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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만보 / 원로만화가 순례⑰ 권영섭

잊혀 가는 원로만화가들을 위한 불씨로 사는...

2020-08-27 조관제



잊혀 가는 원로만화가들을 위한 불씨로 사는...

권영섭

1939년 경북 영주생
1958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만화 공모전 당선
<아리랑> 신인만화상 수상. 잡지만화 연재 시작.
1959년 <연합신문> 아동만화 공모전에 당선
<연합신문>에 ‘우리들의 척척박사’ 연재
최초의 단행본 만화 ‘퉁탕이’ 발표
1960년 1월 첫 소년만화 ‘오손이 도손이’ 발표
7월 ‘울 밑에 선 봉선이’ 발표
10월 ‘봉선이하고 바둑이’ 발표
1962년 ‘봉선이 하고 바둑이’ 시리즈 발표
1964년 ‘북두칠성’ 발표.
1966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등 발표
1977년 한국만화상 수상
1981년 기독교 선교기관 (사)KCEF 한국대표
1990년~2000년 인덕대학, 목원대, 공주대 출강
1992년~97년 (사)한국만화가협회 회장
1992년~97년 한국 어린이선교 신학교 시청각 담당 교수
1995년 한국만화문화대상 심사위원. 서울국제만화 공모전 심사위원.
SICAF 조직위원. 문체부 문화산업자문위원 등 역임.
2004년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심사위원.

현재
사)한국원로만화가협회 회장. (사)한국만화가협회 고문
한국기독만화선교회 고문. 세계미술작가교류협회 고문

어릴 때 읽었던 소설 ‘로빈후드’에 나오는 호방한 신부 같은 분위기의 ‘권영섭’ 선생은 오늘도 원로만화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동참해 줄 기관과 후원자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란다.
취재는 원래 술자리에서 이렁저렁한 이야기를 들어야 맛 나는 이야기를 건질 수 있는데,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계시는 신분이라 어쩔 수 없이 찻집에서 맹숭맹숭한 분위기에서 ‘취조’를 했다.


선생님을 대신한 ‘이야기 강사’로 지목받은 권영섭
권영섭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장래 희망을 20가지나 미리 적어 두었을 정도로 조숙했던 어린였다. 첫째 희망은 대통령, 두 번째는 국회의원, 이런 식으로 나열한 직업의 맨 꽁무니를 만화가로 적어뒀을 만큼 만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이면 교실 칠판에다 그림을 그려가며 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해 주는 권영섭을 보고 모두가 만화가가 되라고 했을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이 다른 일로 수업을 하지 못 할 때는 선생님 대신 ‘이야기 강사’로 지목당하는 것도 권영섭이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평소 읽었던 책 내용을 스스로 상상해서 창작한 이야기를 담아 들려주는 입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 내용을 나름대로 창작해서 살을 붙인 이야기는 원작보다 더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자였던 권영섭은 반 친구들은 물론 집안 동생들까지 ‘권영섭 이야기 듣기 반’의 펜으로 만들었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천부적인 소질이 있던 그는 학급의 환경미화에 필요한 그림도 도맡아 그렸다. 고3이 되던 해, <대구매일>에서 주최한 만화작품 모집에 응모했는데 입선이 되어 만화가가 되는 꿈을 확고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골 동네에서는 학생 신분으로 큰 신문사 만화공모전에 당선되어 원고료까지 탔다고 하니 난리가 난 것이다.

권영섭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만화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꿈을 이룰 결심으로, 졸업도 하기 전에 서울로 올라와 무작정 <동아일보> 편집국 문화부장을 찾아갔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신문만화를 그리겠다고 나타나 막무가내로 간청을 하자, 문화부장은 기본부터 배워 실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신문사 인쇄 부서 조수로 일하며 기회를 보자며 달랬다. 
마침, 원고 때문에 신문사를 찾아온 ‘까불이’, ‘칠성이’로 유명한 인기 만화가 ‘김경언’을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당시 여러 신문과 잡지의 만화공모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던 김경언은 투고한 작품으로 권영섭을 기억하고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김경언의 어시던트로 들어간 권영섭은 진짜 만화 원고를 보며, 스승의 작업을 도우면서 만화의 기초부터 시작하여 4컷 만화에 대한 지도를 받았는데, <연합신문>에 작품을 연재하면서도 1년 정도 교류를 했다. 천재이며 동료와 후배를 잘 챙겼던 스승 김경언과의 교류는 친척들과의 문제로 충격을 받아 미국에서 불편한 몸으로 타계한 것을 아직도 안타까워한다.

김경언을 만나면서, 스승을 따라 선배 만화가들이 잘 모이던 명동에 있는 다방 ‘휘가로’에도 쫓아가, 말석에서나마 자리해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중한 공부를 할 기회도 가졌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좌장인 ‘코주부’ 김용환 선생은 모인 후배들에게 ‘데생이 최고로 중요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들려주었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후 ‘신동헌’ 선생 댁에서도 동생 ‘신동우’의 요청으로 시작된 크로키 모임은 권영섭에게는 젊은 만화가들과 교류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화가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 공부가 된다. 시사만화가 고 윤영옥, 동양화가 송영방 등 젊은 만화가들이 모여 누드 크로키를 일주일에 한 번씩 했는데, 미술대학 정규커리큘럼에서도 없었던 소중한 실기공부를 6개월 동안 열심히 했다. 넉넉한 집안 덕분에 생활비 걱정이 없었던 권영섭은 좋은 스승과 동료들의 만남으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만화 공부에 심취하여 밤새기를 밥 먹듯 했었다고 한다.

미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만화가의 길을 간다.
만화가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찾기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 만화 공부에 도움 되는 자료를 찾기 위해 권영섭도 다른 만화가들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던 외국 서적을 파는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권영섭의 눈을 끈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 출판사에서 발행한 만화독본(漫畵讀本)이었다. 한 칸 만화인 ‘카툰’에서부터 ‘캐리커처’로 가득한 만화독본은 권영섭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공부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소중한 교재가 되었다. 이런 노력으로 완성 시킨 작품은 동료들이 모이는 날이면 서로의 그림체와 아이디어를 놓고 치열한 지적과 평가로 실력을 다졌다.


이들의 모임이 만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확실한 미래로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김용환 선생과 신동헌 선생이 마련해 준 자리는 젊은 만화가들에게는 어느 전문교육기관에서 배우는 것보다 많았다. 개성이 강한 젊은 만화가들의 모임은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체에 긍지를 가졌는데, 누구의 화풍을 닮았다는 소리는 죽기보다 듣기 싫어 한 ‘쟁이들의 학교’였다.

인기 대중잡지 <아리랑>, <야담과 실화> 등에 연재만화를 기고하던 권영섭은 ‘코주부 김용환’이 주도한 <대한만화가협회> 준회원으로 가입, 본격적으로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대한만화가협회> 준회원이 되면서 고 이재학, ‘넬슨 신’으로 더 알려진 신능파, 이우헌, 고 방영진, 노석규, 김창수와는 친하게 된다. 
통의동에서 살던 서울 토박이 ‘노석규’의 집이 동료 중에 가장 여유가 있어, 젊은 만화가들은 틈만 나면 노석규의 집에 몰려가서 만화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밤을 새는 민폐도 끼쳤다.

1959년에 ‘퉁탕이’라는 단행본 원고를 완성해서 스승 김경언이 거래하던 단행본 출판사를 찾아갔으나 거절을 당한다. 그 당시의 유행하던 만화의 주류는 김용환의 영향으로 반 삽화체 만화로, 괴기물이나 시대물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권영섭의 만화는 유행하던 그림체도 아니었고, 유행과 떨어진 서정적인 내용의 신인의 작품이라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9년 중앙일간지 <연합신문>에서 아동만화를 공모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모한 권영섭은 한성학, 백윤태와 함께 당선된다. 그동안 노력한 결과로 빛을 본 것이다. <연합신문> 문화부장인 소설가 ‘추식’은 갓 데뷔한 권영섭의 만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원고 청탁을 한다. 

그동안 잡지에서 연재했던 ‘방울이’라는 캐릭터로 ‘우리들의 척척박사’라는 과학 학습만화를 시작했는데, <연합신문> 문화면에 실린 권영섭의 만화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신문에서 본 과학만화의 내용이 그대로 시험문제로 나와 도움받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권영섭이 만화에 나오는 진짜 박사인 줄 알고 과학에 대해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을 정도였다. 문화면에 들어가는 기사의 일러스트까지 그려주면서 <연합신문>에 3년 동안 연재를 했다.


만화가로 인정받은 작품 ‘오손이 도손이’
1960년 ‘두통이’ 캐릭터로 주가를 높이던 ‘박기준’의 주선으로 거래를 하게 된 <크로바 문고>에서 권영섭은 ‘오손이 도손이’를 발표한다. 


‘오손이 도손이’의 서사 구조는 어릴 때 국민학교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발표한 작품이다. 고아로 자란 형제가 헤어져 검사와 도둑이 되어 만나는 다분히 신파적인 구성이었는다. 모두가 삶이 팍팍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위안을 주며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 ‘오손이 도손이’는 단숨에 권영섭을 인기 만화가로 주가를 올린 작품이 된 것이다.

작품 ‘오손이 도손이’를 보고 권영섭의 재능을 뒤늦게 알게 된 <부엉이 문고> ‘오학운’ 사장이 찾아와 새로운 작품을 의뢰한다. ‘오손이 도손이’에 이어 생각해 둔 작품은 있었지만, 만화는 서사 구조에 못지않게 중요한 새 작품의 타이틀과 주인공 이름을 정하는 일은 지금도 만화가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심하던 권영섭은 교회에서 알게 된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지낸 유명한 성악가 ‘김천애’가 일본서 성악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부른 ‘울 밑에 선 봉선화’의 노래에 힌트를 얻는다. 가곡을 작품 제목으로 하고 봉선화를 ‘봉선이’로 바꿔 주인공 이름으로 정했다. 


‘울 밑에선 봉선이’의 이야기 구성을 위한 아이디어는 주변에서 본 고지식한 집안 형님을 중심으로 잡았다. 부유한 집안의 사람으로 태어나 놀기 좋아하고, 친구의 꼬임에 빠져 사업을 시작했다가 재산을 탕진하여 불행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걸 보면서도 집안 형님이라 감히 충고는 할 수도 없고, 형님이 계속 이런 생활을 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를 하는 의미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권영섭을 단숨에 인기 작가 반열에 들도록 만들었지만 ‘울 밑에선 봉선이’를 본 집안 형님은, 자신을 빗댄 주인공을 형무소에 보내고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작품 내용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은 고향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존경받는 유지로 활동하는 형님이지만, 권영섭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구성한 이 작품은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인기의 여세를 몰아 ‘봉선이 시리즈’를 계속 발표한다. ‘봉선이하고 바둑이’는 권영섭을 순정만화가로서 인기 절정의 만화가로 자리를 굳혔다. 만화계에서는 남자 독자는 ‘산호의 라이파이’, 여자 독자는 ‘권영섭의 ‘봉선이하고 바둑이’를 화제로 삼지 않으면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할 정도의 인기였다.

신문만화와 병행을 하며 그리는 단행본 작업이니 한 달에 한 권 마감하는 것도 권영섭에게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후속편을 빨리 보고 싶다는 독자의 성화에 못이긴 출판사에서는, 한 달에 두 권을 그리면 집을 사 주겠다고까지 부추겼지만,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던 권영섭은 거절한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전기 사정은 열악하여 일반 전기는 밤 12시면 끊어졌다. 신문사와 출판사의 원고 마감을 지키기 위해 거의 매일 촛불을 켜 놓고, 밤샘 작업을 하며 발표한 ‘봉선이하고 바둑이’ 시리즈는 1960년부터 시작하여 3년 동안 30권까지 발표를 했다.

독자들의 편지는 하루에 30~40통 왔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독자 편지는 작품을 비판적으로 써 보내 관심을 끌었던 이는, 만화가로 데뷔해서 순정만화계의 큰 자리를 차지한 ‘민애니’였다. 
박기준의 문하에서 수업받고 자작을 한 경북 김천 출신의 본명이 ‘박노철’인 ‘고 이상무’도, ‘김동화’도 권영섭의 애독자였다. <동아일보> 시사만화가 ‘이홍우’도 중학교 2학년 때 권영섭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고 부산 집에서 가출하여 권영섭을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학업을 마친 다음에 만화를 하라는 집안의 만류로 부산으로 되돌아갔지만, 그때 권영섭의 집에서 먹은 점심을 아직도 기억하며 만날 때 마다 이야기를 한다.

<사단법인 한국아동만화가협회>를 창립
만화와 관련된 TV프로그램 심야토론에 출연한 권영섭을 본 대구의 영어교사가 장문의 편지와 함께 빳빳한 만 원권 10장을 동봉하여 보낸 적도 있고, 어릴 때 본 ‘오손이 도손이’의 감동을 늦게나마 보답하는 의미에 선물 대신 보낸다며 본인도 기억 못 하는 줄거리까지 적어 보낸 독자도 있었다.

1968년 10월에 손의성, 신동우, 이근철, 박기준, 김기백 등과 함께 <사단법인 한국 아동만화가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에는 ‘박기정’을 추대하고 권영섭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만화가 권익을 위한 협회 일에 적극 참여를 한다.

<연합신문>과 <조선일보>의 연재만화가 끝날 즈음 만화 단행본 시장의 폭군으로 군림하며 만화가의 생사여탈 권을 휘두르던 신촌 왕국에 반발, 권영섭은 회장 ‘박기정’과 함께 <한국일보>로 출판사를 옮긴다.독과점 출판사의 전횡으로 작가의 작품 제작 환경이 불안해서, 만화가의 권익을 위하고 만화계의 힘을 모으기 위해 애쓰던 권영섭은 이런 불합리한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후보로 나선다.

원로작가 ‘김기률’과 ‘박기당’을 상대로 회장에 후보로 나섰지만, 장사꾼들의 이익을 위한 대리전으로 변한 회원들 간의 진흙탕 싸움에서 두 번이나 낙선한다. 만화계를 위한 진정성 있는 권영섭의 호소가 묵살 되는 만화가협회장 선거에 실망, 그는 만화계에서 멀어졌다.

그 대신, 세계 107개국이 참여하는 기독교 선교단체 <한국어린이전도협회>에서 초빙된 권영섭은 한국 대표로 취임, 7년 동안 봉사를 한다. 만화만 알고 있던 권영섭에게는 국제적인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만화 단행본 세계를 떠났지만, 성경만화와 시청각 자료 개발로 교계에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성경 교재 제작과 신학대학에서 6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만화보다 선교단체 일에 몰두했다. 

선교 봉사와 병행하며 여행사의 영업이사로도 취임, 30여 개국을 여행하며 안목과 감각을 넓혔던 권영섭은 1992년,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려웠던 <한국만화가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된다. 회장 권영섭은 ‘SICAF’와 아시아 만화계와 교류하는 친선 단체 ‘국제만화가대회’의 산파역을 담당하며 열정적으로 협회를 꾸린 성과를 인정받아 1997년까지 회장을 세 번 연임한다.

회장 임기 동안 만화계 일각에서는 권영섭을 ‘독재’, ‘독선적’ 회장이란 말도 나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철학을 굽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화가라는 창작자로서 개인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협회장이라는 ‘공인’으로서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일의 결과에 책임지기 위해서, 욕먹을 각오로 독선적으로 처리했다. 최선을 다했고 정도는 벗어나지 않게 살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내 먹을 것만 있으면 봉사자로 살겠다
1959년부터 81년까지 300 타이틀에 1,200편의 작품을 발표했던 권영섭은 오늘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동안 작업을 하던 100권 전집 성경만화의 완성을 위해 바쁘고, 새삼 ‘카툰’의 재미를 붙여 한 달에 15점 정도씩의 작품을 해서 작품집 출간도 꿈꾼다.
일 욕심이 많아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순정만화계의 개척자 권영섭은 2009년 6월 3일, 세계 최초로 사단법인 <한국원로만화가협회>를 조직하여 회원들에게 떠밀려 네 번이나 회장을 연임하며 11년째 봉사하고 있다.

신문수, 윤승운 이정문 등 원로만화가 회원들과 함께 경남 ‘하동 야생차 축제’를 비롯해서, 전국 주요 도시의 축제 행사장에서 사인회를 하여 참관자들에게 추억과 기쁨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주간 <백세신문>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즐거움과 교양을 주는 만화를 원로작가 여섯 분이 번갈아 매주 연재하도록 했으며, 정부 예산지원을 받아 치매 예방을 위한 ‘실버 만화교실’ 운영과 매달 어린이집에서 유아들에게 만화교육을 하고 있다.

2019년에는 작고한 ‘고바우’ 김성환 선생의 ‘만화인 장’ 장례위원장으로, 고인이 ‘만화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받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도록 힘썼으며, 모두 살기 바빠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잊혀 가는 원로만화가들을 남모르게 찾아 안부를 묻고 다닌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희생하며 봉사하던 노 총무를 보며 영향을 받은 권영섭은, 내가 먹을 것만 있으면 결혼도 하지 않고 고아원 총무 같은 봉사자가 되겠다는 결심 때문에 결혼도 늦었다고 한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봉사하며 활동하겠다는 권영섭은, 만화계뿐만 아니라, 2004년에는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인연으로 애니메이션계 행사에도 초청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고 참석해서 만화계 원로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