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 일본 출판만화 제3의 중흥기 도래
한동안 일본만화는 침체기였다. ‘애정으로 보는 만화’ 외에 신규 독자의 유입은 적었고, 소위 ‘원-나-블(원피스, 블리치, 나루토를 일컫는 말.)’외에 새로운 만화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엔 디지털 전환이 느리다는 점, 소위 ‘고인물화’로 인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 편집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신작을 발굴하고 새로운 작가를 키워내기보다, 대작을 오래 유지하다 끝내 작품을 망치고야 마는 고집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 말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적어도 2019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2019년 이후 일본만화는 반등을 시작한다. 일본 만화시장 규모는 2016년 4,454억엔(한화 약 4조 5천억원) 규모에서 2017년 4,330억엔(한화 약 4조 3,300억원) 규모로 줄었다. 2018년에는 소폭 상승한 4,414억엔(한화 약 4조 4천억원)을 달성했으나 2017년보다 적은 규모였다. 물가상승률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 최근 5년간 일본 만화시장 규모(2019년이 디지털이 출판을 역전한 첫 해), 출처: 일본출판과학연구소
그러나 2019년, 반등이 일어난다. 4,980억엔(한화 약 5조원)을 달성하며 10% 이상 급성장했다. 이 흐름을 이끈 것은 단연 디지털이었다. 우리나라의 웹툰과 달리 일본의 디지털만화는 주로 e북 등으로 소비되는, 디지털 출판에 가깝다. 2019년의 이런 성장을 바탕으로 2020년 일본만화는 6,126억엔(한화 약 6조 1,500억원)을 달성했다. 이건 일본만화의 최대 황금기로 불리는 1995년 5,874억엔(약 5조 9천억원)을 상회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일본 만화가 이렇게 반등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작용한 탓이 크다. 어느날 갑자기, 우연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위기라는 인식 하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일본 만화계가 노력한 결과에 여러가지 우연이 겹친 덕이다.
그 시작점에는 2018년 여름에 있었던 일본 최대의 불법만화 사이트, 망가무라(漫畵村)의 폐쇄와 이어진 2019년 운영자 검거가 있었다. 일본의 컨텐츠 해외 유통 촉진기구(Contents Overseas Distribution Association, CODA)에 따르면 2017년 9월부터 2018년 3월까지 6개월간 망가무라의 접속건수는 6억건이 넘는다. 월 평균 1억명이 넘는 사람이 망가무라를 이용한 셈이다.
심지어 망가무라는 ‘망가무라 Pro’라는 유료 정액제 모델을 내놓고 남의 콘텐츠로 사업을 벌이는 대담한 일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일본만화가협회는 물론 일본 국회까지 나서 사태의 심각성을 피력했고, 2018년 3월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ISP)에 의한 차단을 확대하며 먼저 일본내 접속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통신비밀유지 침해가 우려되지만, 더 이상 방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내비쳤다. 이 당시 국가권력에 의한 차단에 대한 우려가 나왔던 건,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 ‘일본판 테러방지법’으로 불리는 공모죄 신설 등 여러 이슈가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국회뿐 아니라 여러 변호사, 작가들이 나서 서버를 제공하는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에 망가무라의 운영자를 특정하기 위한 자료와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이 줄이었다. 이후 연방법원이 클라우드플레어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인용하면서 수사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019년 7월, 망가무라의 운영자 호시노 로미(星野路実)가 검거되었고, 이후 등장한 ‘제 2의 망가무라’들 역시 차단되었다. 이 당시 클라우드플레어의 정보 공개가 수사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클라우드플레어가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기도 했다.
이렇게 최대의 불법만화 사이트를 차단한 결과는 일본 만화의 디지털 매출액 증가로 이어졌다. 불법-디지털로 만화를 감상하던 사람들이 유료 구매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긍정적 효과로 꼽힌다. 실제로 일본 현지에서도 체감이 될 만큼 매출액이 증가했고, 결과적으로 10%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했고, 동시에 디지털이 출판을 역전하는 역사적인 첫 해가 됐다. 이후 일본만화계의 디지털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이는 동시에 웹툰에 대한 관심과 폭발적 매출 증가의 단초가 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과 “귀멸의 칼날” 효과
물론 망가무라의 폐쇄와 운영자 검거가 일본 만화의 고속성장에 영향을 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단순이 그것만으로 매출증가가 이렇게 폭발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엔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크게 작용했을 개연성이 높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가 일본의 불법만화 사이트 폐쇄 시기와 맞물리면서, 유료로 디지털 만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실제로 2020년 픽코마는 분기마다 자신이 세웠던 역대 최다 매출 기록을 갱신하며 2020년 역대 최대 매출액을 달성했고, 단 한번도 1위를 빼앗긴 적 없던 라인망가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일본 웹툰시장 1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시장이 격변하면서, 일본 만화시장에는 더없는 호황이 찾아왔다. 비대면, 온라인 콘텐츠 유통이 크게 늘면서 디지털만화 역시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했다. 2019년 대비 20% 가까운 성장이라는 경이로운 성장률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당연히 출판 매출액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출판에 비할 바 없이 디지털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단연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문화의 확산 때문으로 보인다.
코로나19는 분명 인류사에 남을 큰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대면 콘텐츠로 각광을 받은 만화는 전환점이 됐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비상사태가 연이어 선언되는가 하면, 확진자가 크게 늘면서 서점 방문객도 줄었던 2020년을 지나며 집 안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만화가 각광받았다.
△ <귀멸의 칼날> 극장판 포스터. 출처: 슈에이샤
이 시기 직전, 최고의 인기작이었던 <귀멸의 칼날>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히트작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일본의 출판과학연구소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만화가 많이 판매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지난해(2020년) 사회현상이 될 정도로 히트한 <귀멸의 칼날>의 성공이 (일본만화 매출 상승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난해 종이 만화책 판매가 전반적 증가세를 보였는데, <귀멸의 칼날>을 사려고 서점을 방문한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2001년 지브리 스튜디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운 역대 일본영화 최고 수익인 316억 8천만엔을 넘어 400억엔을 향해 가는 현재 상황으로 증명된다. 말 그대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시장을 먹여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 잡지사의 치열한 쇄신, 가공할 신작들의 효과
이런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이미 독자들이 10년 넘게 질리도록 보고 있던 작품을 또다시 사서 볼 일은 없다. 서두에 언급한 일본 만화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어 온 문제들을 쇄신하기 위해 슈에이샤(集英社)를 비롯한 일본 만화계는 꾸준히 체질개선에 나섰다. 일본 만화 편집부는 일단 성공한 작품이 나오면 서사를 크게 만들고, 길게 이어나갈 수 있는 작품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 섞인 질문을 받곤 한다. 실제로 <테니스의 왕자>나 <따끈따끈 베이커리>의 사례가 대표적인 문제로 꼽히곤 한다.
하지만 2014년 <나루토>가 완결되고, 2016년 <블리치>가 완결되면서 트로이카를 이루던 ‘원-나-블’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 홀로 남은 <원피스>는 여전히 1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작품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길게 연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2012년 연재를 시작한 <하이큐!!>는 2010년대 인기 절정을 맞이하고 2020년 완결했다. 45권 완결은 인기 절정인 만화 치곤 상당히 짧은 편에 속한다.
이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지는데, 2018년 연재를 시작했던 <체인소 맨>은 2020년 12월 완결됐다. 이 작가의 전작은 <파이어 펀치>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연재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귀멸의 칼날>은 이렇게 기획되어 말 그대로 역사의 한 챕터를 작성했다.
이 변화는 당연히 ‘원나블’의 시대가 길어지면서 일본 만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데서부터 출발한다. 독자는 장르에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작가는 독자의 예측을 깨는 파격을 선보이고 싶어한다. 이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이야기는 망가지고,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작품, 즉 IP에 갖는 애정이 식어버리는 효과가 나타난다.
일본만화 편집부는 이 지점에 총력을 다해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대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천천히 정리해 나가는 한편, 새로 등장한 초대박 작품 역시 빠르게 완결시켰다. <귀멸의 칼날> 역시 23권으로 완결됐다.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만화 중 하나인 작품이 단 23권으로 완결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원피스>는 100권을 향해 가고 있고, <나루토>는 72권, <블리치>는 74권으로 완결됐다.
일본 만화의 대 부흥기는 여러 우연과 함께 편집부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살린데서 찾아왔다. 마침 최대 규모의 불법유통 사이트가 폐쇄됐고, 정부의 정책이 강화되었다. 거기에 체질개선을 하고 있던 일본 만화 출판부의 발걸음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면서 대전환의 시점을 맞게 된다.
일본만화는 출판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시장이지만, 그보다 더 큰 시장이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 산업이다. 일본 만화시장의 규모는 6조원 정도지만, 일본 애니메이션협회에 따르면 2019년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10조원을 넘어섰다.
여기에 미디어 환경이 통합되고, 디지털 출판이 늘어난 시점과 본격적인 출판시장의 전환기가 맞물린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만화책을 사서 보고 TV나 모니터 앞에서 애니메이션을 감상했다면,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만화책을 읽고 스마트폰으로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시대가 열렸다.
결국 만화 단일 콘텐츠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과의 연결성, 폭발성을 생각해 작품 기획 단계부터 조정하는 작업이 수반될 것으로 보인다. <진격의 거인>의 경우가 그랬고,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귀멸의 칼날>과 <주술회전> 모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살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도약이 가능했다.
지금까지는 일본 내수시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는 분명 글로벌의 시대가 온다. 소니는 북미의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및 미디어 서비스 ‘크런치롤(Crunchroll)’을 2020년 12월 약 12억달러(약 1조 3,480억원)에 인수했다. 크런치롤은 네이버웹툰의 <신의 탑>, <갓 오브 하이스쿨>, <노블레스>의 북미 배급사기도 하다.
일본 만화는 만화+애니메이션으로 IP확장을 통한 정면승부를 펼칠 계획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보다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글로벌 애니메이션 시장은 어쩌면 아직은 니치 마켓(Niche Market, 틈새시장)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니치 마켓은 거꾸로 말하면, 거대한 가능성을 품은 시장이다.
때문에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네이버웹툰, 카카오페이지등의 글로벌 플랫폼과 일본 만화가 정면승부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측면에서, 일단은 웹툰이 한 발 앞서 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새 역사를 쓴 일본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본격적인 2라운드는 글로벌 시장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