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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편집자의 속사정 : 출판만화 단행본이 세상에 나오려면

이북과 웹툰의 시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 만화책을 읽는다. 만화 단행본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그 곁에는 만화 편집자가 있다. 여기 한 편집자의 소회가 있다. 만화 편집자는 어떤 고민과 고충이 있을까.

2021-04-25 최원



만화책 편집자의 속사정 : 출판만화 단행본이 세상에 나오려면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야 할 듯하다. 나는 한 대형 출판사의 시각 문화 전문 임프린트에서 만화 편집을 맡고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기회가 닿아 한국 웹툰과 일본 만화, 미국 그래픽노블, 프랑스 방드네시네를 두루 편집하는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만화규장각 독자라면 '편집자'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아마도 『바쿠만』이나 『중쇄를 찍자』에서처럼 만화가를 옆에서 지켜보며, 작품이 세상에 태어날 때 조력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생각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맡은 역할은 조금 다르다. 앞서 말한 편집자가 작가를 도우며 ‘세상에 없던 것’을  함께 만들어 간다면, 나는 같은 편집자라도 ‘세상에 태어난’ 웹툰이나 해외 만화, 그래픽 노블을 다듬거나 번역해서 종이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미리 말해 두지만, 이어질 이야기에는 작가와 다음 연재의 스토리를 가지고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다든지, 창작의 고통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져 연락을 받지 않는 작가를 찾아 나선다든지 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핑계 없는 무덤 없다'라는 속담처럼 저마다 나름의 고충은 존재하는 법.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만화책을 편집하며 마주쳤던 고난들과, 이를 수습했던 기억을 반추해 보려 한다.  


모두 너무 잘 알아서 더 힘들었던 만화책, 일본

내가 편집한 만화 중에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본 작품이다. 세미콜론이 만화 출판사에서 소위 큰손은 아니었던 관계로 조금은 마이너한 감성의 작품이 많았지만,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보석’들을 한국에 소개할 수 있었고 “이 회사 만화책이라면 믿고 산다.”라는 평가까지 듣게 되었다. (지금은 폐간된, 작가주의 중심의 한 일본 만화 잡지에 연재되었던 아저씨 코미디 작품은 한국에서도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 올해에는 드라마화가 된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항상 마이너한 만화만 맡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올해는 일본 만화의 아이콘 중 하나인 전설적인 마법소녀물을 완간한 참이다. 


 ⓒ 세미콜론

세계 최고 만화 강국의 바로 옆 나라라는 특성상, 원서를 사서 읽거나 팬심으로 직접 번역하기까지 하는 일본 만화의 편집은 다른 언어권 작품에 비해 쉬워 보이면서도 어렵다. 한 가지 쓴웃음을 짓게 한 기억이라면, 작품 속 인명이나 지명 번역과 관련한 것이 있다. 우리 출판사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는 한국 서브컬처에서 주로 통용되는 표기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런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에는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 외래어 표기법이, 기존 팬층이 많은 작품에서는 어김없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이것은 익숙함에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캐릭터의 이름이 왜 바뀌었냐며 분개하는 분들도 ‘네오 도쿄’('토쿄'가 아닌)에 대해서는 별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다.

옛 추억을 다시 선사하는 것이 중요한 이런 기획에서는 독자의 마음을 제일 고려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이 작품이 세대를 넘어 전해지고 신규 독자 유입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후로도 계속 지켜질,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원칙을 따르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텔레비전이나 교과서에서 사용되는 표기법을 보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는 자명했다. 좋은 디자인 팀, 번역자분과 작업한 덕분인지, 외래어 표기 외에는 크게 악평을 듣지는 않아 다행이다. 


오랜 역사와 오랜 팬을 가진 만화책, 미국

사실 내가 편집한 미국 만화는 딱 한 가지다. 그렇다. 바로 7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을 대표하는 그래픽 노블 중 하나인 ‘세계 최고의 탐정’ 시리즈다. (돈이 특수능력이신 그분 맞다.) 내가 담당하던 시기(2015~2016년)는 원저작사에서 자사 콘텐츠와 세계관의 영화화에 심혈을 기울이던 때여서, 미국의 신간 출간 일정을 따라가며 이 빅 웨이브에 올라타기 위해 노력했다. 대중문화 개방 전부터 수입되어 일본어로 된 의성어, 효과음을 식자하는 경향이 있는 일본 만화에 비해 미국 그래픽노블은 보통 효과음에 자막만 다는 편이고, 그래픽 '노블’로 불릴 만큼 대사의 지분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번역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에서 장수 시리즈가 쌓아 온 세월의 무게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 세미콜론


등장인물이 무심하게 내뱉는 대사 하나에 십몇 년 전의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만화책과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악당이 연관되어 있었다. 한국 팬덤의 깊이와 수준도 만만치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 하대와 존대를 잘못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천인공노할 대역죄였고, 경찰‘청장’과 경찰‘서장’ 중 어느 것이 옳은지도 장고를 해야 했다. 내 선배들이 편집했던, 그전까지 정식 출간된 모든 시리즈의 오역을 박제한 사이트를 발견했을 때에는 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은 공부뿐이었다. 덕심을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겠다는 마음으로, 구글과 국내외 팬사이트, 위키를 금과옥조로 삼고 검수를 해나갔다. 그렇게 노력한 덕분인지 내가 출간한 만화책은 오역 모음 사이트에서 오역 5곳 이하라는 성적표(?)를 받았고 아직까지 내 마음속의 자신작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홈그라운드지만 가장 부끄러운 만화책, 한국

혹시 이 글을 읽는 세미콜론 독자가 있다면 지면을 빌려 사과를 드리고 싶다. 이 글의 주제를 웹툰 편집에 한정하자면 제목을 ‘잔혹사’로 고쳐야 할 정도로, 우리 회사의 웹툰 중에는 유독 독자의 책장과 마음을 괴롭혔던 작품이 많았다. 1권을 내고 6년 동안 다음 권이 나오지 않았던 시리즈나, 연재 종료 후 3년 만에야 단행본화가 이루어진 작품도 있다. 


 ⓒ 세미콜론

웹툰을 종이책으로 출간하려면 보통 세로 스크롤 형식의 작품을 출판만화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작품에 따라 그대로 출간하기도 하지만, 한 페이지에 담기는 정보량이 비교적 적어 책의 분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변환을 고려한다.) 이 작업은 통상적으로 작가가 맡으며, 편집자는 지문의 교정, 책의 디자인, 체재, 서체를 결정하는 작업 등을 한다. 내가 맡았던 웹툰 만화책 중에 작가의 변환 작업이 문제가 되었던 작품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변호를 해 보자면 기약 없이 후속권이 늦추어졌던 작품은 이후 완결까지의 분량이었던 두 권을 동시 출간해 완간했고, 늦어졌던 만큼 양장판으로 고급화를 하거나 추가 장면을 하나라도 더 넣어서 웹툰 연재 시기의 독자라도 처음 보는 부분이 있도록 하려 했다. (물론 이런 콘텐츠 추가는 다른 회사에서도 하는 일이긴 하다.) 결국 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끝마치며

이 글을 쓰는 동안 쓰라린 기억이 계속해서 되살아나서 '이것까지 말해도 될까'하는 마음에 몇 번을 다시 고쳐 썼다. 돌이켜 보면 만화라는 콘텐츠의 영혼을 연성하는 연금술사는 아니지만, 한국 작가의 웹툰이나 언어의 장벽으로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외국 작품에 종이책이라는 새로운 몸을 만들어 주는 ‘슈퍼닥터 K’를 꿈꾸던 삶이었다고 그동안을 평가하고 싶다. 세계적 수준의 안목을 가진 한국 독자 덕분에 항상 조심스럽고 댓글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던 시간이 많았다. ‘종이책으로 만드는 것뿐인데 왜 이리 시간이 걸립니까?’ ‘공식이 왜 퀄리티가 더 구리죠?’ 같은 말에 마음이 꺾이다가도,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의 한 마디 호평을 위해 또 기꺼이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는 편집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