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 숨어있는 함정 피하기 (1) : 불리한 계약과 불공정한 계약
여기 처음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게 된 한 만화가가 있다. 이 만화가는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출판사로부터 10장짜리 계약서 초안을 받고, 내용을 확인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안내를 받았다.
만화가는 계약서를 읽어 보고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다른 작가들에게 계약 소식을 알렸을 때, 바로 사인하지 말고 꼼꼼하게 읽어보고 수정할 내용은 수정한 다음 신중히 계약하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모르는 내용을 물어보라고만 했지 작가가 원하는 조건대로 고쳐줄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내가 사인하기 전에 계약서를 수정할 수 있을까? 계약서에는 모르는 법률용어가 가득해서 읽어보고 이해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배포하고 있다고 해서 구글링을 통해 다운받았지만, 표준계약서의 내용과 실제 계약서의 내용이 너무 달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교해 보고 고쳐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계약서 초안을 만드는 권력
만화계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체, 더 넓게는 콘텐츠 창작자들과 사업자(여기서는 흔히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유통업자, 제작자, 중간 에이전시 등을 지칭한다) 사이의 계약에서 창작자가 아닌 상대방이 계약서 초안을 만드는 관행은 뿌리 깊게 업계에 자리 잡고 있다.
놀랍게도 창작자들조차 자신이 계약서를 직접 만들 필요도, 그럴 권리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기도 한다. 계약 미팅을 하기 전 표준계약서를 토대로 계약서 초안을 미리 만들어 보라고 조언하면 “그건 상대방이 해야 할 일이다. 나는 계약서를 보고 틀린 내용이 없는지 검토만 하면 된다.”라고 답하는 창작자들이 의외로 많다.
근로기준법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 근로계약과는 달리 저작권 계약은 당사자 사이에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자유롭게 계약 조건을 설정할 수 있다. 법률용어로는 사적 자치, 계약 자유의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느 한쪽이 계약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사적 자치의 원칙은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합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출처 : 두산백과)
일반적으로 계약서 초안을 만드는 쪽이 완성된 초안을 검토하는 쪽에 비해 협상에서 유리하다. 상대방이 계약과 법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초안 작성자가 교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문구를 어려운 법률용어 사이에 끼워 두거나 계약의 실질과 맞지 않는 계약 형태를 선택하는 일은 거래 전반에서 종종 일어난다. 전혀 창작에 관여하지 않은 출판사나 에이전시가 작가에게 공동저작 계약을 요구하는 사례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창작자가 계약서 초안을 만들어 간다고 해도 상대방이 자기 양식을 써야 한다며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방은 전문적으로 저작권을 다루는 기업이므로 계약서 초안을 만들어야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모든 작가에게 같은 계약서 양식을 적용해야 관리하기도 편하다. 그런 이유에서 사업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일정한 형식의 계약서를 미리 만든다. ‘약관’이라고도 하는 이런 형태의 계약은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이하 ‘약관법’)이라는 특수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약관법에서는 약관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작성하여야 하고, 약관의 중요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며, 이를 위반한 경우 그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약관법 제3조 제1항 내지 제3항).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같은 법 제5조 제2항), 신의성실을 위반하여 공정성을 잃은 조항,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하거나 고객이 계약의 거래 형태 등 관련된 모든 사정에 비추어 예상하기 어려운 조항, 계약의 본질적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은 무효이다(같은 법 제6조 제1, 2항).
불공정한 계약과 불리한 계약의 구분
필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자문 변호사로 예술인 신문고의 신고 사례를 자주 접한다. 예술인 신문고에서는 예술인 복지법 제6조의2에서 정하는 불공정행위의 신고를 받아 처리하는 일을 주된 업무로 한다. 만화가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창작자가 신문고의 문을 두드리는데, 그 중 ‘불공정한 계약’과 ‘자신에게 불리한 계약’을 혼동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앞에서 본 약관법에서도 ‘공정성을 잃은 조항’과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을 구분하듯이, ‘불공정’과 ‘불리’는 법적으로 같은 뜻이 아니다. 일단 계약이 성립하면 대등한 당사자 간에 충분한 검토를 거쳐 합의했다고 추정하므로 어느 한쪽에 불리한 조항이 있어도 유효하다. 반면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당했다면 예술인 복지법의 불공정행위가 될 수도 있고 계약 전체가 민법 제104조에서 정하는 불공정한 법률행위로서 무효가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창작자들이 ‘어떤 계약 조항이 창작자에게 불리하므로 불공정하다’는 논리를 펼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협상 가능성이 없었거나 정보가 부족해 불리한 계약에 어쩔 수 없이 합의했으므로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창작자들은 전통적으로 저작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통에 필요한 자본과 정보를 기획·제작·유통업자들이 독식함에 따라 거래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창작자와 기획·제작·유통업자 사이의 계약에 무조건 위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업계 전반에서 계약의 구속력과 안정성이 흔들리고 기획·제작·유통업자들이 창작자에게 계약서 초안을 검토하고 협상에 따라 계약서를 수정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부당하게 피해를 볼 위험이 있다.
△ 대법원 2013. 7. 25. 선고 2012다17547 판결 중 일부
이런 이유로, 불공정 계약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때는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을 체결할 때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정을 고려하고, 문제가 되는 조항만을 따로 떼어서 보지 않고 전체 내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대법원 2013. 7. 25. 선고 2012다17547 판결, 대법원 2020. 9. 3. 선고 2017다245804 판결 등). 예컨대 작업이 급하다는 이유로 먼저 일을 시키고, 작업이 완료된 후 창작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 조건을 강요하는 경우는 상대방을 선택할 가능성, 협상 가능성이 없거나 극히 제한되는 불공정한 계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계약서를 검토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인만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어떨까? 이럴 때도 곧바로 불공정하다고 판단하지 않고 창작자가 당시 계약 상대방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를 따진다. 다른 사정이 없다면 창작자가 그런 부당한 요구를 받았을 때, “당신과는 계약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약 상대방을 선택할 수 없고 계약을 거절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신인이라 내 작품을 출간해 줄 곳을 찾기 어려웠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약서를 보는 눈 기르기
결국 만화가를 비롯한 창작자들은 계약서 초안을 만들 수 없고 사회 구조적으로 상대방과 대등하게 협상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음에도, 일단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면 개별 조항이나 전체 계약의 무효를 주장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계약서 사전 검토가 중요하다. 계약서를 효과적으로 검토하고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협상을 하려면 저작권 계약의 기본적인 구조와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저작권 계약은 한마디로 말하면 “저작권자가 상대방에게 저작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양도, 설정, 이용 허락의 방법으로 이용하게 하고 그 대가로 정해진 금액을 지급받거나 수익을 분배받는” 계약이다. 내가 받은 계약서를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면, 그중에서 ‘내가 주는 권리’와 ‘그 대가로 받는 돈’과 관련된 조항을 전부 찾아내야 한다. 당사자 간의 주된 권리 의무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나면 나머지 조항을 이해하기도 더 쉽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저작권을 2차적 저작물 작성권(해외 판매를 위한 번역, 타 매체로의 개작 등 2차 사업화에 필요한 권리)을 포함해 전부 양도하는 내용을 확인했다면 그 대가로 기본 저작권료뿐만 아니라 2차 사업화에 대한 대가, 2차 사업화로 창출한 수익에 대한 분배 권한이 있는지 등을 다각도로 살펴야 한다.
(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