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어시스턴트 : 전업 어시스턴트의 이야기
만화는 만화가 혼자 그리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하는 작가도 드물지만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곁에서 자신을 보조할 보조작가들을 둔다. 과거 출판만화 시절에는 만화가 밑에서 이른바 ‘열정 페이’를 바탕으로 만화를 배우는 문하생이 있었다. 문하생들은 한 가지에 특화되기보다는 이런저런 일들을 전부 도맡아 하는 ‘만능 도우미’에 가까웠다. 하지만 웹툰의 시대에 접어들고 웹툰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팀을 꾸려 분업하는 체제가 생겨났다. 작업 과정을 세분화하여 펜선, 채색, 배경 등 한 파트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어시스턴트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임시로, 만화가가 되기 위해 어시스턴트를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어시스턴트 일을 전업으로 하는 ‘전업 어시’가 생겨났다. 나는 전업 어시스턴트다.
내가 어시스턴트가 된 것은
내가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미대 입시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으며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복직을 희망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와중 가까운 지인이 원고 작업을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웹툰 쪽 일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화를 좋아해서 즐겨봤고, 디지털 원고 작업은 재택근무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어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나도, 나를 고용했던 작가도 ‘어시’에 대해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그때의 나는 대책 없이 목표한 분량을 마치는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가장 중요한 ‘얼마를 받고 얼마큼을 일해야 하는지’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처음 맡게 된 일이니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려고 우직하게 작업했던 그 작품은 연재 조기 종료로 허탈하게 끝이 났다. 보수는 적은데 업무량은 넘쳐나고 제대로 된 성과는 없으니 보수도 괜찮고 성취감도 있었던 예전 직업이 그리웠다.
하지만 씁쓸한 것도 잠시, 내 나름의 데뷔작을 좋게 봐주신 다른 작가님과 함께 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계속 일하니까 다른 작품 의뢰도 점차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명 작가분의 작품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이쪽 업계에 완전히 발붙이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된 시장조사를 했다. 그제서야 내 인건비가 내 경험과 실력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나마 조금씩 올랐던 원고료와 그 밖의 인센티브가 있었기에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초짜였던 나를 믿고 일을 맡겨 주신 작가님들 덕분에 웹툰 시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기에 후회는 없다.
과거와 달라진 어시스턴트 시장 : 전업 어시스턴트의 탄생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업 어시스턴트’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시스턴트는 만화가가 되기 위한 실력을 쌓기 위해 거쳐가는 ‘과정’이나, 당장 수입이 없으니 부수적으로 하는 ‘아르바이트’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많은 어시스턴트들이 자주 일을 그만두었다. 자기 작품을 해야 해서, 혹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한 작품에서도 표기되는 어시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나는 작가로 데뷔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처음부터 어시스턴트 일을 쭉 할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계속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시간이 흐르며 웹툰 시장은 점점 성장해 어시스턴트의 처우도 좋아졌다. 그렇게 나는 경력이 쌓이며 어시스턴트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4년 차 전업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웹툰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웹툰이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웹툰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유명 플랫폼에서 연재할 수 있는 기회는 지망생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기 때문에 웹툰 ‘작가’ 시장은 레드오션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작가들을 이렇게 넘쳐나는데 그들을 보조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본다면 진짜 블루오션은 웹툰 ‘어시스턴트’가 아닐까? 더군다나 최근에는 아예 팀을 꾸려서 작업 공정을 세분화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개인 작가가 어시스턴트들을 모아 팀을 꾸리는 경우도 있지만, 스튜디오처럼 회사를 설립하여 팀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작가가 주는 대로 받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회사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여러모로 어시스턴트로 일할 수 있는 자리는 과거에 비하면 대폭 늘어났다.
전업 어시스턴트로 살아남은 기술
전업 어시스턴트로 살아남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외로운 밤샘 작업으로 까먹은 술병들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꽤 혹독한 성장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제는 포트폴리오와 경력이 있고, 그동안 쌓아온 실력이 있기 때문에 괜찮은 조건의 일감을 선택하여 일할 수 있다. 이는 구인구직 사이트를 꾸준히 살펴보며 업계의 흐름을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아는 사람을 통해 알음알음 일감을 받았지만, 이제는 실력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곳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낀다.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의 마음가짐 역시 중요했다. 처음부터 ‘적당히 하고 그만두자’가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아서 구직활동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자’라는 다짐으로 시작했다. 다시 미대 입시생이 된 마음으로 여러 서적과 인터넷 자료를 찾아 모았고, 비슷한 장르의 웹툰을 탐독하며 상황에 따른 연출법을 연구했다. 시도 때도 없이 재미로 보던 웹툰이 일과 일상의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부작용과 피로도 있긴 했지만, 그 누가 가르쳐 주는 것보다 많은 공부가 되었다.
어시스턴트로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작업을 잘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수정 요구나 별개의 지시사항은 없었지만 업로드된 원고를 보면 수정된 컷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어떤 부분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분석하고 다음 원고에 그 내용을 반영했다. 또한 나는 채색 담당이지만, 콘티 파일을 확인해서 장면 전개를 파악하고 그 내용을 참고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가장 오래 일했던 작품의 작가님은 거의 전적으로 내 스타일을 존중해 주셨다. 작품 시작부터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연재 중간에 투입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등장인물들과 참고할 만한 장면들을 모아 자료로 정리해서 원작 작가님의 스타일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을 알아주셨던 것일까, 작가님은 수정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과분한 칭찬을 하셨다.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시스턴트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시스턴트는 작품에 도움을 주는 스태프이며 예술직이 아닌 기술직에 가깝다. 때문에 어시스턴트는 원작 작가의 스타일을 뛰어넘는 실력 발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의 틀 안에서 작품 스타일을 해치지 않고 본인의 기술을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작화의 통일성이 유지되어야 독자들이 작품을 볼 때 어색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원작 작가의 작화 패턴을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때문에 중간에 투입이 되더라도 독자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원작 작가의 작화 패턴에 최대한 맞추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매 작품을 끝마칠 때까지 안정감 있게 일할 수 있었다.
어시스턴트가 더 존중받는 날이 오길 바라며
이제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 의뢰가 들어온다. 그래서 그간 입시 미술을 통해 배출했던 제자 중 만화에 일가견 있는 친구들을 교육해 함께 일하고 있다. 기본기가 있는 친구들이라 내가 쌓아왔던 노하우 위주로 초기 교육을 하고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면 모두 완성도 있게 맡은 일들을 해낸다. 혼자서 할 때는 주당 2~3개의 작품을 힘겹게 작업했는데, 팀을 꾸리고 나니 작업량이 분산되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포트폴리오도 순조롭게 쌓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웹툰 시장에 전문 인력을 더 많이 보급 및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의 목표는 제대로 된 ‘어시스턴트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시스턴트가 단순 보조자로 취급되지 않고 웹툰 제작에 중요한 인력으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인식을 바꾸고 싶다. 출판만화 시장이 초 단위로 작품이 업데이트되는 웹툰 시장으로 바뀐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어시스턴트에 대한 인식도, 어시스턴트의 지위도 바뀌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