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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한 일본 만화업계

'만화 대국'으로 불리던 일본이 과거의 영광 속에 침잠하던 중 25년만에 다시 만화 시장 규모 최고액을 갱신했다. 이러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지금 일본 만화 시장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2021-04-26 이현석



3번째,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한 일본 만화업계


흔히들 일본 만화업계를 이야기할 때 ‘만화 왕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최근, 우울한 화제만이 열거됐다. 소자화(少子化)로 인한 시장의 축소1), 휴대폰 등장으로 인한 정보가치 변화2), 책이 팔리지 않는 출판 전반의 불황, 끊임없는 서점들의 도산과 폐점 소식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우울한 소식은 일본 출판만화 업계가 해외에서 누리던 위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해외의 출판사들이 이전같이 시장 안에서 일본 만화가 팔리지 않자 이전과는 적극적인 작품 수입 로비 공세를 하지 않게 되었다. 

 


△ 주간 소년점프 발매 부수 추이. 1990년대 중반까지 <드래곤 볼> 등의 인기로 600만 부를 훌쩍 넘겼지만, 이후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여기에 한국 웹툰이 일본에서 괄목할만한 인기를 끌면서 상대적으로 일본 만화업계의 침체는 더 눈에 띄게 되었다. 코미코(Comico), 라인 망가 등이 기반을 마련한 일본 웹툰 시장에서 작품 <나 혼자만 레벨업>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카카오 재팬의 플랫폼 픽코마가 놀라운 확장세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만화 업계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유통되는 만화형식, 한국식 웹툰을 연구하고 있다. 일본의 거대 전자 서적 유통업체들은 한국식 웹툰 콘텐츠에 대해서 관망하는 추세였으나, 픽코마 등의 성장세가 워낙 거세어 최근 분위기가 크게 환기되는 등 긴장하는 모양새기도 하다.  

  


△ 픽코마 분기별 거래액 추이 ⓒ 픽코마

△ 픽코마에서 단독으로 연재 중인데도 월간 매출이 1억 엔을 돌파한 초 인기작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 최근 소설 번역판도 카도카와에서 출판됐다.


△ 일본 거대출판 기업인 KADOKAWA가 야심차게 실시 중인 세로 스크롤 만화-웹툰 콘테스트. 거의 모든 자사 잡지편집부가 참가하는 초대형 콘테스트다.

일본의 거대 출판 그룹인 카도카와(KADOKAWA)가 세로 만화-웹툰 공모전을 대규모로 실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부분의 만화 출판편집부가 이 콘테스트 심사에 참가하며, 참가부서를 살펴보면 사내에 웹툰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연구부서가 이미 설치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일본의 유명 게임회사 중 하나인 사이게임즈가 만든 만화 매체 사이코미가 웹툰 형식을 과감하게 실험하여 다수 작품을 선보인 것도 이러한 이유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2020년, 일본 만화시장의 괄목할만한 성장세에 완전히 반전된다.


일본만화 시장, 새로운 황금기를 열다

작년 2020년, 일본 만화 시장 규모는 1995년 이래 최고액을 갱신하였다. 전자와 종이매체, 단행본과 잡지매출을 합산한 만화 시장 규모가 6천억 엔을 넘겨 6,126억 엔에 달했다.3) 특히 디지털-전자 분야가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서 31% 늘어난 3420억 엔을 기록했다.4) 일본만화를 규정한다고 봐도 좋을 만화잡지 분야는 하강세가 여전히 뚜렷한 편이다. 전년 대비 13%가 줄어든 627억 엔을 기록했다. 단행본 부분 매출 최고액이 1995년 5864억 엔이었는데, 당시는 잡지가 3357억 엔으로 거의 60%를 차지한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감소 폭이다. 25년 만에 1/5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런 대호황의 원인은 다각도로 분석해볼 수 있다. 코로나 19 판데믹 영향으로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진 점이나, ‘망가무라’ 등 거대 해적판 사이트가 단속되면서 해적판 독자가 시장으로 흡수된 점도 호황의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에 일본의 미디어 전문 비평지 '츠쿠루(創)'는 2021년 5월호 특집 기사에서 “일본만화업계는 제3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논평했다. 제1시대는 주간소년만화 잡지가 창간된 1959년부터다. 제2의 시대는 그 10년 후인 2005년경 성인향 만화잡지가 속속 창간된 시기를 일컫는다. 즉, 지금은 디지털 만화의 본격적인 대두로 인한 제3의 시대-제3의 중흥기, 황금시대가 열렸다고 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가장 큰 요인은 역시 <귀멸의 칼날>의 대히트가 있다. 애니메이션의 히트와 함께 단기간에 기록적인 판매고를 기록한 이 작품은 일본 만화시장을 강하게 견인하면서 극히 단기간에 단행본 전 23권, 1억 2000만 부 판매고를 올린다. 아직 애니메이션 2기가 공개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판매고가 어디까지 신장할지 상상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속속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초히트작들

하지만 이 작품만이 아니다. 단일 작품의 싱글 히트만 놓고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간 일본 만화산업계를 보면 이런 히트작이 무수히 많았다.  현재 새로운 황금시대라 자평할 정도로 업계 분위기가 끓어오르는 것은, <귀멸의 칼날> 이외에도 작품 내적/외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업계에 속속 등장하고 독자에게 선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 1991~2019기간동안 2년 간격의 일본만화 시장 추이. 2014년을 기점으로 초록색, 즉 디지털 분야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다.

필자가 생각하는 지금 일본 만화 시장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주술회전>, <체인소 맨>, <스파이X패밀리>, <괴수8호>, 그리고 <불멸의 그대에게>.



△ 슈에이샤의 <주술회전>


△ 고단샤의 <불멸의 그대에게>

현재 많은 화제가 <귀멸의 칼날>에 쏠려있는 느낌이지만 일본 현지의 서점 등을 가보면 작품 <주술회전>의 인기는 대단하다. 연재 단 2년여 만에 누적 발행 부수 1,000만 부를 넘긴 대 히트작이다. 이 작품의 연재 매체는 <귀멸의 칼날>과 같은 주간 소년 점프다. <귀멸의 칼날> 연재가 끝난 지금, <주술회전>은 소년 점프를 강력하게 견인하고 있다. 

슈에이샤의 디지털 앱 만화잡지에 격주간으로 연재되면서 폭발적 인기를 얻는 또 다른 만화가 <스파이X패밀리>이다. 2000년 데뷔한 작가 엔도 타츠야가 만들어 내는 이 만화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디지털 매체인 ‘점프 플러스’의 지위 격상에 큰 역할을 했다. 필자는 <주술회전>보다 이 만화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는 이 작품은 장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에 이미 단행본이 파격적인 부수로 팔리고 있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화가 되기 전, 단행본 7권째에 1,000만 부 판매를 달성한 것은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런 기록은 <명탐정 코난> 이래로 처음이다. 둘째는 이 작품이 격주로 연재되고 있다는 점이다. 연간 최대 4권까지 단행본을 만들 수 있는 주간체제에 비하여 격주 체제는 아무래도 연간 2, 3권 정도를 내놓는 게 한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는 점이다. 



 △ 슈에이샤의 <스파이X패밀리>

숫자만이 아닌 완성도에서도 수확 거둔 일본 만화계

일본 만화업계 제3의 중흥기는 이러한 천문학적인 흥행 측면 만이 아니라, 만화의 표현영역 확대와 내면적 완성도 면에서도 착착 큰 수확을 올리는 중이다. 

도저히 소년점프 지면에서 연재된 만화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내용 전개와 한계 수위를 넘나드는 표현을 보여준 만화 <체인소 맨>은 특히 마지막 2개 회차에서 파격적인 내용을 다뤄 마치 일본 만화업계 최고 성장기인 1980년대의 야성을 되돌이킨 느낌을 주었다. 필자는 일본 만화가 가진 가장 가공할 힘은 소년-청소년기에 걸쳐서 느끼는 자신의 성적/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광기에 있었다고 보는데, 이것이 현재의 저성장 국면을 맞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거의 사장되어 왔다. 

<체인소 맨>은 이런 광기를 다수의 가치관이 다른 독자가 기다리는 지면에 선보이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국 대성공을 거두었다. 식인, 존속살해, 난해한 스토리 전개와 자못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의 파격적인 만화 문법 에도 불구하고(영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단행본 11권 만에 무려 930만 부가 넘는 누적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 슈에이샤의 <체인소 맨>


내적 네러티브 전개에서 큰 진보를 보인 것은 이러한 슈에이샤 작품들 만이 아니다. 다른 여타 작품들도 많지만, 고단샤의 소년만화 잡지 ‘주간 소년 메거진’에 실리고 있는 작품 <불멸의 그대에게>도 지금 일본 만화 황금기를 상징하는 간판 작품으로 불릴 만하다. 작품의 수려한 그림이나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스토리 전개와 인간의 삶과 현대사회에 대한 독특한 고찰도 일품이지만,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일견 난해하며 흥행성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품”을 흥행 최전선이라 불릴 만한 자사 간판 소년 잡지에 싣는 편집부의 대담함과 용기다. 라이벌과의 전투나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전개 등과는 거리가 먼 작품인데도 대담하게 메인 지면에서 실험에 들어갔고,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은 2021년 4월까지 15권 발행, 누계 300만 부를 넘어서고 있다. 


인기의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내용적인 면이다. 일단 집중력 있는 이야기 전개가 특징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주인공 인물의 시점 위주로 간결하게 감정선을 잡아가고, 다른 서브 캐릭터에 깊이 파고들지 않고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일본 주간 연재만화들은 악명높은 장기연재를 통해서 주변 서브 캐릭터들의 서브플롯을 장대하게 발전시켜 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소재를 확립, 세계관을 더욱 크게 벌려 나가는 게 장기였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스마트 폰을 통해서 만화를 빠르게 소비하는 요즘 독자들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 스마트 폰이 유년 시절부터 일상에 당연히 존재하는 환경에서 살아온 지금 독자들은 빈지 리딩(Binge Reading), 즉 한 번에 많은 에피소드 분의 이야기를 쌓아 두고 빠르게 소비하는 것을 즐긴다. 이들에게는 일본 주간 만화잡지의 전개 페이스도 느리다. 따라서 기성 작품들이 빠르게 이들에게서 ‘도태당한’ 것이다. 최근 히트작들은 작품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결말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간다는 느낌이 상당히 강하다. 또한, 악역으로 등장하는 상대의 이면을 조명하여 아군으로 편입하는 등의 스토리 전개도 과감하게 버려, 초반 플롯 상에서 독자가 상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을 지향하고 있다. 물론 반전 등의 요소를 포기했다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는 작화 측면이다. 필자는 지금 일본 시장이 나름대로 디지털 만화에 적합한 작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며, 이 연구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상기 열거한 만화들을 살펴보면 이전과는 다르게 과도한 톤 워크나 하나의 컷에 밀도를 가득하게 채우는 것이 자제된 작화 경향들을 보인다. 컷의 분할이나 시선 유도도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되는 편이다. 특히 휴대폰 지면을 대전제로 한 점프 플러스 연재만화들은 이러한 경향이 극히 두드러진다. 

특히 위에 설명한 작품들 중 <주술회전>에 대해선 한국의 일본만화 팬이나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독자들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다’며 히트에 큰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의 흥행은 애니메이션의 덕을 크게 보았고, 만화의 작화적 완성도나 이야기 플롯은 특이할 것이 없는데 만화 자체가 왜 인기를 얻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요 작품들을 놓고 보면,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일본 만화가 변화하는 한가운데 서 있다. 제3의 중흥기를 맞은 일본 만화가 역동하고 있다. 



1) 출산율 저하로 인한 유소년 인기의 뚜렷한 감소는 문화산업의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인기 특촬 시리즈 [가면라이더]는 완구판매 대상이 이미 그 어린이 시청자의 보호자나 남성 배우팬들을 노리는 것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2) 가령 예를 들어서, 직장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끼기 위해서는 아침 출근길에 읽는 스포츠 신문은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제 휴대폰/스마트 폰에 의해서 이러한 정보들은 거의 무료로 손에 들어오며 이는 기존의 일간신문들과 가십성 스포츠 지, 사진 주간지등의 몰락을 가져왔다. 
3) 출처 : 출판과학연구소出版科学研究所
4) 일본의 경우, 디지털매출에서 나온 금액을 역산하여, 책으로 판매했을 경우 00부라는 방식으로 흔히 발표한다. 현재 보도되는 만화책 단행본들의 부수는 대부분 이렇게 디지털 매출을 역산해서 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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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

레드세븐 대표
前 엘세븐 대표
前 스퀘어에닉스 만화 기획·편집자
만화스토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