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 판타지물을 통해 본 청년 세대
게이머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게임 세계에 들어가는 상상을 해보았으리라. 웹소설/웹툰 분야에서 주목받는 장르 중 하나인 게임판타지는 바로 이런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이 장르의 작품들에서는 대개 평범했던 인물이 갑작스럽게 게임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 세계의 플레이어가 된다. 그들은 게임 세계의 규칙을 숙지하고, 퀘스트를 받아 하나하나 이어간다.
그러나 비단 게임판타지가 아니더라도, 최근의 판타지 장르 작품들에서는 게임의 세계관을 다수 차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건, 게임 세계와 플레이어만 있던 구도 속에 새로운 자리가 하나 더 생겨났다는 것이다. 바로 게임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시청자로서의 ‘성좌'다. 이른바 ‘성좌물’이라 불리는 이 장르의 작품들에는 게임 세계뿐만 아니라 게임 세계 너머에서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시청자, ‘성좌’들이 존재한다. 웹소설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와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이 ‘성좌물’의 대표적 작품이다.
△ gandara 작가의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성좌물 작품의 주인공들은 게임 세계 자체나 그 이면의 거대 권력이 아니라 서로 경계하며 병존하는 수많은 ‘성좌’를 마주한다. 주인공은 세계의 규칙을 익히고 퀘스트를 완수하는 동시에 자신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성좌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퀘스트 완수 보상보다도 더 큰 혜택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성좌들은 단지 주인공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처방식에 따라 그에게 돈을 후원하기도 하고 특별한 능력을 주기도 한다. 마치 유튜브 스트리머들을 대하는 구독자처럼 말이다. 게임판타지가 게임 그 자체를 기반으로 한다면, 성좌물은 게임방송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런 세계의 모습은 기존에 통용되어 왔던 게임 세계와 사뭇 다르다. 누구나 똑같이 시작해 노력하는 만큼 보상받는 것이 게임의 가장 큰 미덕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최근 판타지 장르에서 그리는 세계는 그렇지 않다. 게임 안에는 나름의 규칙이 존재하지만, 규칙 너머의 특혜가 더 크고 달콤하다. 이 세계 안에서 레벨업은 노력만으로 일구어내는 것이 아니라 게임 너머의 성좌들과의 거래 속에 얻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 싱숑 작가의 <전지적 독자시점>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성좌물은 청년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얻고 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경우 웹소설 기준 2~30대의 구매율이 60%를 넘으며, 주로 남성에게 인기가 많다.1) 누구보다 ‘공정'에 민감하다고 알려진 청년층 사이에서 이러한 설정이 인기를 얻는 건 왜일까.
이는 실제 청년 세대가 현실을 인식하는 심리적 태도와도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2017년 인터뷰를 통해 청년 세대의 현실 인식과 태도에 대해 논증한 한 논문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스무 명의 청년을 인터뷰한 이 연구에서는 청년들에게 있어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로 '변화 무기력'을 꼽았다.2) 청년들이 사회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참여자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세상이 바뀔 것 같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다. 우리 세대에서는..."
"싸우는 과정에서 익숙해져 있는 패배감. 이렇게 해도 안 바뀐다는 생각이 의견 표출을 막는다" 3)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 행동적 결과에 대해 이 연구에서는 "사회의 변화를 위한 행동에 참여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 내에서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여겼"4)다고 언급한다.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 회의를 느낀 청년들이, 자신이 스스로 통제 가능한 개인적 영역에서만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변화는 바로 '적응'이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청년들은 스스로를 통제한다.
이런 청년들의 모습은 판타지 장르의 주인공과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이세계(異世界)는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닥쳐오는데, 새로운 세계에 질문하는 자는 즉시 처단된다.5) 중요한 건 세계의 규칙을 단번에 파악해 규칙 너머의 존재들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하며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해 그 세계의 승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실 이런 서사가 ‘사이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다. ‘힘'에 의해 기존의 불평등을 뒤집어 낸 새로운 불평등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해 최강자로 등극하는 주인공의 이러한 모습을 청년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면, ‘성좌'는 청년들이 있는 현재의 자리라고도 볼 수 있다. 성좌는 신이기는 하지만 세계에 직접 참여하는 플레이어가 아니고, 능력이 있지만 혼자서는 발휘할 수 없다. 그들은 플레이어에게 돈과 능력을 후원하면서 플레이어에게 통제력을 발휘한다. <전독시>에서 성좌들이 플레이어들을 주의 깊게 보고 후원하며 배후가 되는 건, 성좌들의 생존방식이다. 스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성좌들이 플레이어를 내세워 자신의 영향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결국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다.
무언가를 스스로 계획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울수록 사람들에겐 ‘통제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신의 주변 환경을 스스로 계획하여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곧 통제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상 현대 사회의 청년들은 심각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치솟는 집값과 물가에 너나 할 것 없이 투기와 투자를 일삼는다. 이 모든 것이 안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상황과 겹쳐 볼 때, 세계관 최강자인 주인공들이 어렵고 위험한 퀘스트를 시원시원하게 헤쳐나가는 이 강인한 ‘힘’의 모습은 일견 청년들이 갈구하는 욕망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 서사가 ‘힘'의 논리인 이상, 그 욕망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2) 안혜정·안정민·서예지·정태연, 「한국 청년세대의 체제정당화: 의미 불일치 경험과 그 심리적 결과를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31권 4호, 2017, 261쪽
3) 위 논문, <표4>, 262쪽
4) 위 논문, 263쪽
5) <전지적 독자 시점> 2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