용을 음미하며 읽다 보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읽느라 많은 시간이 걸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1977년 이향원 소개로 <우등생>이란 잡지에 고유성은 첫 연재를 하게 된다.
<로보트 킹>이란 제목의 SF 작품이었는데, 이 한 작품으로 고유성은 단번에 인기 만화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독자의 사랑을 받아 인기 만화가로 발돋움한 고유성은 신이 나서, 그동안 겪은 고단했던 만화가로 겪었던 고단함을 다 잊는다. 만약 그 당시 그의 만화가 인기가 없었더라면 그때 만화가의 길을 포기했을 거라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인기도 잠시, 운영자금 부족으로 출판사는 1년 밖에 못 버티고 폐간을 한다.

 비록 연재 매체를 잃은 고유성이었지만, 만화 원고를 팔 출판사를 찾아다니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화 출판이 돈벌이가 된다는 소문에 갑자기 출판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기성작가들은 이미 거래하던 출판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신생 출판사에서는 만화가를 구하기 힘들었다.
신생 출판사에서는, 어느 만화가 문하생 중에 특별히 실력이 있다는 소문만 나면 찾아다닐 때였다. 고유성 같은 실력 있는 문하생들은 출판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 문하생이면 누구나 꿈꾸던 자신의 이름으로 된 만화 단행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1세대 만화가들이 너무 오랫동안 만화계를 좌지우지하고 있어 독자들이 이미지나 서사 구조의 나태함에 독자들이 식상 해하는 조짐이 보였다. 1세대 선배 만화가들이 기득권에만 매달려 횡포를 부리기만 했지 만화계의 변화를 외면하는 꼴이 보기 싫다며 이향원, 강철수 등 7인의 만화가들이 모여 독립해서 만든 ‘황야의 7인 그룹’이 결성되기도 했다.



SF 전문 만화가로 신문 잡지 만화 연재로 영역을 확장 시키다.

 70년대부터 80년대 내내 고유성은 대본소용 단행본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한다.
<불타는 별>, <초능력자>, <별의 투사>, <아가루타> 등을 포함한 수많은 SF 작품들이 ‘유성’, 혹은 ‘고유성’이라는 이름으로 대본 단행본을 발표했다.
고유성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품은 <고박사의 탐정소동>인데, 이 작품에서 작은 키에 안경을 쓴 재치는 넘치지만, 어딘가 어설픈 ‘고박사’라는 고유성의 고유한 캐릭터가 본격적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고 박사’는 고유성의 분신 격인 캐릭터로, 그의 절친 허영만 만화에서도 ‘고 박사’ ‘고 기자’ ‘고 과장’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고유성의 청소년 대상의 첫 작품이었던 <혹성의 로봇 델타>를 시작으로, <로보트 킹 시리즈>라는 걸작의 인기에 힘 받아 대본소 만화가 아닌 신문. 잡지에 <우주에서 온 왕자> <번개 기동대 시리즈> 같은 장편 대표작들을 발표한다.
고유성은 신문과 잡지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SF 작품들을 따로 모아 편집해서 일반 출판사를 찾았다. 만화가가 편집을 직접 한다는 것은 참 귀찮은 일이었다.
연재하면서 페이지 제약으로 생략했던 부분도 보충해서 삽입해야 하는 일까지 하다 보면 작업을 두 번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유성의 제안으로 단행본을 출간한 출판사는 예상대로 성공한다. 작품의 성공 보수로 거액의 인세를 받아 가는 걸 본 편집자들 중에는 시샘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월급쟁이 자신들보다 돈을 더 많이 가져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직장인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만화 창작을, 만화가를 우습게 보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마음이 불편했다.

 고유성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고민을 하는 만큼, 다른 만화가들의 작품을 철저히 관찰 분석하는 프로 의식은 철저한 만화가이다.
‘프로이기 때문에 다른 만화가는 모두 적이라 생각한다. 먹고 사는 경쟁이니까 적을 알아야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SF 만화를 활용해서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확대되지 못해 창작자에게 보탬이 되지 못하는 환경에 안타까워한다. 우리 상품을 개발해서 제작하는 것보다는 일본 제품을 수입에서 판매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상업적 행태 때문이다.

 만화가여서 행복했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은 ‘행복이라기보다 잘 먹고 살았다’고 했다.
만화가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는데, 꿈이 ‘개떡’이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작품을 위한 작가로 사느냐? 돈이 되는 작품으로 돈을 벌 것이냐?’라는 극단적인 문제로 고민도 했다.
한쪽은 창작자의 길이고, 한쪽은 양아치로 사는 길인데 선택하기 쉬운 일이 아니어서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고민을 복잡하게 생각을 안 하고 살기로 했단다.


디지털 시대에 올라타고 흘러가기 30년의 원로만화가

 아날로그 시대에서 살던 고유성은 일찍부터 디지털 시대에 관심을 가졌다.
‘야후’ 시대부터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30년 정도 된 셈이다.
과거에 잡지 연재와 대본소용으로 제작한 일부 작품들을 스캔해서 올리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고유성은, 기계로 그림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애플’ 시대서부터 학원도 다니며 그림을 스캔하기도 하고 배경도 하는 기술을 ‘대충’ 배웠다. 지금도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대충’ 배우고 있다.
부지런한 그에게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고역이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청탁하는 것도 아닌 흘러간 만화가이지만, 과거에 미완이었던 작품들을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고유성의 블로그는, 내 기록을 남기는 것,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자존감을 위해 그림도 올리고, 만화와 만화계, 그리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SF라는 장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올린다.

 특히 ‘바사기의 만화기행’은 한국 만화계의 현실과 한계에 대해 원로만화가의 진지한 고민을 볼 수 있다.
고유성의 분신 ‘바사기’의 눈을 통해서 해방 이후, 한국에서 만화와 만화가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그 당시의 만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제작이 되었는지? 한국만화에 지극한 애정을 담은 원로 만화가 고유성의 생각을 전하는 통로이다.
편리한 스마트 세상이라지만 만화가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생태 환경에 불만이지만, 나이 들었다고 변화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퇴보라는 신념이 그의 작업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그의 블로그에는 댓글은 사절한다고 했다. 아예 막아놔서 댓글은 쓰지 못하게 되어있다. 쓸데없는 글들이 올라오는 게 많아 피곤해서 안 달게 한단다. 일본 ‘망가’를 보고 세뇌당한 아이들이라 ‘고유성의 독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아날로그 시대 거쳐 온 만화가로서 디지털 환경에서 웹툰을 하는 후배에게는 근본적으로 시각이 틀리기 때문에 해 줄 말은 없다면서도 후배 사랑하는 마음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지만, 만화로 먹고살아야 하는 만화가라면,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나 같은 거지’ 된다.
지금은 옛날처럼 시간이 가고 입소문이 나서 인기 만화가 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처리 속도가 빠른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정신이 없는 듯하다.
만화가로 오랫동안 먹고 살기 위해서는 1인 사업가 되어야 한다. 만화가 자신이 만들어 자기가 파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데 후배들은 마음이 바빠 준비가 안 되어있다.”

 고유성은 <새소년>에서 연재했던 미완성 작품이 아쉬워 뒷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작업을 하고 있고, <어깨동무>에서 연재했던 원고는 스토리가 아까워 다시 작업 중이다.

 남 신경 안 쓰고 내 갈 길만 가는 만화가로 살아왔던 고유성은, 과학에 관심 많아 모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것을 이해할 때까지 지금도 배운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고유성은 일찍부터 타기 시작해서 사고도 많이 냈다. 하지만 작은 체구이기 때문에 남들처럼 폼이 나지 않았다며 킥킥거렸다.
긴 인터뷰에 지쳤는지, 막걸리 한잔하며 이야기 더 하자는 제안에 마다하고 그림 재료를 사러 가야 한다며 화방으로 휘적휘적 사라졌다.

 숨 가쁘게 변해서 개념조차 파악하기 힘든 디지털 환경은 신기술이 주는 공포라지만, 그는 그냥 그 기술에 올라타고 흐르는 대로 가면 된다는 말에 엄청난 내공을 가진 디지털 신선 같은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