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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만보 / 원로만화가 순례 ⑭ 김마정

2020-03-30 조관제




돈 안 된다는 데 ‘카툰’만 고집하는 어리석은 ‘마수고리’.




김마정(본명 김석원 金錫源)
1943년 경북 영덕 생

작품 연보
1961년 '갈매기 우는 마을' 등으로 <박애서림> 아동만화 전속작가로 데뷔.
1963년 박기정 문하에 입문 / <크로바 문고> 스토리 데생 담당.
1964년 ‘보고파’ 출간.
1970년~1977년 '손끝에 달린 고양이 눈', ‘더벅머리’, ‘쩨쩨’, ‘주공탄 천재’, ‘세 짱구’ ‘거지왕 김춘삼’ 등 작품 다수 출간.
1979년 <뿌리깊은 나무> 카툰 공모 당선.
'모서리 일기', '요철시인' 등 발표.
1980년 ‘마수고리’ 만평을 <주간만화>에 연재.
1981년 ‘김마정 풍자만평’ <일간스포츠>. ‘토픽만평’ <국민일보>에 연재.
1986, 1989, 1997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주최 ‘국제만화공모전’에서 수상.
1993년 ‘치통을 참아낸 철학자는 없다’ 출간.
1993년 <주간만화>, <매주만화>, <만화광장>, <일간스포츠>, <시사토픽> 등에 카툰 연재.
2001년 ‘깜바기’ <중앙일보>에 연재.
2003년 카툰 에세이 ‘세상 틈바귀에’ 출간.
2004년 만화신문 에 만평 연재.

활동 경력
2009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
2001년 문광부 만화출판상 심사위원.
2002년 동아·LG 국제만화공모전 카툰 부문 심사위원.
2003년 일본 국제교류기금 주최 ‘한일 만화가 연하엽서 교류전’
2004년 한국만화가협회 만화공모 카툰 부문 심사위원.
2008년 제5회 대한민국 창작만화전 카툰 부문 심사위원.
목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외래교수.
2009년 한림대학교 일송기념 도서관 ‘만화와 삶, 그리고 추억’ 전
현재 한국카툰협회 고문. 한국만화가협회 정회원.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의 핵심인 카툰Cartoon은 인간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사용하는 언어, 몸짓과 마찬가지로 그림으로 나타내는 시각예술이다.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은 시각적 특성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 문자 다음의 영향력을 가진 세계인에게 통하는 제3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런 고급스러운 정의로 대접을 받는 카툰이지만, 척박한 우리 만화문화 환경에서 카툰은 존재감마저 미미한 비인기 장르이다.

 우리 만화계 풍토에서 카툰으로 먹고 산다는 게 ‘어불성설’이란 통념을 깨야 하는 일이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서, 오늘도 시간과 돈을 손해 보면서도 펜을 놓지 않는 한국 카툰계의 향도 중의 한 사람인 김마정을 만났다.


발명가가 꿈이었던 독서광 김마정


 김마정은 처음부터 만화가를 꿈꾸지 않았다. 경상북도 어촌 영덕에서 태어난 김마정은, 당시 귀한 직업으로 대접받았던 기계기술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발명가가 되는 것이 어린 시절 꿈이었다.
시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던 김마정이었지만, 그의 고향에는 언제나 읽을거리가 부족한 작은 어촌이었다. 읽을거리를 구하지 못할 때는 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신문철을 훔쳐와 밤새 읽고 갖다 놓기도 했던 독서광이었다.

 장날이면 길바닥에 자리를 펴놓고 파는 잡지와 만화책들을 구해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김마정은 <학원>, <새벗>, <소년세계> 등 잡지를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가를 이룬 선배 만화가들이 그랬듯이 김마정 역시 고교 시절부터 신문과 잡지에서 유행하던 ‘독자만화 투고란’의 단골손님으로, 지금도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만화계의 대가들도 그 당시 신문과 잡지만화 독자 투고란에서 자주 만났던 이들이었다.
서울에 있는 큰 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김마정 이름이 실린 것을 본 온 마을 사람들은 ‘만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재주 있는 마정이를 이런 깡촌에다 썩힐 수 없다! 서울로 보내야 한다’며 성화였다.

 신문 잡지에 실린 그의 작품을 본 부산의 한 출판사 사장이 고등학생 김마정을 불러 <뽑기 만화> 작가로 데뷔를 시킨다.
뽑기 만화는, 6. 25전쟁 여파로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어린이가 고객인 상품 판촉물로 인기가 꽤 있었던 마케팅 전략이었다,
문구, 과자, 장난감회사에서 제품 홍보를 위해 부산과 경남권에서 유행했던 만화로, 16쪽을 기본으로 한 4*6판 만화책을 제품 속에 넣어 관심을 끌게 한 독특한 상술이었다.
요즘처럼 종이 위에다 그리는 만화 원고가 아니라, 바로 인쇄하는 아연판에다 직접 만화를 그려야 하는 실수를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원고료라는 것은 출판사 사장 마음대로였다. 고생해서 그려주면 원고료를 언제 얼마를 주겠다는 언질이 없었다.
참다못한 김마정은 원고료 달라는 말은 못 하고 밥값이 없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면 사장은 그야말로 자장면값 정도를 자기 주머니에서 뽑아 주곤 말았다.
막연하나마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김마정에게는 늘푼수 없는 좁은 바닥 어촌 강구의 환경과 실속도 미래도 없는 징크판 만화를 그려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다.

만화에 대한 정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 김마정


 번듯하게 자기 이름으로 된 진짜 만화를 그리는 프로가 되고 싶었던 김마정은 서울에 만화학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상경을 한다.
그가 무슨 계획이 있어 서울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태풍 '사라호'는 조그만 포구마을인 강구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려서 무엇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김마정은 자신의 그림 재능만 믿고 무작정 만화학원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충무로 중부시장 근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만화연구소>는 바이올리니스트 ‘김길영’에 의해 설립된 6개월 과정의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학원이었다.
낮에는 바이얼린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음악학원이었고, 밤에만 만화학원을 운영했는데, 강사진으로는 신동헌, 김경언, 김정파, 신동우, 송영방, 정한기, 임수 등 당시 쟁쟁했던 인기만화가들이었다.
만화에 대한 열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 김마정은 강의료 대신 학원 청소를 해 주기로 하고, 책상을 붙여 잠을 자는 생활로 본격적인 만화공부를 했다.
이곳에서 김마정은 한희작, 임웅순, 박문윤, 이정민, 이소풍 등 ‘만화에 미친’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된다.

  1년 정도 학원에서 공부를 한 다음 1961년 <갈매기 우는 마을>을 발표하며 만화가로 데뷔해서 자리를 잡을만 했는데 4. 19가 일어난다.
세상이 어수선해지며 덩달아 만화에 대한 심의도 강화되어, 그리는 원고보다 수정하는 원고가 더 많을 정도로 만화가도 출판사도 어려움을 겪었다.
4. 19의 격랑이 한풀 꺾여 잠잠해지자 김마정도 다시 작품을 시작했지만, 또 5. 16이 일어나 아동만화를 사회악의 하나로 지목되며 더 강력한 심의로 고통을 받는다.
출판사는 장사가 안된다는 핑계로 원고료를 후려쳐서 신인 만화가들은 생계비에도 모자랄 정도의 환경이 또 한 번 꿈이 무산된 김마정을 방황하게 했다.

 이런 사정을 안 부산 친구들이 ’부림극장‘에 간판 그리는 자리가 났다며 김마정을 끌어 내렸다. 하지만 마음을 잡지 못했던 김마정은 우연히 만화학원에서 알게 된 박문윤을 만나 그가 기거하고 있던 여관으로 들어가 다시 만화를 시작한다.
박문윤의 여관방에서 김마정은 그 당시 인기 있던 박기정 풍의 그림으로 <더벅머리>라는 히트작품을 위시하여 <손끝에 달린 고양이>, <거지왕 김춘삼>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신인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너무 앞선 서사구조를 독자들이 따르지 못했는지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며 고전을 한다.




박기정 화실에서 안정을 찾았지만...


 그런 김마정에게 '두통이' 시리즈로 인기를 누리던 만화가이면서 만화출판사 <크로바 문고>를 운영하던 박기준이 형님 박기정의 작업을 도와 달라며 찾아온다.
신문만화와 청소년 만화에서 명성이 높았던 박기정이 신문사의 요청을 거절 못 하고 신문사로 출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실패한 김마정은 다시 거들어 달라는 <크로바 문고>의 요청을 받고 ‘박기정 사단’에 합류를 한다.
인기만화가 박기정 화실에는 작업 할 사람, 특히 스토리 작가가 부족했는데 어쩔 수 없이 김마정은 스토리와 콘티, 그리고 데생까지 하며 지낸다. 이두호와 이우정은 그때 박기정 화실에서 작업을 함께 한 사이로 지금도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박기준 화실에서 작업을 도우던 이상무도 그때 만났던 사이이다.

 떠돌이 김마정이 처음으로 안정을 찾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박기정 화실의 생활이었지만, 운명은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순간순간 배가 찢는 듯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몇 군데 병원을 전전하다가 ‘간질’처럼 나타나는 ‘재발성 맹장’이란 진단을 받는다.
가진 것이 없는 김마정은 스승의 도움으로 만만찮은 액수의 수술비를 감당했는데, 갚아야 할 돈도 부담이었지만, 갚을 만한 돈이 모이면 예나 지금이나 셈에 약한 그에게 또 돈 쓸 일이 생기고 해서, 빚을 갚기 위해 13년 동안을 박기정 화실에서 작업을 돕게 되었다.

 만화가로서의 재능은 있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김마정은 교활한 장사꾼의 음모에 또 한 번 시련을 겪는다.
속칭 ‘신촌 대통령’이라는 독과점 만화출판을 하던 ‘이 모 사장’의 횡포에 못이긴 만화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만화가의 권리를 찾기 위한 ‘독립 출판사’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신촌 대통령’이 운영하던 출판사와 거래해서 돈을 벌게 해 주었던 인기만화가들이 독립해서 빠져나가게 되면 사업에 타격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사장은 순진한 김마정에게 제일 먼저 접근한 것이다.
"만화가란 이름뿐이고 모든 작업은 문하생인 자네들이 다 하잖은가.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빚은 물론 생활 터전까지 책임질 테니 일하고 있는 만화가 밑에서 나와 독립하라. 내가 밀어주겠다!“

 만화가의 문하생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대형출판사 사장이 좋은 기회를 준다는 말에 김마정은 그대로 믿었다.
화실의 최정예 멤버를 빼내기만 하면 작가들이 작업을 못 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작업을 못 하는 만화가는 일에 쫓겨 당연히 출판사 차리겠다는 계획이 지지부진해질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런 속셈도 모르는 김마정은 평소 그와 마음 맞았던 박문윤, 차성진 등과 협의하여 기성 만화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만화가 화실을 나오게 한 것이다.
이 모 사장의 계획은 적중했다. 문하생들이 빠지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만화가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만화가들이 직접 운영하겠다는 계획의 ‘출판사 등록’도 동력이 분산되어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다. 뒤늦게 이런 음모에 당한 걸 안 김마정은 혼란스러웠다.
장사치의 권모술수에 속아 넘어간 김마정은 자신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에 대한 질책과 비난을 감당할 수 없어 고향 강구로 피신을 한다.
김마정의 조언에 동참했던 만화가들 중에는 '이 모 사장한테 받은 돈을 혼자 차지하려고 도망 갔다'는 소문도 퍼지고, 몇몇 만화가는 강구 집까지 찾아와 받은 돈을 나눠 가지자는 억지까지 부렸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실시한 ‘카툰 공모전’에 당선


이 사건으로 인해 만화계에서 김마정은 ‘기피 인물’로 지목이 되어 어디에서도 그의 작품을 팔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동료 만화가까지 김마정이 나타나면 불안해했다. 혹시 또 문하생을 충동질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않을까 해서다.
그 역시도 피해자였던 김마정은 스승과 출판사, 동료 만화가에게까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억울한 사건이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백수 김마정은 청량리에서 라이터 장사를 하고 있던 동병상련의 만화가 박문윤의 가게 주위에서 시간을 죽였다.
평소에 그를 형님으로 모시던 청량리 ’주먹‘이 김마정의 하릴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경기도 대성리로 같이 가서 장사나 하자는 제안을 해서 따라나선다.
대성리 강가에서 김마정은 낚시꾼에게 고깃배도 빌려주고 민물 매운탕도 팔면서 세월을 흘려보냈지만, 그마저도 1년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사정으로 작파하고 경기도 광릉에 있는 사찰 ‘봉선사’에 들어가 은둔을 한다.

만화계에서는 모두 이제 ‘김마정은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거래하자는 출판사가 없어 만화는 그릴 수 없었지만, 그의 빼어난 스토리 구성 능력을 아는 동료작가들이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술값이나 하려고 청탁받아 시작한 만화 스토리 작업이 만화가들에게 도움 된다는 소문이 나자 ‘김마정 스토리’를 찾는 단골이 점점 늘어난다. 작업량이 밀려 어떨 때는 누구에게 줘야 할 스토리인지 헷갈려 스토리를 바꾸어 주는 해프닝까지 생길 정도로 바쁘기도 했다.

1979년을 기점으로 한국만화시장은 다양한 장르의 만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마정도 종합교양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1979년 실시한 ‘카툰 공모전’에 투고한 작품이 당선되면서 다시 한번 만화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뿌리깊은 나무> 카툰 공모전에 당선되자 주간지, 일간지에서 김마정의 카툰과 카툰 일러스트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카툰으로는 생계를 이어 갈 수가 없어 이상무와 허영만에게 두 달에 한 권 정도 스토리를 썼다.

이후 <소년경향>, <레이디경향>, <스포츠조선>, <일간스포츠>, <주간만화> 등에 카툰 작품을 연재하며 한국 카툰계의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하는 카투니스트로 대변신을 하게 된다. <한겨레 신문>에서도 화백으로 초빙하려고 찾았지만 전화가 없는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무산되었다고 했다
사보와 주간지, 신문에서 진가를 나타내던 김마정은 한국 최초로 ‘카툰’이란 장르를 한국만화문화에 자리 잡게 한 사이로를 만나, ‘카툰’에 대한 관심과 카툰 문화의 저변확대를 위해 함께 보자는 제안에 선 듯 동참을 한다.




 사이로와 김마정 등 몇몇 만화가와 함께 발족한 <서울카툰회>는 단행본 만화를 한 김마정을 제외한 다른 회원들은 잡지 신문에 카툰 일러스트를 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순수한 모임이었다.
김마정은 카툰 원고료로는 생계가 안 되니 금성 교과서 작업을 필두로 작업량이 많은 참고서와 학습지 일러스트를 그렸는데, 서울카툰 회원들 중에 가장 수입이 좋았던 김마정은 마포 아현동에 있던 자기 화실을 <서울카툰회> 사무실로도 사용하게 했다.



김마정 작품의 최종 안식처는 만화의 시(詩)라 불리는 카툰.


 새로운 카툰 아이디어 나올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는 김마정이지만, 카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발표할 지면이 점점 없어져서 카툰을 하는 이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대학에서 판에 박힌 내용으로 만화를 가르치는 것도 안스럽고, 골치만 아프고 돈벌이 안 되는 장르라며 카툰 강의를 싫어하던 학생들을 보며 좌절도 했다.

 그러나 김마정 작품 세계의 최종 안식처는 만화의 시(詩)라 불리는 ‘카툰’이다.
그가 말하는 카툰의 표현 방식이란, 독자로 하여금 안내표식 하나 없이 찾아오게 하는, 사고하는 모험을 요구하는 ‘지적 게임’이라고 한다.
후배들은 카툰을 무겁게 ‘예술’ 운운하는데, 그런 틀에서 벗어나 세상에 대해, 낙서화 같은 그림으로 세태를 장난칠 줄 아는 후배 카투니스트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김마정은 기대하고 있다.


 어렵게 완성 시킨 카툰이 값싸게 소비되거나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운 김마정은, 작품들을 새로운 기술에 대입시켜 돌파구를 찾고 싶어 전자 출판에 관심이 많다.
카투니스트끼리 분량을 조절해서 ‘팔리던 말든’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e-북이나 동영상을 만들어 자신의 화랑으로 활용해서 존재감도 드러내고, 카툰 독자의 저변을 확대시키는 방안으로도 좋을 것 같으니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독자들이 공감하고 감동하는 작품이 되도록 먼저 깃발을 들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는 건지 시대가 안 따라오는 것인지, 김마정은 꿈이 자꾸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초조하다. 일부러 고생하면서 ‘지적 게임’ 카툰을 즐기려는 사람이 없는 가벼운 세태이지만, 경제적인 부와 편안함이나 영광 이런 것과는 상관하지 않는 김마정의 카툰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탄탄한 그림 실력으로 많은 작업을 하며 돈도 벌어 봤지만, 남는 건 카툰 밖에 없다는 생각에 김마정은 사이로를 비롯 조관제, 서서영, 강창욱, 조항리, 강일구, 이소풍, 강동헌 등 6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한 ‘사단법인 한국카툰협회’라는 단체가 더 탄탄하게 발돋움 할 수 있도록 애쓰는 원로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벡과사전을 달달 외웠다는 천재였지만, 시대와 맞지 않아 언제나 음지에서 손해만 보고 살았던 김마정은, 이제 세상을 관조하며 집 근방 뒷산으로 산책을 하고, 버섯도 따서 후배에게 나눠주며 휘적휘적 살아가고 있다.
그의 치열하게 살아온 ‘운 없는 삶’을 보며 유명 카투니스트 찰스 바소티(Charles Branum Barsotti)의 글이 생각나서 옮긴다.

"카툰이 우스워 보일지(antic) 모릅니다.
중후한 예술이 아닌 건 맞죠. 하지만 카툰에는 카툰으로서 지녀야 할 두려우리만치 분명한 진정성(integrity)이 있습니다.
만일 없다면, 있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